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5> 국립묘지에 영면하다

1972년 급성 심근경색으로 쓰러져 운명
각 가정 조기… 수십만 명 마지막 배웅
각계각층의 1000여 만장 행렬 뒤따라
서울현충원에 김마리아 여사와 합장

정계에서 은퇴해 야인으로 돌아간 철기는 승마와 사냥을 즐기며 말년을 보냈다. 1972년 5월 10일, 철기는 대만 총통 장제스의 취임식 초청을 받고 출국을 준비하던 중 급성 심근경색증으로 쓰러졌다. 급히 명동 성모병원으로 옮겨졌지만 다음 날 오전 5시40분에 운명하고 말았다. 향년 72세였다.

삶 자체가 국군 건설의 역사

철기는 16세인 학생 나이에 망명해 한국인 최초의 중국 현대식 정규사관학교에서 현대식 군인으로 항일의 첫발을 내디뎠다. 이후 만주, 연해주, 시베리아, 중국의 각지에서 오직 조국 독립의 염원 하나만 가지고 풍찬노숙을 벗 삼아, 항일무장 투쟁의 대오에서 한 치의 이탈이 없었다.

광복 후에는 ‘구존유금 지재보국(苟存猶今 志在報國·구차하지만 지금 삶을 살고 있는 것은 언젠가 나라가 부를 때 이에 보답하기 위함이다)’의 일념으로 대한민국 국방의 설계와 근본을 만들었다. ‘대한민국 국군의 거목’이었던 철기의 삶은 그 자체가 국군 건설의 역사였다.

정부는 각의를 열어 장례를 국민장으로 치르기로 결정했다. 유해는 5월 17일 오전 8시30분에 자택인 영등포구 신대방동 산동네에서 출발해 남산 야외음악당 광장에서 영결식을 가졌다. 10시에는 육군군악대의 주악 아래 성신여고생들의 조가 합창이 울려 퍼졌다. 이어 청산리전투를 회상하는 철기의 생존 육성녹음이 장내를 울렸다. 장내에는 2만여 명의 시민이 운집했다.

철기의 유해는 대형 초상화와 1000여 개의 만장과 훈장 등 생전의 고난과 영예를 상징하는 각종 장식물들로 덮인 영구차에 실려 이동했다. 그 뒤로는 마지막 애마 설희가 주인의 죽음을 슬퍼하는 듯 머리를 숙이고 뒤따랐다. 철기의 모교인 경기고등학교 재학생 800여 명은 태극기가 덮인 영구와 만장의 운반을 도맡아 장군의 삶을 기렸다.

이날 관공서와 각 가정에서는 조기를 내걸었다. 남산에서 동작동 국립묘지에 이르는 길거리에는 수십만의 인파가 몰려 청산리전투의 청년 영웅이자 30여 년 독립무장투쟁의 산증인, 그리고 대한민국 국군건설의 아버지인 철기의 마지막 가는 길을 배웅했다.

유해는 동작동 국립묘지(현 국립서울현충원)에 2년 전 작고한 영원한 혁명동지이자 부인인 김마리아 여사와 나란히 합장됐다.



철기와 우둥불

철기는 운명하기 5개월여 전인 1971년 겨울에 회고록 ‘우둥불’을 탈고했다. 그 스스로 자신의 마지막이 다가옴을 예감했던 것일까? 그는 회고록 명칭을 ‘우둥불’로 붙인 이유를 이렇게 설명했다.

“우둥불은 함경북도 방언으로 노영화를 지칭한다. 우둥불은 한데서 잠을 자는 군인들이 몸을 덥히기 위해 피우는 불이다. 나는 독립투쟁 30여 년간을 대개 이 우둥불 곁에서 지냈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전선에서, 광야에서, 몽골에서 사냥할 때나, 혼자서나, 또 몇 사람이 둘러앉아 잡담을 할 때나, 수많은 군대를 데리고서나, 그 어디서나 우둥불은 나의 없지 못할 반려였다.”

철기의 우둥불 회고는 다음과 같이 이어진다.

