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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적극 방어’ 개념 중심으로 찬반 논쟁 불붙어

이영선 기사입력 2018. 11. 26   16:03 최종수정 2018. 11. 26   16:16

<10> 환영받지 못한 혁신가, 윌리엄 드푸이 장군 (하)-1976년판 미 육군 야전교범 100-5 [작전] 비하인드 스토리

‘작위적·사후적’ 거센 비판 속 새 교범에 관심 집중
장병들이 교리·전술 놓고 논하는 풍토 새롭게 조성
타국 연구자들까지 논문에 인용하는 현상 벌어져

제1보병사단장 시절의 드푸이.  필자 제공
◀ 미 육군 제병협동센터는 매년 ‘윌리엄 드푸이 장군 논문 경진대회’를 연다. 매해 새로운 주제를 제시하며 우승자 등에게는 상금과 부상이 주어진다. 올해 최우수상을 받은 논문의 제목은 ‘파트너십 강화를 통한 아프리카 지역의 복잡성 증대 대처’ 다.  필자 제공

1976년판 [작전]은 성안 과정에서부터 논란이 분분했다. 그리고 발간과 동시에 ‘적극 방어’ 개념을 중심으로 찬반 논쟁이 크게 일었다. 여러 가지 비판이 있었는데 이를 하나로 관통하는 설명은 ‘작위적이며 사후적’이라는 것이었다. 비판자들은 ‘적 부대를 아군이 싸우기 원하는 곳으로 유인해 화력과 기동을 집중한다’는 기본 개념이 현실에서 일어나기 힘든 작위적 설정이라고 했다.
또한 ‘칸나에 전투(Battle of Cannae)’나 ‘타넨베르크 전투(Battle of Tannenberg)’와 같은 희귀 사례를 사후적으로 분석해 (당대에는 존재하지 않았던) 일반 원인을 도출하는 오류를 범했다고도 했다.

논쟁이 사방으로 봇물 터지듯 하면서 흥미로운 현상도 관측됐다. 어떤 이들은 ‘적극 방어’가 ‘너무 방어적’이라고 했다. 야전교범에 강조한 ‘방자의 이점’이 미군을 수세적으로 만들 수 있다는 것이다. 동시에 어떤 이들은 ‘너무 공세적’이라고 했다. ‘신속한 기동’을 자꾸 강조하면 우발적 교전과 전쟁 선포 사이에서 정치가 작동할 공간이 없어진다는 것이다. 나중에는 ‘방어적’이라고 주장하는 이들과 ‘공세적’이라고 하는 이들 사이에 논쟁이 붙었다.

그런데 드푸이가 원했던 육군의 모습이 바로 이것이었다. 그는 ‘교범 발간’ 자체를 업적으로 삼고자 했던 것이 아니다. 장병이 교리와 전술을 논하고 이를 바탕으로 훈련하는 풍토를 만들고자 했다. 드푸이가 1974년 7월, 교범 작성 관계자들에게 [작전]의 초안(제목은 ‘Combat Operations’였다)을 보내면서 동봉한 서신에 그 생각이 잘 드러난다.



“프랑스의 가정에서는 항상 난로에 한 냄비의 ‘수프’를 끓입니다. 종종 누군가 나타나서 거기에 토마토, 채소, 닭 육수, 고깃덩어리 혹은 당근이나 뭐 그런 것을 넣지요. 시간이 지나면서 수프는 점차 더 근사해집니다. 이 초안을 받는 여러분은 모두 내가 쓴 것에 가필을 할 수 있습니다. 나는 그것이 저 ‘수프’ 일화와 같은 역할을 할 거라고 봅니다. (중략) 여러분이 이 초안을 가지고 토론하고 검토안, 건의, 수정, 보완 사항을 내게 보내주길 바랍니다. 우리가 한 데 모여 토론하는 가운데 육군은 발전할 것입니다.” (하략)



그가 원했던 것은 ‘적극 방어’에 대한 찬성이나 찬사가 아니었다. 비난이 쇄도하더라도 군대의 ‘싸우는 방법’이 화제의 중심이 되길 바랐다. 바람대로 1976년판 [작전]이 세상에 공개됐을 때 군의 모든 관심은 새 교범에 쏠렸다. 그뿐만 아니라 국제정치·안보정책·군사전략·위기관리·인지심리 등 다양한 학문 분과 연구자들이 1976년판 [작전]을 읽고 분석하기 시작했다. 여러 국가의 연구자들이 미 육군 교범을 논문에 인용했다. 이런 현상은 드푸이도 전혀 예측하지 못했을 것이다.

드푸이는 [작전]이 제반 군사 활동의 기준이 되길 바랐고 그래서 장병 누구나 이해할 수 있는 수준으로 썼다. 그렇다고 내용이 가벼운 것은 아니었다. 국제정치에서 소부대 전술까지의 수준별 스펙트럼을 모두 담았다. 여기에 더해 육군 구성원의 신념·용기·도덕성 등과 같은 정신 영역도 다뤘다.

그렇다 보니 1976년판 [작전]은 대학의 국제정치학 교수가 다루기에 모자람이 없고, 야전의 병사가 이해하기에도 어려움이 없는 내용 풍부한 ‘수프’가 됐다. 군대의 교범이 정치적 리더십과 전술적 개체가 이해를 공유할 수 있는 수단, 지휘관이 구상한 비전을 병사가 가시적으로 이해할 수 있는 도구로 자리 잡은 것이다.

한편 고유의 군사교리, 교범 체계를 잘 갖추지 못한 타국 군대에, [작전]은 권위 있는 ‘백과사전’ 같은 역할을 했다. 영어권뿐만 아니라 아시아권 동맹국 군대도 미 육군 교범을 구해 번역, 연구했다. 이는 나중에 동맹군, 나토군 간 작전 상호운용성을 향상시킨 주요 요인이 된다.

그런데 1977년 드푸이가 교육사령관 직에서 퇴임하자 흥미로운 일이 벌어졌다. 학교 기관, 야전 부대에서 일종의 ‘드푸이 불매운동’ 비슷한 움직임이 일어난 것이다. 1976년판 [작전]에 제시된 작전 형태나 훈련 방식은 이전의 버전으로 대체되거나 아예 실행되지 않았다. 왜 그랬을까?

1976년판 [작전]의 연구자들은 ‘육군 내에 드푸이의 적이 많았기 때문’이라고 지적한다. 드푸이는 부하의 능력이 부족하면 지위고하를 막론하고 즉각 징계했다. 베트남전에 참전한 미 제1사단장 시절 그가 휘하 대대장 7명을 보직 해임한 일화는 유명하다. 또 1974년부터 만 3년간 병과학교장인 장군들을 소집해 직접 교범을 쓰게 하고 냉철한 평가를 내렸으며 맘에 차지 않으면 ‘숙제’를 내주었다. 장군들의 심경이 어땠을지 미뤄 짐작할 수 있다.

그 외에도 이런저런 일로 육군 내에는 드푸이에게 이를 바득바득 가는 장교들이 많았다. 그들은 드푸이가 현직에 있을 때는 숨죽였다가 그가 군문을 떠나자마자 드푸이의 유산을 갈아엎었다. 드푸이의 건설적 계승자 스태리 장군이 뒤를 이어 교육사령관으로 취임하지 않았다면 야전교범 100-5 [작전]의 개념과 전술은 모두 공중분해됐을지 모른다. 저 유명한 ‘공지전투’를 포함해서 말이다.


<남보람 박사>

이영선 기자 < lgiant61@dema.mil.k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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