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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C급 전투함 (+)

윤병노 기사입력 2018. 06. 28   08:40 최종수정 2018. 11. 22   08:26

<11> 박찬극 제독 “레이더조차 없어… 별 보며 태평양 횡단”


“지금은 바다 위에서도 위성위치확인시스템(GPS)으로 함정의 위치를 알 수 있지만 창설 초기의 우리 군함에는 레이더조차 없었습니다. 하늘의 별이 태평양을 건너는 나침반 역할을 했습니다.” 


68년 전 PC급 전투함 항해사로 태평양을 횡단한 추억이 떠오르는 듯 93세 노병의 얼굴에 미소가 번졌다. 별을 보며 대양을 건넜던 젊은 항해사는 박찬극(1976년 준장 예편) 제독이다. 


이번 군함 이야기는 6·25 참전용사이자 PC급 전투함 인수요원 및 승조원으로 활약한 박 제독의 인터뷰다. 그는 홀로 38선을 넘어와 1947년 9월 해군사관학교 3기생으로 입학했으며, 1950년 2월 소위로 임관했다. 그리고 금강산함(PC-702) 항해사로 군 생활을 시작했다.

1950년 3월 금강산함 인수요원으로 투입

우리 해군은 백두산함(PC-701)을 도입한 후 미국 정부와 전투함 추가 구매를 논의했지만 소득이 없었다. 이에 해군은 미 해군이 민간에 매각한 PC급 함정을 물색했고, 1949년 10월 17일 미국 서부 해안의 산 피에트로항에 정박해 있던 3척을 구매했다. 금강산함도 그중 한 척이다.

우리 해군은 함정 구매 후 인수요원을 구성해 미국으로 보냈다. 1950년 3월 23일 최초 선발대 3명이, 5월 17일에는 본대요원 75명이 미국에 도착했다. PC급 함정 정원이 70여 명인 점을 고려하면 턱없이 부족한 인원이었다. 더군다나 금강산함 인수요원은 15명에 불과했다.

“금강산함 인수요원은 장교 11명에 하사관(현재 부사관)이 4명이었습니다. 항해 분야 장교가 4명, 조타 하사관이 3명이었고, 기관 분야는 장교만 7명이었습니다. 남은 한 명은 위생 하사관이었는데 조리도 담당했으니 무척 힘들었을 겁니다.”

구매한 함정의 상태는 심각했다. 미 해군이 함정을 민간에 매도하면서 주요 장비를 철거하고, 관리도 안 됐기 때문이다. 인수요원들은 먹고 자는 시간만 빼고 정비에 매달렸다. 필요한 부속품은 중고품 가게에서 구입하고, 크기가 맞지 않으면 선반 공장에서 깎아 끼웠다. 고된 작업에도 인수요원들은 누구 하나 힘든 내색을 하지 않았다.

“인수요원들은 신속한 정비를 위해 함정에서 먹고 자며 모든 것을 해결했습니다. 그래도 고생이라는 생각은 안 들었습니다. 해군이 전투함을 갖게 돼 기뻤기 때문입니다.”

현대 미국 해군의 아버지라 불리는 알레이 버크(맨 왼쪽) 제독과 함께한 박찬극(왼쪽 셋째) 제독.


생도 시절 배운 천측 항해로 태평양 건너

정비를 마친 금강산함은 1950년 6월 12일 롱비치항을 떠나 다음날 샌프란시스코 발레이호항에서 3인치 포를 장착했다. 이어 1950년 6월 24일 하와이 호놀룰루항에 도착했다. 태평양의 절반을 건넌 것이다. 금강산함은 만재 배수량이 450톤으로 현재 우리 해군이 운용하는 유도탄고속함(PKG)보다 작다. 승조원은 15명뿐이었고, 함정의 위치를 측정할 수 있는 레이더도 없었다.

“당시에는 함정에 레이더가 없어 함정의 위치를 파악하려면 별을 봐야 했습니다. 해군사관생도 시절 배운 천측 항해가 단단히 한몫했습니다. 생도 때는 시험만 보면 100점이었는데, 실습에서는 다 틀렸습니다. 거듭된 연습이 필요했던 거죠. 다행히 교관이었던 이성호(중장 예편·5대 해군참모총장) 중령이 금강산함 부장으로 동행했고, 저 나름대로 자신도 있었습니다.”

