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획 완결 임시정부100년, 고난의 3만리

[임정 100년 고난의 3만리] 광복군 인면전구공작대, 임팔 등서 항일작전 ‘활약’

입력 2019. 03. 15   16:01
업데이트 2019. 03. 17   09: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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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6> 한국광복군의 영국군 지원 활동


인도주둔 영국군총사령부의 요청
한지성 등 9명 교육 후 영국군에 배속
귀순방송·전단제작·정보수집 담당
사기 꺾인 일본군 탈출·투항자 증가
만달레이선 포위된 영국군 탈출 도와
   

인면전구공작대 대원들
인면전구공작대 대원들


태평양전쟁과 대동아전쟁을 도발한 일제는 파죽지세로 동남아 국가를 유린하였다. 제2차 세계대전을 일으킨 나치 독일의 침공으로 함락된 프랑스와 네덜란드는 물론 영국까지도 동남아 식민지에 관심을 두지 못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1941년 6월 독일이 러시아를 침공하면서 서유럽과 동유럽으로 전선이 확대되고, 같은 해 12월 일제가 진주만을 공습하면서 미국이 본격적으로 제2차 세계대전에 참전, 전쟁 양상은 바뀌어 갔다. 특히 1942년 6월 미드웨이해전에서 미국이 일본을 크게 무찔러 태평양 제해권을 회복한 이후 동남아지역의 전쟁 양상도 변해갔다.

이즈음 1942년 겨울 인도 주둔 영국군총사령부는 조선민족혁명당에 공작대원 파견을 요청해 왔다. 이에 따라 조선민족혁명당 총서기 김원봉은 조선의용대 대원 최성오와 주세민을 인도에 파견했다.


이들의 공작 활동이 대일작전에 성과가 컸던 덕분인지 영국군은 더 많은 인원의 파견을 요청해 왔다. 이를 계기로 양측 사이에 협정이 체결됐다. 인도 주둔 영국군총사령부 대표 콜린 매켄지(Colin MacKenzie)와 조선민족혁명당 총서기 김원봉이 1943년 5월 ‘조선민족군 선전 연락대’ 파견에 관한 협정을 체결한 것이다.


조선민족혁명당은 영국군의 대일작전을 협조하고 영국군은 조선민족혁명당의 대일투쟁을 원조한다는 원칙 아래 조선의용대 대원들을 파견해 영국군과 함께 활동하도록 한다는 내용이었다.


한국광복군 파인연락대에 관한 협정 초안
(1945.3.27.)
한국광복군 파인연락대에 관한 협정 초안 (1945.3.27.)


하지만 이때는 조선의용대가 한국광복군으로 편입되고, 한국광복군은 ‘한국광복군 9개 행동준승’에 따라 중국군사위원회의 지휘 통솔을 받는 상황이었다. 이 때문에 조선의용대원의 인도 파견은 광복군총사령부와 중국군사위원회의 승인이 있어야 했다.


따라서 광복군총사령부는 중국군사위원회의 승인 아래 조선의용대원이 소속된 제1지대를 비롯해 각 지대에서 인도에 파견할 대원들을 선발했다. 선발기준은 신체조건과 일본어와 영어 등 어학능력이 중시됐다. 선발된 인원은 한지성과 문응국 등 9명이었다. 바로 인면전구공작대(印緬戰區工作隊)로 이들은 1943년 8월 말 인도 캘커타에 도착했다.

인도에 도착한 광복군 대원들은 영국군으로부터 교육을 받은 후 영국군에 분산 배속됐다. 영국군에 배속된 뒤 이들은 임팔(Impal)전선에 투입됐다. 임팔은 일본군이 점령하고 있던 미얀마와 접경지역으로 영국군과 일본군이 대접전을 벌이던 곳이다.


당시 미얀마는 미국을 비롯한 연합군이 중국 전선으로 전쟁물자를 수송하는 주요 통로였다. 일본군에 의해 중국의 해안선이 봉쇄되자 연합군은 미얀마 남쪽 랑군(Rangoon)에서 북부 라시오(Lashio)를 거쳐 중국의 곤명으로 이어지는 루트로 전쟁물자를 수송했던 것이다. 그러나 일본군이 미얀마를 점령하면서 이 수송루트가 차단되고 말았다. 이를 타개하기 위해 영국군과 중국군은 1942년 이래 일본군과 치열한 접전을 벌이고 있었다.   


