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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산지석, 남아프리카공화국의 ‘핵무기 해체’(1993년 3월 24일 공표)

기사입력 2018. 05. 02   17:41

남북정상회담 전문가 릴레이 기고③ 김성걸 한국국방연구원 안보전략연구센터 연구위원



남아공, 자체 개발 핵무기 스스로 해체한 세계 첫 번째 국가

2년 반 동안 IAEA의 100차례 넘는 핵 관련 시설 사찰 수용

안보위협 해소· 아파르트헤이트 중단 등으로 ‘국제 고립’ 탈피



남아프리카공화국은 자체 개발한 핵무기를 스스로 해체한 세계 첫 번째 국가다. 최근 남북한 정상의 한반도 비핵화 선언으로 다음 단계인 비핵화 이행 방식에 관심이 쏠리고 있다. 이에 따라 남아공이 실행한 비핵화 방식이 앞으로 참고할 사항으로서 조명을 받고 있다. 프레데리크 빌렘 데클레르크 남아공 대통령은 1993년 3월 24일 의회 연설을 통해 남아공의 핵무기가 완전히 철거됐다고 국민과 세계에 자신 있게 알렸다.



비핵화 이행 방식 대두로 관심 고조


남아공은 자체 개발, 생산해 보관하고 있던 핵무기 6발을 모두 폐기했다. 그리고 제작 중이던 핵무기 1발도 스스로 취소해 핵무기 폐기에 대한 의지를 더 분명히 나타냈다.

남아공의 핵무기 포기는 1989년 후반부터 시작됐다. 데클레르크 정권은 핵확산금지조약(NPT) 가입을 표명하면서 핵무기 폐기를 추진했다. 이후 1990년대 초반에 남아공의 자체 의지가 강했기 때문에 안정적이고 집중적인 해체 작업이 진행됐다.

국제원자력기구(IAEA)는 1991년 11월부터 2년 반 동안 남아공의 모든 핵 관련 시설에 대해 100차례 넘게 사찰을 실시했다. 즉, 남아공의 핵 포기는 모든 핵무기 관련 시설 해체 → NPT 가입(1991년 7월 10일) → IAEA 안전조치 협정 체결(1991년 9월 16일) → IAEA 핵사찰 → 핵 포기 완료 발표 등의 순으로 이뤄졌다. 세계는 남아공에서 핵무기 프로그램이 완전히 제거된 것으로 인정했다.

남아공은 1967년 핵무기 개발 프로그램에 본격 착수한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남아공은 처음 중수로에서 나오는 플루토늄을 이용한 핵무기를 개발했다.

그러나 2년 뒤 남아공이 세계 5위의 천연 우라늄 매장량을 가지고 있는 점을 중시해 농축우라늄 핵폭탄을 개발하기로 정책을 변경했다.

남아공은 비밀리에 이스라엘의 도움을 받아 1970년 우라늄 농축에 성공했다. 1979년 9월 22일 남아공의 무인도 프린스에드워드 제도 근처 해상에서 섬광이 두 번 번쩍이는 것을 미국 인공위성 벨라가 포착했다. 남아공 또는 이스라엘, 아니면 양자 합동 핵실험으로 짐작됐다.


공격용 아닌 억제용 사용 ‘다단계 전략’


남아공은 핵무기를 공격용이 아니라 억제용으로 사용한다는 다단계 전략을 갖고 있었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1단계인 적대행위가 없는 상황에서는 핵무기의 능력을 비밀로 하거나 모호한 자세를 유지하는 것이다.

침략 위협이 높아지면 2단계로 이전된다. 남아공은 미국 등 주요 강대국에 핵 억제 능력을 강력하게 시사하고 강대국의 개입을 유도하지만, 사정이 여의치 않은 것으로 판명되면 핵 능력을 공개적으로 공표한다는 것이다.

3단계는 필요 시 지하 또는 공개된 해상 시험 장소에서 핵무기를 폭발시켜 핵 능력을 입증하는 것을 포함하고 있다. 남아공이 최후의 수단으로 핵무기를 전장에서 사용할 수 있다고 협박하는 것이다.

남아공이 핵 폐기로 전환한 동기는 두 가지로 압축된다.

