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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8년 9월26일, 백곰 대한민국 최초 미사일 시험 발사

신인호 기사입력 2018. 11. 29   14:49 최종수정 2019. 09. 25   09:16

대한민국 최초 유도탄....자주국방의 상징으로 자리

Surface to Surface Missile System


"시험 준비 끝. 초읽기 시작. 발사 120초 전! … 10초, 9초, 8초 … 1초, 발사!" 


발사! 외침은 단호했다. 그와 함께 유도탄 백곰은 불기둥을 뿜으며 하늘을 향해 수직으로 솟아올랐다. 백곰은 1단 추진기관의 성공적 분리에 이어 2단 추진기관이 점화되면서 더욱 속도를 내더니 시야에서 사라졌다. 얼마 후 백곰이 표적 해면에 낙하하면서 일으킨 물기둥이 탄착지의 중계 카메라에 찍혀 모니터에 나타났다. 대한민국 최초의 지대지 유도탄인 ‘백곰’의 공개시험이 성공한 것이다. 


최초 지대지 유도무기인 백곰의 역사적인 공개 시험발사 장면. 사진 = 국방과학연구소.


1978년 9월26일 14시 13분 34초. 

우리나라가 ‘유도탄 시대’를 연 역사적인 그 날, 그 순간이다. 유도탄 개발을 지시한 박정희 대통령은 이날 다음과 같이 일기를 썼다. 


"금일 오후 충남 서산군 안흥에서는 우리나라에서 처음으로 유도탄 시험발사가 있었다. 1974년 5월에 유도무기개발에 관한 방침이 수립된 지 불과 4년 동안에 로켓, 유도탄 등 무기 개발을 성공적으로 완성하여 금일 역사적인 시험발사가 있었다. ① 대전차 로켓 ② 다연장 로켓 ③ 중거리 로켓 ④ 장거리 유도탄 네 종목이 다 성공적이었다. 그동안 우리 과학자들과 기술진의 노고를 높이 치하한다" (오원철 전 청와대 경제수석의 회고록 중에서) 


본래 유도탄과 같은 정밀 무기체계는 1980년 초까지 기술기반을 확보하라는 것이 1971년 1월28일 박 대통령의 국방부 연두순시에서 내린 지시였다. 이에 따라 ADD의 장기연구개발계획에는 단거리 전술 유도탄 개발을 1970년대 후반부터 착수하는 것으로 돼 있었다. 


그런데 1차 번개사업을 성공적으로 끝낸 후인 1971년 12월 27일, 박 대통령은 오원철 수석을 통해 ‘1단계로 1975년 이전 국산화를 목표로 사거리 200km 내외의 유도탄을 개발하라’는 지시를 내렸다. 실로 엄청난 지시가 아닐 수 없었다. 


1972년 4월14일에는 국방부의 유도탄 개발에 대한 정식 공문이 ‘항공공업 육성계획 수립 지시’이라는 위장 사업명으로 ADD에 하달되었고, 이에 따라 5월1일자로 ADD와 한국과학기술원(KIST), 육·해·공군 사관학교의 교관 요원으로 구성된 개발계획단이 설치된다. 이어 1972년 9월15일 ‘항공공업계획’을 완성한 후 ‘항공공업시행계획서’를 작성했다. 1974년 5월 14일, 마침내 ‘항공공업계획’은 대통령 보고와 함께 개발을 위한 재가를 받아 율곡사업으로 추진하게 됐다. 


기본지침의 핵심 내용은 사거리 500km의 지대지 유도탄(미 육군의 퍼싱급)을 1978년까지 개발하라는 것이었다. 이에 따라 ADD는 항공사업담당 부소장 산하에 추진기관, 기체, 유도조종, 시험평가 등 6개 부서로 구성된 기구를 설치했지만 유도탄 개발사업을 본격 추진하기는 어려웠다. 이 분야의 연구개발이 워낙 백지 상태라 연구?시험 및 생산 시설을 갖추는 데 시간이 좀 더 필요했다. 


‘대전기계창’으로 위장한 유도탄연구소는 1974년 9월부터, ‘안흥측후소’로 위장한 비행시험장은 1975년 1월부터 건설되기 시작했다. 이런 바탕 위에 본격적으로 유도탄 개발에 착수한 것은 1976년부터였다. ADD는 개발사업을 3단계로 설정했다. 


제1단계는 기존 무기체계의 모방개발 단계로 지대지 유도탄의 체계설계 및 제작능력을 키우고, 제2단계에서는 모방개발한 무기체계에 대한 성능개량을 시도해서 이를 무기체계화하며, 제3단계에서는 퍼싱급에 준하는 한국형 지대지 유도탄을 독자개발한다는 것이었다. 


여기서 ADD가 제1단계 사업을 위해 주목한 것이 당시 한국군이 보유하고 있던 나이키 허큘리스(Nike Hercules) 유도탄이었다. 이 나이키허큘리스는 본래 항공기를 공격하는 지대공 유도탄이지만 지대지 유도탄으로도 활용이 가능했다. 


즉 타격하고자 하는 지역의 상공에 가짜 표적을 설정하고 이 가짜표적으로 유도탄을 유도한 뒤 유도탄의 방향을 수직방향으로 바꾸어 유도함으로써 지상 표적을 타격할 수 있는 기능을 갖고 있었다. 


ADD는 이를 모방하여 빠른 시간 내에 지대지 유도탄을 개발하고자 했던 것이다. 1978년 4월에 있었던 백곰의 1차와 2차 비행시험은 유도탄이 비행 도중에 길을 잃고 추락하면서 실패를 했다. 