광복군 인면전구공작대가 임팔전선에 투입된 것은 1944년 초였다. 1월 7일 문응국과 김상준과 나동규는 인도 브야크에서 영국군 제201부대와 함께 임팔전선으로 출발했고, 제204부대에 배속된 박영진과 김성호는 아라칸을 거쳐 3월 7일 임팔전선으로 이동했다. 대장 한지성도 이곳에 도착하자 이들은 임팔을 중심으로 전개되던 영국군의 대일작전에 참여했다.

인면전구공작대가 임팔에 도착한 직후 영국군과 일본군 사이에 대접전이 벌어졌다. 1944년 3월 말 일본군이 친드윈강을 건너 임팔지역을 공격해 오면서 그곳을 둘러싸고 영국군과 일본군이 치열한 공방전을 계속한 것이다. 영국군은 이 전투에서 큰 승리를 거두었다.


임팔지역에서 일본군을 격퇴한 영국군은 1945년에 들어와 미얀마로 퇴각한 일본군에 대해 반격작전을 개시했는데, 여기에도 인면전구공작대가 참전했다. 새로 파견된 안원생은 사령부에 배속됐고, 한지성과 박영진과 김성호는 미얀마 중북부지역에서 만달레이(Mandalay)를 향해 남진하는 영국군 부대, 최봉진과 김상준과 이영수는 미얀마 중북부지역을 우회해 만달레이를 향해 북상하는 영국군 부대, 그리고 문응국과 송철은 미얀마의 수도 랑군 상륙작전에 참전한 것이다.

일본군을 동남아시아에서 몰아내기 위한 미얀마탈환작전은 연합군에 의한 대규모 작전으로 전개됐다. 이 작전에는 영국군과 인도군을 비롯해 중국군과 미국군이 연합해 1945년 5월에는 수도 랑군을 탈환했고, 7월에는 일본군을 완전히 패퇴시켰던 것이다. 미얀마탈환작전이 완료된 후 인면전구공작대는 인도 캘커타로 철수했다. 여기서 새로운 군사작전를 위해 대기하던 중 일제가 무조건 항복하자 1945년 9월 10일 전원이 중경의 광복군총사령부로 복귀했다.


광복군 인도 파견 기사(신한민보 1943년 9월 2일 자)
광복군 인도 파견 기사(신한민보 1943년 9월 2일 자)


인면전구공작대원들의 주요한 임무는 대적 선전활동이었다. 일본군을 대상으로 하는 귀순 방송과 전단 제작, 그리고 포로 신문과 일본문서 번역, 정보수집 등을 담당했다. 이러한 활동은 일본군에게 심리적으로 큰 영향을 끼쳤음은 물론 영국군의 대일작전에도 커다란 도움을 주었다. 대적 선전활동이 시작되면서 일본군에 탈출자들이 생겨나고 투항자들이 증가한 것이다. 그리고 정보문서 분석과 통신 감청으로 일본군의 동태나 작전계획을 사전에 알아냄으로써 영국군이 대일작전을 수행하는 데 결정적인 도움을 주기도 했다.

영국군이 크게 패했던 만달레이전투에서 영국군을 일본군의 포위로부터 벗어날 수 있게 한 것이 대표적이다. 1944년 5월 영국군 제17사단이 미얀마탈환작전을 개시해 만달레이로 남하하던 중 일본군의 선제공격을 받고 포위되고 말았다. 영국군이 악전고투할 때 문응국 등이 정보문서와 포로 신문을 통해 일본군의 동태를 정확하게 분석 제공함으로써 영국군이 일본군의 포위망을 벗어나 기사회생할 수 있었다.

결국 인면전구공작대는 연합국의 일원으로 제2차 세계대전에 참전하기 위해 창설한 한국광복군의 임무를 최전선에서 구현했고, 이로써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국제적 위상을 드높였던 것이다. 자료=필자 제공 <김용달 한국독립운동사연구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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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공모 대상 : 국군장병 포함 전 국민
   작품 규격 : 공백 포함 2000자 이내의 한글문서(HWP)
   접수처 : 인터넷 ‘더캠프앱’ 홈페이지

            (이름, 소속, 계급, 명함판 사진, 연락처, 주소 기재 필수)/우수작 국방일보 게재
   기간 : 4월 15일부터 5월 15일까지
   문의 : 더캠프 1661-999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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