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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정100년] 연합국 일원 대일전쟁 참전 국제사회에 공식 천명

기사입력 2019. 01. 11   16:22 최종수정 2019. 01. 13   16:47

<38>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대일선전포고

태평양전쟁 도발에 김구 주석·조소앙 명의  1941년 12월 10일 대일선전성명서
영국군과 인도-버마전선서 연합작전 1945년 2월 28일 대독선전포고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대일선전성명서.

 
임시정부가 당·정·군체제를 갖추어 갈 즈음 세계 정세는 급변하였다. 일제의 중국 침략은 더욱 격화되었고, 제2차 세계대전이 발발하여 유럽은 전쟁의 소용돌이에 빠져들었다. 1939년 9월 1일 나치독일의 폴란드 침공으로 시작된 제2차 세계대전은 곧이어 유럽 전역으로 확대되었다. 영국과 프랑스는 연합작전으로 나치독일의 침략전쟁에 맞섰지만 이겨내지 못했다.


이듬해 난공불락으로 알려진 마지노방어선을 우회한 나치독일은 프랑스와 네덜란드와 벨기에를 점령하였고, 영국은 막대한 군사 장비를 버려둔 채 본토로 철수하고 말았다. 그리고 나치독일의 영국 공습이 감행되자 동남아시아에는 힘의 공백이 발생하였다. 2차 대전에서 프랑스와 네덜란드가 패전하고 영국이 고전하면서 이들의 동남아시아 식민지는 무주공산이나 다름없는 상태가 되었기 때문이다.

이 틈을 노려 일제는 1940년 7월 프랑스 식민지이던 베트남 북부를 침공하였다. 중국군에 대한 군사지원 루트를 차단한다는 이유였다. 못된 꿈과 버릇도 다시 되살아났다. 일제가 가진 터무니없는 꿈은 대아시아주의였고, 못된 버릇은 선전포고도 없이 남의 나라를 침략하는 것이었다.

대아시아주의는 청일전쟁 이후 대두하기 시작한 교묘한 침략논리였다. 한국과 중국의 반일의식을 호도하고, 서구 식민지 동남아시아 국가의 독립의지를 이용하려는 것이다. 한마디로 얘기하면 아시아에서 가장 문명화된 일본이 맹주가 되어 동양 삼국은 물론 아시아 여러 나라를 서구 제국주의 열강으로부터 지켜내야 한다는 논리다.

대아시아주의에 의하면 일제의 한국과 중국 침략도 동양을 서구세력으로부터 지키기 위한 이른바 ‘성전’이 되고, 대동아전쟁도 서구 열강의 식민지 지배 아래 있는 동남아시아 여러 민족을 구원하기 위한 ‘해방전쟁’이 되는 것이다. 러일전쟁 시기 ‘극동평화론’이나 2차 대전 시기 ‘대동아공영론’도 사실 여기에 뿌리를 둔 교언영색의 침략논리에 불과하였다.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대독선전포고문. 


선전포고도 없이 침략전쟁을 감행하는 못된 버릇은 청일전쟁이나 러일전쟁에서 이미 드러난 바 있다. 심지어 ‘만주사변’이나 ‘상해사변’ 그리고 ‘중일전쟁’처럼 빌미를 조작하여 침략전쟁을 자행한 경우도 많았다.

천재일우와 같은 동남아시아의 힘의 공백을 일제가 그냥 둘 리 없었다. 그래서 획책한 것이 이른바 ‘대동아전쟁’이었다. 가깝게는 침략전쟁 확대에 따른 군수물자를 확보하고, 멀리는 대아시아주의를 실현하여 이른바 ‘대동아공영권’을 구축하기 위한 것이었다.

진주만 대공습은 일제가 대동아전쟁을 획책하면서 가장 먼저 도발한 것이다. 동남아시아로 나아가기 위해서는 제해권 장악이 필수적이었다. 그런데 미국이 동남아시아로 나아가는 길목에 위치한 필리핀을 지배하고, 또 진주만에 해군기지를 설치해 제해권을 위협하였기 때문이다. 버릇대로 진주만 대공습도 선전포고도 없이, 그것도 현지시간 1941년 12월 7일 일요일 오전에 감행했다.

