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완결 한주를열며

[김재 한주를열며] 박항서 리더십

입력 2018. 12. 21   15:18
업데이트 2018. 12. 23   13: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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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재홍 서울디지털대학교 총장 공익사단법인 정 이사장
김재홍 서울디지털대학교 총장 공익사단법인 정 이사장

동남아시아 국가들의 축구제전인 스즈키컵 대회에서 10년 만에 우승한 베트남은 열광의 도가니 속에 파묻힐 만했다. 온 국민이 하나 되는 용광로였다. 베트남으로서는 말레이시아나 태국 같은 경쟁 상대들이 있기 때문에 중요한 무대에서 우뚝 선 것이다.

그 열광 속에 베트남의 축구팬들이 태극기와 베트남 국기를 함께 흔드는 것보다도 더 놀라운 일이 벌어졌다. 박항서 감독과 국부 호찌민 주석의 초상을 나란히 함께 들고 환호하는 광경이다. 나는 깜짝 놀랐다. 지난 10월 초 베트남 국립 하노이개방대 25주년 행사에 초청받아 참석했던 기억이 떠올랐기 때문이다.

대학의 행사 영상마다 왼쪽 맨 위에 호찌민 주석의 초상이 올려져 있었다. 집집마다 그의 초상이 걸려 있다는 얘기에 진정으로 존경하는 국부임을 느꼈다.

베트남의 국민 영웅이 된 박항서 감독의 ‘파파 리더십’은 이제 리더십 연구의 한 장을 이루기에 부족함이 없는 것 같다. 그의 리더십은 베트남 사람들이 마음속 깊이 새기고 있는 ‘호 아저씨(호찌민)’ 이미지를 빼닮았다. 낮은 데로 임하는 인간애의 실천에서 공통적이었다.

호찌민은 비록 공산혁명가였지만 스스로 민족주의자임을 확인했다. 그의 평전을 보면 “나의 힘은 공산주의가 아니라 애국심에서 나왔다”고 술회하고 있다.

그의 정치철학이며 리더십의 바탕을 이룬 좌우명은 “꿍아(함께 산다), 꿍안(함께 먹는다), 꿍담(함께 일한다)”이었다. 바로 동고동락이었다. 그가 타계한 후 집무실에서 나온 유품은 고물 라디오 한 대와 책 몇 권이 전부로 서민의 모습에서 벗어나지 않았다.

그는 1969년 9월 운명하기 전, “장례식으로 인민의 돈과 시간을 낭비하지 말라”는 유언을 남겼다. 자신의 시신을 화장해 베트남의 북부, 중부, 남부 지역에 뿌려 달라고 했다.

그러나 베트남 정부는 그의 유언을 따르지 않았다. 호찌민이 1946년 9월 독립선언문을 발표했던 하노이의 바딘 광장 앞에 대규모 영묘를 짓고 시신을 방부 처리해 참배객들이 볼 수 있도록 했다. 진심으로 존경받았기 때문에 유언이 지켜지지 못한 아이러니였다.

그는 또 오랜 전쟁이 끝나고 통일이 이뤄지면 남베트남 인민들을 탄압하지 말라는 유언도 남겼으나 이 역시 지켜지지 않았다. 종전 후 사이공을 중심으로 남베트남에서는 대대적인 부역자 색출과 숙청이 이뤄졌다. 지도자의 유언은 인자하고 포용적이었지만 현실 정치는 냉혹했다.

박항서 감독은 선수들의 장단점을 제대로 파악하고 적재적소에 배치했다. 그는 “나도 키가 작기 때문에 자네들의 고민을 누구보다 잘 안다”고 말했다.

먼저 기를 불어 넣어주고 기량 훈련을 했다. 선수들의 발을 주물러 주고 비행기에서는 부상 선수를 자신의 비즈니스석에 앉게 했다. 감독과 선수의 관계를 감안하면 보기 드문 탈권위와 친화력이었다.

팀은 ‘파파와 아들’로 뭉쳐졌다. 그래서 파파의 선수 기용과 전략이 추호도 의심할 바 없는 신뢰 속에 시너지 효과를 낸 것이다. 정치권의 포용국가 리더십이나 군 간부들의 리더십 자기계발, 그리고 기업의 노사관계가 모두 이 같은 파파 리더십을 벤치마킹하기를 적극 제안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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