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획 완결 용어로 다시 읽는 미술사

성격과 풍모까지 묘사한 조각 정원을 옮긴 듯 사실적인 벽화

입력 2019. 02. 20   17:32
업데이트 2019. 02. 20   17:34
0 댓글

6 로마의 미술, 프레스코, 세코, 모자이크 그리고 스케노그라피아, 콤펜디아리아


아우구스투스상. 바티칸미술관 소장.  필자 제공
아우구스투스상. 바티칸미술관 소장. 필자 제공
고대 로마의 생선을 묘사한 모자이크.  필자 제공
고대 로마의 생선을 묘사한 모자이크. 필자 제공
고대 로마 리비아 빌라의 벽화. 로마국립박물관 팔라조 마시모 소장.  필자 제공
고대 로마 리비아 빌라의 벽화. 로마국립박물관 팔라조 마시모 소장. 필자 제공

로마의 문명은 이제 ‘미술’이라는 용어로 정리되기 시작한다. 이전의 지역을 기반으로 한 현상들을 ‘문명’이라고 하는 이유는 물질적이며 실용적인 삶의 방식을 포함하는 개념인 반면 ‘문화’란 도덕·가치관·종교 등 정신적인 측면을 중하게 다룬 때문이다. 사실 문명시대는 문화 또는 미술이라는 개념보다는 삶을 위한 수단 또는 방편으로서 실용적 목적 아래 제작된 유물들을 통해 당시를 조망했다면, 이후 문화 또는 미술이라는 말은 가치중심적이며 비가시적인 측면의 현상이 나타났음을 방증하는 것이다. 즉 실생활과는 직접 관련이 없지만 취미와 미적 태도에 따라 제작된 회화·조각·공예품 등이 등장하기 때문이다.


회화·조각·공예품의 등장


지금은 로마라는 도시명으로 남았지만 로마 미술은 기원전 27년경 ‘존엄한 자’라는 의미의 아우구스투스(Augustus)가 황제로 즉위한 때부터 제정로마가 동·서 로마로 분리된 395년 또는 476년 서로마제국의 멸망까지 그리고 때로는 1453년 비잔티움 제국이 멸망한 때까지의 문화를 의미한다.

이탈리아 반도를 최초로 지배했던 민족은 에트루리아(Etruria)인들이었다. 이들은 기원전 10~8세기경 터키 지방에 살았던 리디아인으로 지금의 토스카나 지방에서 알프스산맥 아래까지 세를 떨쳤다. 이들은 이미 BC 8세기경부터 돌로 성을 쌓았으며, 도로를 닦고 다리를 만들고 길을 포장했다. 그리고 상하수도 시설을 갖춘 도시의 형태를 완성했다. 특히 원형 아치는 로마 문화의 근간을 세웠다. 또 건축·조각·회화·공예에 있어서 독창적인 면모를 세워나갔다.

이후 로마인들은 이탈리아 반도를 나눠 점령하고 있던 이민족들을 몰아내고 자신들의 제국을 세웠다. 이들은 점점 힘을 키워 지중해 동부에서 이집트, 이스라엘은 물론 서부의 카르타고(지금의 튀니지), 지금의 스페인인 이베리아 반도, 프랑스와 벨기에를 망라하는 서부 유럽 즉 라인강과 알프스, 피레네산맥을 넘어 대서양에 연한 거의 모든 지역을 통치했다. 이런 방대한 제국을 통치하기 위해 이들은 ‘분권’과 ‘자치’라는 알렉산더의 전례를 따랐다. 대제국이 된 로마는 막대한 부를 가져다 줬고, 국가의 통치이념으로 기독교를 공인하면서 신화의 시대에서 종교의 시대로 자리한다.


회반죽 마르기 전 칠하는 프레스코 벽화

로마의 회화는 현재도 계속 발굴되고 있다. 회반죽을 발라 마르기 전에 채색하고 마르면서 색이 고착되는 프레스코(Fresco)가 벽화로 제작됐다. 그러나 완전히 마른 회벽에 석회수에 물감을 풀어 그리는 세코(Secco) 기법도 쓰였다. 또 원화 위에 돌이나 유리, 색이 있는 대리석, 타일 같은 것을 모르타르나 석회, 시멘트로 고정시켜 그림을 완성하는 모자이크(Mosaic)가 크게 성했다. 이는 마치 요즘 디지털 사진에서 볼 수 있는 픽셀과 같은 속성을 지녔다.


