기획 완결 임시정부100년, 고난의 3만리

미·러 반대로 정부 자격 아닌 개인 자격으로 귀국

입력 2019. 03. 29   16:20
업데이트 2019. 03. 29   16: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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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시정부 100년, 고난의 3만리


<48>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환국


일제의 항복은 예견된 일이었으나, 갑작스러운 일이기도 했다. 1945년 5월 제2차 세계대전 동맹국인 이탈리아와 나치 독일의 연이은 항복, 8월 6일 히로시마와 8월 9일 나가사키 원폭투하에 따른 대규모 피해, 8월 8일 러시아의 대일선전포고는 일제의 항복을 어느 정도 예견하게 만들었다. 다른 한편으로는 일제가 본토 사수를 내걸고 정예 병력과 군비를 모으며 옥쇄작전까지도 불사할 태세로 나왔기 때문에 일제의 항복은 급작스러웠다.    

임정 요인 환국 기념 사진(1945.11. 중경 임시정부청사).
임정 요인 환국 기념 사진(1945.11. 중경 임시정부청사).

도노반 소장과 국내정진작전 협의를 마치고 나오는 김구 주석 일행(1945.8. 서안).
도노반 소장과 국내정진작전 협의를 마치고 나오는 김구 주석 일행(1945.8. 서안).

‘국내외 동포에게 고함’(1945.9.3. 김구).
‘국내외 동포에게 고함’(1945.9.3. 김구).
  

임정 본국 침투 앞두고 일제 항복

우리 힘으로 국토회복 기회 잃어

김구, 광복군 대원 ‘정진군’ 편성

국내 선발대 투입, 日에 의해 무산

미·러 남북 분할 점령, 군정만 인정

임시정부 국민에 봉환 실행 못해  


임시정부 입장에서는 너무나 아쉬운 일이었다. “나는 이 소식(일제의 항복)을 들을 때 희소식이라기보다 하늘이 무너지고 땅이 갈라지는 느낌이었다. 몇 년을 애써서 참전을 준비했다. 산동반도에 미국의 잠수함을 배치하여 서안훈련소와 부양훈련소에서 훈련을 받은 청년들을 조직적 계획적으로 각종 비밀무기와 무전기를 휴대시켜 본국으로 침투케 할 계획이었다. 국내 요소에서 각종 공작을 개시하여 인심을 선동하며, 무전으로 통지하여 비행기로 무기를 운반해서 사용하기로 미국 육군성과 긴밀한 합작을 이루었는데 한 번도 실시하지 못하고 왜적이 항복한 것이다. 이제껏 해온 노력이 아깝고 앞일이 걱정이었다.”

김구 주석도 이렇게 아쉬운 마음을 백범일지에서 표현하고 있다. 미군과 함께 국내 정진작전을 수행해 우리 힘으로 국토를 회복할 기회가 마지막 단계에서 무산된 것이다. 더 나아가 진정한 참전국이자 승전국으로 임시정부가 당당하게 국내로 환국하고, 국내 동포들 앞에서 한국광복군이 ‘조선 주둔 일본군(조선군)’의 항복을 받을 기회도 사라진 것이다. 어찌 안타깝고 아쉬운 일이 아니겠는가.

하지만 지체할 수 없었다. 환국을 준비해야 했기 때문이다. 김구 주석이 일제의 항복 소식을 들은 것은 8월 10일 서안에서다.

도노반 소장을 비롯한 미국 전략정보국(OSS) 대표단과 광복군의 국내정진대 파견을 위한 공동작전을 협의하러 서안에 왔던 시기였다. 여기에서 8월 7일 작전 협의를 마친 양측이 국내정진대 파견을 개시하려는 참이었다. 이때 일제가 항복한 것이다. 그래서 김구 주석은 이범석 제2지대장과 협의해 광복군 대원을 선발해 ‘정진군’을 편성하고, 이들을 국내에 선발대로 들여보내기로 했다. 미국 OSS 대원과 함께 이들은 C-47 비행기로 8월 18일 국내에 진입해 여의도비행장에 도착했다. 하지만 일본군이 이들을 포위하고 국내에서의 활동을 용납하지 않았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중국으로 귀환할 수밖에 없었다.

다른 한편으로는 서안에서 국무회의를 열고 다섯 가지 행동방침을 결의했다. 첫째, 귀국해서 정권을 국민에게 봉환한다. 둘째, 귀국해서 반포할 당면정책을 기초한다. 셋째, 대외교섭을 빨리 전개해 귀국 절차를 갖춘다. 넷째, 정부 및 의정원의 일체 문헌과 집물을 정리한다. 다섯째, 제39차 의회 소집을 요구한다. 핵심은 국내로 들어가 그동안 유지해 왔던 임시정부를 국민에게 봉환하고, 임시의정원 회의를 열어 환국에 관련한 내용을 결정한다는 것이다.

