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완결 병영칼럼

[제갈소정 병영칼럼] 생각 꺼내기

입력 2019. 01. 16   16:39
업데이트 2019. 01. 16   16: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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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갈소정 벌라이언스 대표·교육전문가
제갈소정 벌라이언스 대표·교육전문가


초등학교 5학년 담임을 맡던 시절, 아이들이 가장 어려워했던 숙제는 일기 쓰기였다. “12살이니, 12줄은 써보자”라고 독려했지만 몇몇 아이는 그것도 아주 힘들어했다. 필자가 생각하는 일기 쓰기의 가장 큰 목적은 ‘생각 꺼내기’다. 잠깐이라도 삶을 돌아보고 깊이 있게 생각하는 연습을 하기 위함이다. 작문 훈련을 위해서는 문장의 형태를 사용하는 게 도움이 되겠지만, 꺼내기를 위해서라면 서너 단어만 적어도 괜찮다. 수려한 문장보다 더 중요한 건 솔직한 내 생각과 느낌을 담는 것이다. 형태보다 더 중요한 것은 본질이다.

지난번 칼럼에서 소개했던 ‘9번째 지능(실존지능)’을 키우기 위해 구체적으로 무엇을 해야 할지에 관한 질문을 많이 받았다. 하루에 한 단어씩이라도 자신만의 생각을 기록하는 것으로 시작해 보자. 지식의 범람 속에 무언가를 받아들이는 것이 익숙한 시대를 살아가고 있기에 처음부터 근원적인 생각을 끄집어내기는 쉽지 않다. 하지만 진짜 공부는 ‘집어넣는 것’이 아니라 ‘꺼내는 것’에서 시작한다. 머릿속을 회전시켜 진짜 내 안의 생각을 캐낼 수만 있다면 책이나 교과서뿐 아니라 친구와의 수다, 드라마, 영화, 만화 등도 아주 좋은 공부 재료가 된다.

제2차 세계대전에 참전한 자세츠키라는 러시아 청년이 있었다. 전쟁 통에 머리에 맞은 총상으로 인해 그는 아무것도 기억하지 못하게 됐다. 자기가 누구인지에 대한 기억을 비롯해 말과 글까지 잃은 그는 절망하기보다는 기억과 생각이 떠오를 때마다 메모하기를 시도했다. 자세츠키가 25년간 쓴 무려 3000쪽에 이르는 글은 신경심리학자 알렉산드르 R 루리야의 『지워진 기억을 쫓는 남자』에 기록됐고, 이 책은 아직도 낭만적 과학을 대표하는 고전으로 손꼽히고 있다.

자세츠키가 이 작업에 매달렸던 가장 큰 이유는 그것들을 순서대로 배열해 잃어버린 자신의 기억을 회복하고 재구성하기 위해서였다. 쓸모없는 인간이라 느껴지는 삶에서 벗어나 의미 있는 인간으로 다시 태어나고 싶었던 것이다. 인간의 삶은 되돌아보고, 진실로 기억되고, 적절히 활용될 때 빛난다. 기억은 수동적인 것이 아니라 기록이라는 능동적 행위로 완성된다. 이렇게 삶을 적극적이고 창조적으로 구성할 때 인생의 존재 이유를 조금씩 발견하게 될 것이다.

유치원생 딸아이는 가끔 구슬로 목걸이를 만든다. 고사리손으로 예쁜 구슬들을 이리저리 배열해 실에 하나씩 끼워나가다 보면 마침내 딸아이표 목걸이가 완성된다. 우리의 삶도 그렇다. ‘구슬이 서 말이라도 꿰어야 보배’라는 속담처럼 흩어져 있는 구슬은 목걸이가 될 수 없다. 우리에게 시간이라는 실은 있지만, 막상 꿰려면 마땅한 구슬이 보이지 않을뿐더러 어떤 구슬부터 끼워야 할지 고민된다.

날마다 한 단어씩만이라도 나만의 생각과 감정을 기록해 나가는 것은 구슬을 모으는 과정이다. 저녁에 쓰는 일기가 꽉 차 있는 것을 비워낼 때의 개운함을 준다면, 아침에 쓰는 일기는 고요하고 빈 것 안에서 숨어있는 보물을 찾아내는 벅찬 감동을 선사한다. 손을 움직여 끄적거리거나 그림으로 시작해보자. 내 안에서 꺼내는 생각과 감정들은 진실로 나에게 어울리는 구슬이며, 자세츠키처럼 생각의 구슬들을 자신만의 관점으로 구성해 보려는 노력만이 유의미한 아름다운 인생 목걸이를 만드는 방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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