먼저 남아공에 대한 안보 위협의 소멸이다. 남아공은 1970년대에 인접 국가인 앙골라, 모잠비크 내전에 개입하면서 적대관계가 형성됐지만, 1980년대 말에 세계 냉전이 약화되면서 계기를 맞게 된다.

앙골라 내전에서는 소련·미국·남아공이 각각 지원하는 내전 세력이 양보 없는 전투를 벌였다. 여기에 소련을 지원하는 쿠바군이 직접 앙골라에 파병돼 남아공을 위협했다. 그러나 1988년 8월 남아공·쿠바·앙골라 사이에 정전이 성립돼 앙골라에 주둔하던 쿠바군 5000명이 철군하게 된다.

모잠비크에서도 1975년 독립과 동시에 소련의 지원을 업은 공산정권과 남아공이 지원하는 반군 간의 내전이 시작됐다. 그러나 소련의 개혁개방정책으로 지원이 중단되자 정전 분위기가 조성됐다. 안보 위협이 감소했고, 그에 따라 핵무기의 필요성은 사라졌다.


만델라도 석방… 정국 안정 찾으며 ‘선순환’


또 남아공의 악명 높은 인종차별 정책인 아파르트헤이트를 중단하면서 핵무기도 포기하게 됐다. 남아공은 주변국에서 냉전의 대리전이 이어지는데도 아파르트헤이트 때문에 미국 등 서방국가의 군사적 지원은커녕 군사물자 구매도 어려운 실정이었다. 이 때문에 남아공은 핵 보유의 길을 선택했다.

그러나 1984년 흑인들의 아파르트헤이트 반대 폭동이 고조되고, 1986년 서방국가들이 경제 제재를 시작하자 남아공은 극도의 어려움에 빠졌다.

경제가 어려워지자 시위는 점점 심해졌고, 이를 무력으로 진압할수록 혼란은 커져만 갔다. 데클레르크 대통령은 아파르트헤이트를 폐지하기로 하고, 1990년 흑인저항운동의 상징인 넬슨 만델라를 석방한다.

결국 남아공의 핵무기 개발은 안보 위협, 아파르트헤이트, 백인 지지층 결속 등과 연결된 것이었다. 남아공은 핵무기를 폐기하면서 국제사회의 고립에서 탈피하게 된다. 국내적 안정도 찾게 됐다. 선순환의 길로 들어선 것이다.


히로시마 원폭의 2/5 크기 6개 보유
● 당시 남아공의 핵무기는?

남아공이 핵무기를 처음 제작한 시기는 1982년 4~12월로 추정된다. 남아공은 대략 18개월에 1개씩 핵무기를 생산해 1989년까지 6개의 핵무기를 조립해 보유하고 있었다. 핵무기 1발당 고농축 우라늄 55㎏이 실려 있었으며, 위력은 일본 히로시마에 투하된 원자폭탄의 5분의 2 크기인 TNT 6kt 정도였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남아공 방위사업청(Armscor)은 핵무기의 암호명을 호보(Hobo)로 정했다가 나중에 캐봇(Cabot)으로 바꾸었다. 캐봇은 무유도 자유낙하 폭탄이었으며, 캐봇 개량형으로 텔레비전 유도 활강 핵폭탄인 해머캅(Hamerkop)이 개발됐다. 구형 핵폭탄에 실렸던 핵탄두는 나중에 신형 핵폭탄이 개발되면 분해해 재사용됐다.

남아공은 핵폭탄을 운반할 수단으로 폭격기를 사용할 계획이었다.


운반수단으로 폭격기 대신 미사일 주목


당시 남아공은 영국에서 수입한 16대의 부캐니어 저고도 폭격기를 보유하고 있었다. 그러나 이 폭격기는 항속거리가 3700㎞로 비교적 짧은 편이었다. 그리고 소련의 지원을 받는국가와 쿠바군의 방공망을 뚫기에는 노후한 이 폭격기로는 한계가 있어서 다른 수단을 강구했다.

남아공은 미사일에 주목했다. 우주개발 계획으로 1980년대 말에 3차례 발사된 RSA-3, RSA-4 발사체를 미사일로 이용할 계획이었다. 이들 발사체의 탄두중량은 340㎏이어서, 핵폭탄은 약 200㎏으로 소형화가 이뤄져야 했다. 그러나 남아공은 당시 핵 소형화 기술을 갖지는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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