일제는 진주만을 공습하여 태평양전쟁을 도발하였고, 이틀 뒤 인도네시아를 침공하여 대동아전쟁을 일으켰다. 이제 2차 대전은 서구 유럽의 일만이 아니라 아시아·태평양의 일이 된 것이다. 당·정·군체제를 구축하여 중일전쟁에서 중국을 지원하던 임시정부도 가만히 있지 않았다. 더욱이 하와이를 비롯한 미국에는 1만 명 가까운 동포들이 거주하며 임시정부에 대한 재정 지원을 아끼지 않고 있었다.

이제 중일전쟁과 마찬가지로 태평양전쟁도 남의 일이 아니라 우리의 일이었고, 또 전쟁에 참가할 군대로 한국광복군도 편성되었다. 그래서 임시정부는 1941년 12월 10일 대일 선전포고로 ‘대한민국임시정부 대일선전성명서’를 발표하였다. 국무회의 결의를 거쳐 12월 10일 주석 김구와 외무부장 조소앙 명의로 대일 선전포고를 한 것이다.


일제의 진주만 공습으로  불타는 미 해군기지.

 

“우리들은 삼천만 한국인 및 정부를 대표하여 삼가 중·영·미·하(네덜란드)·가(캐나다)·오(오스트레일리아) 및 기타 여러 나라의 대일선전을 삼가 축하한다. 그것이 일본을 격파하고 동아를 재조하는 가장 유효한 수단이 되기 때문이다. 특히 아래와 같은 점을 성명한다. 첫째, 한국의 전체 인민은 현재 이미 반침략 전선에 참가하여 1개 전투 단위가 되어 있으며 축심국에 대하여 선전한다. 둘째, 거듭 1910년의 합방조약 및 일체 불평등조약의 무효와 동시에 반침략 국가들의 한국에서의 합법적인 기득 권익을 존중함을 선포한다. 셋째, 왜구를 한국과 중국 및 서태평양에서 완전 구축하기 위하여 최후 승리까지 혈전한다. 넷째, 맹세코 일본의 지원하에 조성된 장춘과 남경 정권을 승인하지 않는다. 다섯째, 루스벨트·처칠 선언의 각 항이 한국의 독립을 실현하는 데에 적용되기를 견결히 주장하며, 특히 민주 진영의 최후 승리를 먼저 축하한다. 대한민국 23년 12월 10일 대한민국 임시정부 주석 김구, 외무부장 조소앙”

대일 선전성명은 임시정부가 연합국의 일원으로 일본·독일·이탈리아 등 축심국에 대한 전쟁을 수행하겠다는 뜻을 국제사회에 공식적으로 천명한 것이다. 임시정부는 이미 1940년 9월에 광복군을 창설해, 대일전쟁을 실질적으로 수행할 수 있는 정규군을 지니고 있었다. 


광복군은 비록 그 수가 많지는 않았으나, 대일선전포고 이후 연합군과 실제 공동작전을 전개했다. 1943년 영국군과 인도-버마전선에서 대일작전을 수행했고, 1945년에는 미국 전략정보국(OSS)과 공동으로 국내 침투작전을 준비했던 것이다.


한국광복군의 사격훈련.


임시정부의 대일 선전포고는 바로 임시정부가 연합국의 일원으로 참전해, 전후 처리에서 연합국의 지위를 인정받기 위한 조치이기도 했다. 임시정부가 수립된 이후 지속적으로 추구한 것이 바로 대일항쟁이었으므로, 대일 선전포고는 태평양전쟁이 일어난 것을 계기로 다시금 그 뜻을 확고히 한 의미를 지닌다.

임시정부는 1945년 2월 28일에 대독 선전포고도 했다. 결국 대일 선전포고와 대독 선전포고를 통해 한국 민족이 20여 년간 독립전쟁을 전개하여 왔음을 널리 알리고, 민주진영 연합국의 일원으로 반침략 전쟁에 참가하여 인류 평화에 이바지하겠다는 국제적 의사를 표시한 것이다.  사진=필자 제공

<김용달 한국독립운동사연구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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