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획 완결 군복을 사랑한 패션

13세기 귀족 매혹시킨 찢어진 군복, 21세기 대중 매혹시킨 찢어진 바지

입력 2017. 08. 30   17:24
업데이트 2019. 04. 09   07: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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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 슬래시(slash) 패션


11세기 시작된 십자군 전쟁서

유럽 복식에 영향

 

입체적이고 관능적인 ‘슬래시’

베이고 찢긴 군복에서 착상

당시 남성복 상의·소매 장식

과시적이면서 편리하다는 특징

 



크림전쟁의 카디건처럼 전쟁에서 유래해 패션이 된 예로 ‘슬래시(slash)’ 패션을 빼놓을 수 없다. 슬래시는 ‘길게 긋다, 베다’란 뜻이다. 의복의 한 부분을 속이 보이게 찢거나 길게 터놓은 것을 말한다. 십자군 전쟁에서 칼에 베이고 찢긴 군복이 상류층을 매혹시키면서 패션이 됐다.


십자군 전쟁은 11세기부터 13세기까지 서유럽의 로마 가톨릭 국가들이 중동의 이슬람 국가에 대항해 성지인 예루살렘을 탈환하는 것을 목적으로 행한 대규모 군사 원정이었다. 이렇게 긴 세월 동안 치러진 십자군 전쟁은 서유럽 복식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

전쟁터에 나간 남편을 기다리던 아내들에 의해 서양 자수가 발달했고, 이슬람 교도의 영향을 받아 단추와 끈 등으로 여미는 방법이 고안됐다. 또 군사 원정 시 전리품을 간수하기 위한 주머니가 개발됐다. 병사들의 갑옷 상의 앞면에 신체 보호의 목적으로 넣었던 패드는 의복의 실루엣을 과장하는 데 사용됐고, 베이고 찢긴 군복에서 착상된 슬래시는 입체적이고 과시적인 관능미로 인해 남녀 의복의 장식적 요소에 많이 애용됐다. 특히 남성복 상의와 소매에 무수한 슬래시가 다양한 형태로 자리 잡았다.

영국의 헨리 8세(1491.6.28.~ 1547. 1.28.) 초상화. 상의는 패드를 넣어 어깨를 과장한 더블릿(doublet)을 입고 있다. 몸판과 소매에 슬래시가 들어가 있고, 그 사이로 속옷이 살짝 빠져 나와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더블릿은 ‘두 겹으로 겹친 것’을 말하며 솜 같은 것을 넣어 누빈 것이 특징이다.
영국의 헨리 8세(1491.6.28.~ 1547. 1.28.) 초상화. 상의는 패드를 넣어 어깨를 과장한 더블릿(doublet)을 입고 있다. 몸판과 소매에 슬래시가 들어가 있고, 그 사이로 속옷이 살짝 빠져 나와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더블릿은 ‘두 겹으로 겹친 것’을 말하며 솜 같은 것을 넣어 누빈 것이 특징이다.


과장된 퍼프 위로 ‘슬래시’ 넣어 어깨를 봉긋하게

십자군 원정이 실패로 끝나면서 교회의 절대적 권위는 약화됐고 절대 왕정의 기반이 확립됐다. 신 중심에서 인간 중심의 사고를 하게 됐고, 도시의 발달은 신흥 귀족인 부르주아 및 시민 계급을 대두시켰다. 이들은 자신의 의상을 과장하고 치장함으로써 권력과 재산을 과시했다. 몸에 꼭 맞는 형태의 의복에 슬래시를 기본으로 패드(pad), 퍼프(puff)를 이용해 인체미를 강조, 박력과 위엄을 나타냈다.

이러한 시대적 배경을 가장 잘 반영하고 있는 복식이 ‘푸르푸앵(pourpoint)’이다. 푸르푸앵은 14세기 중반부터 17세기까지 남자가 착용했던 상의로 어깨와 소매에 패드를 넣어 인체를 과장함으로써 남성미를 과시했고, 다양한 슬래시를 만들어 흰색 속옷이나 대조적인 색의 안감이 슬래시 사이로 보이게 했다.



입체적인 관능미… ‘저항정신’ 담아 청바지에

슬래시는 입체적이고 과장·과시적이며 관능미가 있으면서도, 편리하고 기능적인 특징을 가지고 있어서 과거부터 현재까지 많은 디자이너가 자신의 패션에 응용하고 있다. 캐주얼에서 하이패션(high fashion)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의복의 아이템에 적극 활용되고 있는데, 현재 유행하는 일상적이고 대표적인 예가 찢어진 청바지다.

찢어진 청바지는 미국의 히피 문화의 영향을 받아 나타났고, 저항과 시대정신을 반영한 하위문화의 스트리트 패션(street fashion)으로 인정받았으며, 현재는 세련된 커팅과 감각적인 디자인으로 주류 패션인 하이패션과 매스패션(mass fashion)에 많은 영향을 미치고 있다.

청바지는 입기 편하고 활동적이며 남녀노소 모두에게 어울리고 사계절 상관없이 입을 수 있는 대중적인 아이템이다. 전에는 젊은이들 사이에서만 찢어진 청바지가 유행했으나, 현재는 시니어들을 포함한 다양한 연령대에서 찢어진 청바지를 입고 있다. 에잇세컨즈(8 Seconds), 유니클로(Uniqlo)와 같은 저가형 브랜드에서부터 타임(Time), 구호(Kuho), 르베이지(Lebeige) 등의 고가 브랜드에서까지 의도적으로 찢거나 스크래치를 낸 청바지가 다양하게 출시되고 있다. 찢어진 부위는 주로 무릎이나 허벅지가 일반적이지만 요즘은 엉덩이 부위가 찢어진 것도 있는데, 이 엉덩이가 찢어진 청바지가 상당한 매출을 올리고 있다고 한다.

일상에서 찢어진 청바지를 입고 평범함보다는 자신만의 고유하고 특별한 패션을 추구하는 사람들은 이러한 슬래시 패션 속에서 다양성과 다름을 포용하고 있는 건지도 모르겠다.

<하희정 상명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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