하와이에 도착한 다음날 6·25전쟁이 발발했다. 호놀룰루항에 있던 금강산함은 진주만으로 이동해 20㎜ 기관포를 장착한 뒤 1950년 6월 26일 오전 조국을 향해 출항했다.

“저는 21살이던 1947년 초 38선을 넘었습니다. 대한민국이 전쟁의 소용돌이에 빠졌다는 소식을 듣고 큰 충격을 받았습니다. 홀몸이라 가족 걱정은 없었지만 하루빨리 돌아가 힘을 보태고 싶었습니다.”

박 제독의 거실 장식장에 놓인 훈장과 사진들.


진해 군항 입항 후 서·남해 봉쇄 작전나서

금강산함은 콰잘린과 괌을 거쳐 1950년 7월 16일 진해 군항에 입항했다. 이어 승조원들을 태우고 출전했다. 금강산함은 주로 서·남해 봉쇄 작전에 투입됐다.

“7월 중순 즈음 우리 배는 삼각산함과 인천 항내를 정탐하러 들어갔습니다. 우리가 월미도에 설치된 북한군 포를 파괴하자 사방에서 포탄이 날아왔습니다. 다행히 살려고 그랬는지 함정에는 포탄이 떨어지지 않았습니다. 천운이라고 생각합니다.”

금강산함과 삼각산함은 1950년 7월 22일 인천항 입구로 돌진해 적이 월미도에 설치한 122㎜ 곡사포 10문을 파괴했다. 그러자 북한군이 집중포화로 응사했고, 두 함정은 지그재그 기동으로 빠져나왔다. 금강산함은 적의 포화에 물 배관이 손상돼 거의 유실 상태에 이르렀다.

“가장 힘들었던 점은 조수기(Fresh Water Generator: 바닷물을 청수로 만드는 장치)가 고장 나 물을 사용할 수 없었던 것입니다. 때로는 영국 순양함에서 물을 받아 썼는데 겨우 밥만 할 정도였습니다. 씻는 건 엄두도 못 냈죠. 그래도 수집한 정보는 영국 구축함에 잘 전달됐습니다.”

열악한 환경 속 필승해군 전통 이어나가

금강산함은 인천상륙작전 당시 소주정(小舟艇·작은 함정)의 출발선(Line of Departure) 임무를 수행했다. PC급 전투함은 레이더와 통신수단이 미비해 함포 지원을 수행하기에는 역부족이어서 외곽 경비 임무를 맡았다. 그 와중에도 금강산함은 조류가 강한 인천 항내에서 적색 해안으로 돌격하는 소주정의 출발선 역할을 한 것이다.

“우리 배는 9월 15일 월미도 북쪽 해상에서 투묘 중이었습니다. 적색 해안에 상륙하는 소주정의 출발선이었죠. 소주정은 금강산함 주위를 맴돌면서 시간이 되면 돌격했습니다. 한번은 미 해군 LST(상륙함)가 조류에 떠밀려 우리 배와 충돌한 적도 있습니다. 깜짝 놀랐지만 파손된 부분을 캔버스로 막고 작전을 완수한 기억이 생생합니다.”

박 제독은 팔미도 근해에서 있었던 금강산함과 적 전투기의 아찔한 만남을 설명하는 것으로 인터뷰를 마무리했다. 그러면서 해군 장병들에게 당부의 말도 잊지 않았다.

“함교에서 당직을 서는데 야크(YAK)기 2대가 우리 배를 지나 미국 순양함에 폭탄과 기총 세례를 퍼부었습니다. 다행히 순양함은 큰 피해가 없었고, 야크기 한 대는 격추됐습니다. 만약 그 순양함이 없었다면 우리가 목표물이 됐을 겁니다. 우리 해군은 열악한 환경에서도 필승해군 전통을 이어가는 이순신 제독의 후예입니다. 후배 장병들도 이 같은 전통을 계승하고, 조국의 바다를 수호하는 데 최선을 다해 주기를 바랍니다.”

글 = 윤병노 기자


■ 기사 원문 

    국방일보 ‘대한민국 군함이야기’, 윤병노 기자, 2018년 6월 28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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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병노 기자 < trylover@dema.mil.k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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