이 결의에 따라 8월 17일 임시의정원 제39차 임시의회가 열렸다. 회의는 순조롭게 진행되지 못했다. 조선민족혁명당을 비롯한 야당 측에서 ‘임시정부 개조’와 ‘국무위원의 총사직’을 요구했기 때문이다. 정부와 야당이 대립하는 가운데 8월 18일 김구 주석이 서안에서 중경으로 돌아왔다. 김구 주석은 회의에 참석해 서안에 다녀온 경과를 보고하는 한편, 야당 측의 요구에 대해 “현직 국무위원은 총사직할 필요가 없다”며, 정부 주도 아래 “입국을 위한 준비가 진행되고 있다”고 답변했다. 그리고 국무회의에서 결정한 대로 환국 준비를 해 나갔다.

먼저 광복을 맞이한 동포들에게 천명할 임시정부의 입장과 정책을 기초하고, 9월 3일 주석 김구 명의로 ‘국내외 동포에게 고함’을 발표했다. 여기서 임시정부는 광복은 “허다한 우리 선열의 보귀(寶貴)한 열혈의 대가와 중·미·소·영 등 동맹군의 영용한 전공”에 의한 것이라고 정의했다. 광복이 연합국 승전의 결과만이 아니라 임시정부를 비롯한 우리 독립운동의 피땀의 성과임을 분명히 밝힌 것이다.

이와 함께 임시정부는 국내에 들어가 추진할 과제를 ‘임시정부 당면정책’ 14개 항에 담아 발표했다. 핵심내용은 임시정부가 현 정부대로 환국한다는 것, 국내에 들어가 각계의 대표들로 구성된 회의를 소집해 과도정권을 수립한다는 것, 과도정권이 수립되면 임시정부의 모든 것을 과도정권에 인계한다는 것 등이었다. 그리고 과도정권이 수립될 때까지 임시정부가 정부 역할을 수행한다고도 밝혔다. 그렇지만 일은 임시정부 뜻대로 돌아가지 않았다. 미국과 러시아가 반대했기 때문이다. 미국과 러시아는 38도선을 경계로 남북을 분할 점령한 뒤, 각기 군정을 남북한 ‘유일정부’로 삼아 임시정부를 비롯한 어떤 정부도 인정하지 않았다. 더욱이 임시정부의 환국조차 반대했다. 정부 자격이 아니라 개인 자격으로 귀국하라는 것이었다. 임시정부를 그대로 가지고 환국해 국민에게 봉환한다는 방침조차 실행하기 어려운 상황이 되었다.

임시정부는 이를 받아들일 수 없었다. 정부 자격으로 들어가기 위해 백방으로 노력했다. 중국 국민당정부도 임시정부에 대한 지원을 아끼지 않았다. 주미 중국대사에게 정부 자격으로 들어갈 수 있도록 미국과 협상할 것을 지시하고, 주중 미국대사관을 찾아가 임시정부의 환국을 요청하기도 했다. 그러나 미국의 방침에는 변화가 없었다.

임시정부는 11월 5일 중경에서 상해로 이동했다. 상해에 머물며 임시정부의 이름으로 환국해야 한다고 버텼지만, 임시정부 힘으로 해결하기 어려운 일이었다. 국무위원들 가운데는 개인 자격으로 들어가느니 차라리 귀국하지 않고 있다가 미국이 물러나면 들어가자는 사람도 있었다. 논의가 분분했지만 임시정부의 요인들이 모두 귀국하는데 어찌 임시정부로 귀국하는 것이 아니겠느냐며, 미국의 요구를 받아들였다. 명분도 중요하지만 서둘러 환국해 정식 정부를 세우는 일이 더 시급했기 때문이다.

개인 자격의 환국도 쉽지 않았다. 미국이 보내온 비행기가 한 대였고, 탑승인원도 15명뿐이었다. 상해에 도착한 국무위원만 해도 29명이었다. 결국 귀국하는 순서를 제1진과 제2진으로 나누어야 했다. 그래서 김구 주석과 김규식 부주석을 비롯한 제1진이 11월 23일 환국하고, 임시의정원 의장 홍진과 외무부장 조소앙과 내무부장 신익희 등 제2진이 12월 1일 환국한 것이다.


김용달 한국독립운동사 연구소장
자료=필자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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