우둥불, 그 불길을 바라보며 때로는 어린 시절을 회상했고, 그리운 조국을 생각했다. 우둥불 앞에서 불꽃 사이로 어른거리는 회상-쓰러져 간 전우들을 생각했다. 우리의 자유를 꿈처럼 그려 보기도 했다. 조국의 앞날을 환상으로 엮어도 보았다. 이글대는 불길 속에 내일의 승리를 다짐했다. 상념은 하염없이, 막연한 후세대의 생각도 해보았다. (중략)

그로부터 수십 년이 지난 지금 서울의 밤하늘에서 휘황찬란하게 수놓는 네온사인의 채광을 보다가도, 가끔 옛날의 우둥불 생각에 빠지곤 한다. 이처럼 내 마음속 깊은 곳에 아직 꺼지지 않고 있는 우둥불이기에 이 책에 우둥불이라고 이름 붙였다. (이하 후략)

철기에게 우둥불은 고달픈 현실을 이겨내는 힘이자 전우애의 상징이었다. 그리고 손에 잡히지 않는 막연한 미래에 대한 소망이었다. 철기는 죽어서 조국과 국군의 영원한 우둥불이 되었다.



철기와 조국

조국…. 너무나 흔하게 쓰이는 말이고 또 생각 없이 불리며 일컬어지는 단어다.

그러나 조국이라는 이 두 글자처럼 온 인류 각 민족에게 제각기 강력한 작용과 위대한 영향을 끼치고 있는 것은 다시 없으리라 본다. 아니 그렇게 믿는다. 믿는 것이 옳은 내 견해고, 내 체험의 소산인 것이다.

도대체 조국이 무엇이기에 나는 예나 지금이나 그처럼 연연해하는 것인가. 한평생 나는 ‘그 때문에’ 살아왔다고 자부하여도 부끄러움을 느끼지 않는다. 혼자 사랑하고, 미워하다가도 사랑하고, 떠나서도 사랑하고, 돌아와서도 사랑하고, 안겨서도 사랑하며 이제 고희가 넘은 나이에 ‘조국’ 이 한마디를 조용한 안마당에서 입속말로 나직이 다시 불러보는 것이다. 불러본 소리에 잇따라 떠오르는 갖가지 생각이 걸음을 멈추게 한다.

인류가 국가생활을 영위하게 된 이래 거의 나라마다의 민족사는 조국의 수호, 명예와 번영을 위한 노력과 투쟁, 그 조화와 충돌로써 엮어진 기록사라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중략)

나는 이것을 만주와 중국, 그리고 러시아 및 동구라파에서 갖가지 형식으로 보아왔고 감격, 감동해 왔다.

범위를 좁혀서 우리 민족이 반세기 전, 일제 침략을 받아 망국한 이래, 연이어 일어난 민영환 씨의 자결, 안중근 씨의 이토 히로부미 저격, 이재명 씨의 이완용 척살(刺殺) 실패 사건, 박성환 대대장의 자결에 뒤따른 그 휘하 전 대대(大隊)의 의거, 의병의 전국적 봉기, 강우규 씨의 사이토 총독 저격…… 등 허다한 의인열사의 늠연한 살신성인에서 그 갸륵한 몸 바침과 추호의 망설임도 없는 의연한 정신을 볼 수 있다.

기미년 이후 해외에서 광범하게 전개된 독립투쟁―특히 만주와 시베리아에서의 무장 항일투쟁과 같은 것은 피와 눈물의 교직이며 고난과 사멸의 점철이 아닌가? 그 모두가 한결같이 진심으로 조국을 사랑한 최고 애정의 극한적 표현이었다. (중략)

그 시절에 나는 조국을 배웠고 조국을 다시 알았으며 조국에 대한 사랑의 깊이를 깨달았다.

이른바 흑하(黑河)사변 때엔 우군으로 믿고 합작하던 적소군(赤蘇軍)에게 기습을 당해서 수천의 아들들이 얼어붙은 바이칼 호수에서 하얀 꽃잎처럼 도살되었다. 그 원한의 선혈이 빙설을 물들여 때 아닌 피 꽃이 얼룩졌을 때 나는 핏자국 줄기에서 조국의 길을 암시받았다. 내 동포의 피 향기를 시베리아의 바람이 휩쓸어 갈 때 난 조국을 증오했고 증오를 투지로 바꿀 수 있었다. (이하 후략)

이 글은 ‘우둥불’의 첫 장에 나오는 조국에 대한 그의 우국충정을 토로하는 유명한 글이다. 이 글은 시대를 넘어 이 땅의 수많은 청년들에게 항일애국지사들의 고난상과 애국심을 생생히 전달해 주는 명문장이다.

철기의 시대에 조국은 애국의 대상이었다. 시대가 변해 이제는 국제화의 시대다. 그러나 모국을 의미하는 조국에 대한 사랑의 뜻은 예나 지금이나 변함이 없다. 사진=필자 제공

<박남수 철기 이범석기념사업회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