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독자마당

용인기지에 불어오는 문학의 바람

입력 2019. 03. 22   17:00
업데이트 2019. 03. 22   17:08
0 댓글


전 병 율 소령(진) 육군항공작전사령부
전 병 율 소령(진) 육군항공작전사령부

   “제발 책 좀 읽어라.”

소대장 시절, 소대원들에게 가장 많이 했던 잔소리였다. 차고 넘치게 좋은 책들이 있어도 도서관은 늘 한산했고 용사들은 책보다 TV와 더 친했다. ‘책을 읽지 않을 자유’가 있으니 나의 잔소리는 늘 허공을 맴돌았고 항상 안타까웠다.

10년이 지나도 안타까운 마음은 변하지 않았다. 엄선된 신간이 분기마다 채워져도, 독서카페를 잘 꾸며 봐도, 독후감 경연대회를 열어 휴가를 보내줘도, 강사를 초빙해서 강연을 열어 봐도 효과는 묘연했다. 책은 늘 읽는 사람만 읽었다. 독서의 바람은 불어오지 않았다.

요즘 세대를 말하자면 데이터를 ‘적립’하는 세대가 아니라 ‘소비’하는 세대다. 매월 10GB가 넘는 데이터가 부족해서 무제한 데이터를 사용하고, 유튜브와 인스타그램, 페이스북으로 소통한다. 짧은 영상과 사진이 더 친숙하다. 그런 의미에서 군대는 정말 데이터를 소비하고 싶어도 할 수 없는 최악의 장소라는 생각이 들 만도 하다. 그러니 이런 세대의 청년들에게 군대 내에서 책까지 읽으라 말하는 것은 어쩌면 과욕이 아닐까?

겨우 두 장짜리 계획이었다. 문학자판기를 처음 보고 이런 기계가 부대에 있으면 흥미로라도 문학을 쉽게 접할 수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무작정 개발자를 찾아가서 부탁을 드렸다. 우리의 현실을 말하고 큰 도움이 될 것 같다는 말을 전했다. 젊은 나이에 책을 읽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 일인지 우리는 서로 공감했고, 흔쾌히 제안을 받아주었다. 그 역시 이제 갓 서른이 된 청년이었다.


육군항공작전사령부 용인기지의 한 병사가 문학자판기를 이용하고 있다.  필자 제공
육군항공작전사령부 용인기지의 한 병사가 문학자판기를 이용하고 있다. 필자 제공


지난 연말 용인기지에 4대의 문학자판기가 설치됐다. 의욕이 앞서 추진했던 일이라 사실 효과를 반신반의하고 있었는데, 다행히 반응이 꽤 괜찮다.

매일 아침 문학작품이 인쇄된 감열지를 한 장씩 손에 들고 사무실 문을 여는 동료들, 책상 위에 좋은 글을 붙여 놓고 일을 하는 후배, 감열지 뒤에 마음을 눌러 담아 편지를 쓰는 병사들을 보면서 자연스럽게 문학이 생활에 잘 스며들고 있다는 생각을 했다.

문학이 생활을 바꿀 수는 없겠지만 이렇게 소소한 즐거움 주는 것만으로도 충분하다 생각했다.

부대장님부터 막내까지 전 부대원의 2019년 각오와 바람을 적어 감열지 아래쪽에 무작위로 인쇄되도록 했더니, 다른 이의 글을 보고 서로 안부를 묻고 대화를 나누는 일이 부쩍 많아졌다. 특히 잘 몰랐던 병사들의 마음을 짧은 글로나마 읽으니 이것이 소통하는 느낌이구나 하는 생각도 들었다.

‘책 좀 읽어라’ 잔소리하지 않아도 이제는 모두가 오늘의 문학작품을 기대하며 자판기 버튼을 누른다. 10년 전 허공을 맴돌던 말이 무색해졌다. 용인기지에서는 더는 문학이 도서관에 잠들어 있는 낡은 문장이 아니다. 매일 새롭게 발견되는 문장이다. 마르코 폴로와 콜럼버스의 항해다.

바람이 분다. 활주로를 타고 천천히 다가온다. 아직 추운 겨울이지만 저마다의 따뜻한 문장으로 데워진 바람이 불어온다. 문학이 온다. 봄이 오고 있다.


< 저작권자 ⓒ 국방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
댓글 0

오늘의 뉴스

Hot Photo News

많이 본 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