고대 원근법 스케노그라피아

로마 시대의 그림은 ‘눈속임 회화(Trompe-l’œil)’를 시도했다. 공간은 마치 무대에서 소실점을 통해 깊이감을 느끼는 것처럼 눈을 속이는 스케노그라피아(Scaenographia)라는 고대 원근법을 사용했다. 바사리가 ‘감탄스러운 속임수’라고 했던 15세기에 세워진 산 사티로성당(Chiesa di Santa Maria presso San Satiro)의 제단 뒤 벽을 착시 현상을 이용해 마치 깊은 공간이 있는 것처럼 느껴지게 만든 것도 실은 이런 고대원근법을 원용한 것이다. 또 인상파처럼 생략하면서 빠른 필치로 그려내는 콤펜디아리아(Compendiaria)라는 기법이 성행하면서 분위기 위주의 그림으로 변화해 나갔다. 폼페이 벽화가 공상적이며 신화적·헬레니즘적 성격인 반면 로마 고대 미술의 진수인 ‘리비아 빌라의 벽화(Frescoes from the Villa of Livia)’는 이탈리아 고대 미술의 걸작 중의 걸작이다. 월계수·종려나무·오렌지·석류 등 과실수와 꽃이 피고 새가 지저귀는 사실적인 정원은 자연주의의 반영이다.


고대 로마 걸작 ‘리비아 빌라의 벽화’


조각은 그리스의 뒤를 이었다. 1867년 리비아 빌라에서 발굴된 아우구스투스(Augustus, BC 63~AD 14)를 조각한 ‘프리마 포르타(Augusta of Prima Porta)’는 시대의 걸작인 동시에 벽화가 그의 아내였던 리비아 드루실라(Livia Drusilla, BC 58~AD 29)의 집임을 밝혀준 증좌다. 기원전 2세기 후반, 로마가 그리스를 정복하면서 많은 그리스 조각들이 로마로 옮겨졌고 파시텔레스(Pasiteles), 클레오메네스(Cleomenes) 등 재주 있는 그리스 조각가들이 로마로 건너와 그리스의 명작들을 복제했다.


그리스 조각의 단정함에 로마의 자연주의 결합한 역작 ‘아우구스투스 상’


로마 조각은 그리스를 잇고 있지만 특히 초상 조각은 단순하게 외양만 묘사하는 것이 아니라 성격과 풍모까지 묘사함으로써 남다른 성과를 거뒀다. 또 로마의 평화(Pax Romana) 시대를 구현한 아우구스투스 황제 시대에 들어서는 단정하고 고전적인 양식으로 정리돼 ‘프라마 포즈타의 아우구스투스 상’이나 ‘아라 파키스(Ara Pacis)’의 부조 같은 작품들은 그리스 조각의 엄격함과 단정함을 토대로 로마의 사실적인 자연주의적 경향을 결합시킨 역작으로 남았다. 또한 로마인들은 역사적 사실이나 황제의 업적을 기리기 위해 회화성 높은 고부조의 역동적인 작품들을 많이 제작했다. 그러나 조각은 건축의 일부로 다뤄졌기 때문에 도시의 발전에 따라 많은 변화를 겪으며 로마의 자연주의를 완성한다.

그리스를 포함하는 로마 시대 조각의 정수는 이탈리아 로마 테르니미역 근처의 팔라조 마시모(Palazzo Massimo)와 디오클레치아노 욕장(Terme di Diocleziano), 팔라조 알템프스(Palazzo Altemps) 그리고 크립타 발비(Crypta Balbi) 등 4곳의 국립박물관에 분산 전시돼 있다.

<정준모 큐레이터·전 국립현대미술관 학예연구실장>


< 저작권자 ⓒ 국방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
댓글 0

오늘의 뉴스

Hot Photo News

많이 본 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