원인을 분석한 결과 유도탄이 항로를 이탈할 경우 소프트웨어에서 비행항로 수정을 너무 촘촘하게 하도록 지정했기 때문이었다. 소프트웨어를 보완하고는 성공적으로 목표에 명중시킬 수 있었다. 


백곰이 미국의 나이키 허큘리스(NH) 유도탄의 일정 부분을 모방한 것임은 분명하다. 백곰의 영문 약칭도 외형이 나이키-허큘리스(Nike-Hercules)와 같기에 이를 뜻하는 NH에 한국형임을 의미하는 K를 붙여 NHK로 했다. 


그렇다고 백곰이 완전한 복사품은 아니다. 유도탄의 외형만 같을 뿐 유도용 소프트웨어, 유도조종장치, 기체, 추진기관 및 탄두 등은 모두 개량하거나 새로 개발한 것들로서 국내 개발장비 부분과 나이키 공통장비로 혼성된 체계인 것이다. 


백곰 시험발사 후 성능이 인정되면서 1979년 10월 1일 백곰을 운용할 1개 시험포대가 창설되고 1980년까지 백곰이 배치되었다. 다만 유도탄 정비용 지원점검장비는 이때 다 개발되지 못해 1982년까지 제작을 해 배치했으며 기술교범도 1983년 작성이 완료되었다. 


더불어 ADD는 백곰에 대해 성능개량에 들어간다. 이 백곰 개량형 유도탄은 한국형 지대지유도탄 개발사업의 제2단계 사업으로서 1979년부터 본격화되었다. 백곰의 부족한 점을 보완하고 개량해 독자적인 장거리 지대지 유도무기체계를 전력화한다는 목표를 정했다. 백곰 개량형은 영문으로 K-Ⅱ로, 본래의 백곰은 이때부터 NHK-I이라고 불렸다. 


개량형 K-Ⅱ가 본래의 백곰, 즉 NHK-I과 크게 다른 점은 네 가지이다. 지상유도장비 없이 자체유도가 가능한 관성유도방식이라는 점, 1단 추진기관을 4개 묶음(Cluster)형에서 단일기관(Single Booster)형으로 변경한 점, 자탄 고폭 분산탄으로 개발한 점, 그리고 발사대를 이동식으로 개발하고 사격통제장비를 차량 탑재형으로 개발하여 기동성 및 생존성을 증대시킨 것 등이다. 사격통제장비의 경우 1981년말부터 1983년까지 차량에 탑재하여 이동가능하도록 설계했으며, 발사대는 1980년 7월부터 군요구에 따라 ‘이동식’으로 제작되었다. 


잘못된 5공의 유도탄 정책 


ADD는 1981년 2월부터 이 백곰 개량형 K-Ⅱ의 생산문제를 논의했으나 끝내 시행하지 못했다. 1982년 10월, 합참이 주관한 과제조정회의에서 재활용할 수 있는 수준에서 사업을 마무리하도록 결정되었다. 


이에 따라 기 반영되었던 1983년도 사업예산의 축소안이 제출되었다. 그리고 1982년 12월 연구소 감축 및 조직 개편을 계기로 연구소 내부방침에 따라 집행이 보류되고 예산은 반납조치 됨으로써 K-Ⅱ사업은 사실상 중단되었다. 

왜일까. 


1979년 10월26일 박대통령의 갑작스러운 서거로 나라가 혼란에 빠졌다. 유도탄을 개발하는 ADD는 예외는 아니었다. 오히려 직접적인 피해를 입게 된다. 5공화국 정부의 방위산업 정책은 근본부터 바뀌게 되기 때문이다. 전력증강을 위한 율곡사업 예산이 해외도입과 기술도입 생산 위주로 집행되었다. 


이에 따라 국내 연구개발사업은 축소될 수밖에 없었고 방산업체들은 엎친데 덮치는 격으로 1980년에 불어 닥친 유류파동으로 인한 중화학공업 구조조정의 대상이 되었다. 


특히 ADD와 백곰에 대한 극히 좋지 않은 인식이 퍼졌다. 백곰과 현무 유도탄 개발의 주역인 구상회 박사는 "전두환(全斗煥) 대통령은 보안사령관 재직시부터 ‘1978년 9월26일에 공개 시험한 백곰 유도탄은 국산이 아니라 미제 NH 유도탄을 페인트칠로 위장한 것이며, ADD는 만들지도 못할 유도탄을 개발한다면서 수천억원의 예산을 낭비했을 뿐 아니라 대통령까지 기만했다고 믿고 있었고, 대통령이 된 후에도 공식석상에서 수차례 그런 말을 했다"고 회고록에 남겼다. 


박정희 대통령의 갑작스러운 서거로 인해 우리나라는 미국으로부터 한국의 무기체계, 특히 전략형 지대지 유도탄 개발을 중단하라는 압력을 받았을 것이며, 5공화국 정부는 이에 굴복했음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 


먼저 ADD소장이며 유도탄개발을 총지휘한 심문택 박사가 1980년 8월 물러났다. 신임 소장은 주영복 국방부장관의 지시라며 이경서 부소장과 강인구 박사 등 유도탄 개발에 크게 기여한 30여 명의 간부를 해임했다. 


1982년 12월에는 더 충격이 큰 인사 파동이 일어났다. ADD 총인원 2,600여명 중 840여명이 감원되었다. 유도탄 연구팀도 해체되었다. 훗날 해직당한 연구원들은 이와 관련, 부당해고에 대해 소송을 제기했다. 승소했다. 이는 ADD에 대한 5공의 조치가 잘못이었음을 말해주는 것이다.

신인호 기자 < idmz@dema.mil.k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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