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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사사 2월 15일] 1974년 백령도에 전차포가 배치된 연유

신인호 기사입력 2019. 02. 14   08:15 최종수정 2020. 02. 13   14:57

백령도 심청각에 전시되어 있는 M47전차. 국방일보DB.


백령도에 퇴역 전차포가 배치된 사연 북한의 우리 어선 격침 도발사건에서 비롯 백령도와 연평도 등 서해 5도에는 늘 긴장감이 감돌았다. 돌이켜보면, 이곳 서해 5도에 대한 북한의 도발에 대비해 의미 있는 화기들이 휴전선 전방부대보다 먼저 배치되곤 했다.


1970년대 중반 미국산 105mm M101곡사포를 모방개발한 국산 105mm 곡사포, 2000년대 한국 포병의 주력 K9 155mm 자주포는 육군 장비로 개발됐음에도 불구하고 가장 먼저 배치한 곳이 내륙의 육군 전방부대가 아닌 바로 백령도였다.


그 중에서도 특이한 사례가 있는데, 백령도에는 포병 화포가 아닌 퇴역한 탱크에서 떼어낸 ‘90mm 탱크포(전차포)’가 배치되어 있었다. 백령도를 노리고 상륙해올 적 부대를 타격할 수 있는 해안포 역할을 맡긴 것이었다.


어떤 까닭이 있었을까.


1974년 2월 15일, 백령도 근처 공해상에서 조업 중이던 우리 홍어잡이 어선 1척(선원 12명)이 북한 고속정에 의해 격침되고 또 1척(선원 13명)은 납북된 사건이 발생했다. 전차포의 백령도 배치는 바로 이 사건에서 비롯됐다.


북한은 1972년 서해 5도에 도발을 집중했다. 특히 스틱스(styx) 대함미사일을 탑재한 고속경비정까지 운용하며 아군을 위협했다. 당시 북한 함정은 북방한계선을 200회 이상 침범했고, 1973년 7월 27일에는 백령도 근해에서 북한 경비정 4척이 우리 어선 1척을 격침시켰었다. 우리 군은 공군 전투기와 해군의 구축함까지 동원해 서해5도를 오가는 선박들을 엄호하기도 했다.


그런데 이런 시기에 또 한 차례 민간인이 희생 당하는 도발이 벌어진 것이다.


당시 대통령을 보좌하던 김정렴 비서실장의 회고록에 의하면, 이때 박정희 대통령은 서종철(徐鐘喆)국방부장관과 한신(韓信) 합참의장, 그리고 육·해군 참모총장 등 군 지휘부를 호출했다.


대통령은 한신(韓信) 합참의장에게 "한 장군이 직접 백령도에 가서 상황을 면밀히 조사하시오. 북한이 침공할 경우를 생각해 지형지물도 살펴 어떻게 하면 방비책을 세울 수 있을지 보고하시오"라고 지시했다.


한신 장군은 스틸웰 유엔군사령관과 함께 백령도로 가 상황을 파악하고 작전 부서를 통해 ‘서해5도 사수(死守)작전’을 세웠다. 그 조치 중 하나가 서해5도 경비를 위해 이곳 해병대는 물론 예비군까지 M16 소총으로 무장시킨 것이었다. 현역병도 아직 M1소총을 쓰던 시기였다.


대통령은 특별히 "못쓰게 된 탱크에서 포를 뜯어다 해안포로 설치하라. 그 위력으로 북한 상륙부대에 타격을 줄 수 있다"고 지시했다고 한다. 이것이 차대에서 떼어낸 ‘탱크포’를 백령도에 배치한 배경이다. 대통령은 "만일 북한군이 상륙하더라도 마지막 순간까지 항전하라. 육·해·공군이 총력을 다해 신속히 탈환할 것이니 1주일만 버텨라"라고 했다니 당시 상황이 얼마나 절박하고 위기상태였는지 짐작케 한다.


신인호 기자 < idmz@dema.mil.k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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