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획 완결 그대 향한 사랑, 나라사랑으로

총탄 8발 맞고도 살아 나라가 늘 1순위 국가유공 등록마저 사양

송현숙

입력 2017. 06. 28   17:00
0 댓글

<5·끝>고(故) 이승규 (예)육군대위 사후 국가유공자 지정, 35년 만에 서울현충원 안장


5년 전 훈장찾아주기 사업 통해 국가유공자로 지정

6·25전쟁 당시 소위로 현지임관…총탄 빗발치는 전장 누벼
고 이승규 대위·자녀들 국방인으로 산 세월만 138년

 


 


 

 

 

“아버지, 친구 많이 사귀시고 편안히 쉬세요.”

27일 오전 국립서울현충원 충혼당 308호. 막 봉안식을 마친 검은 양복 차림의 이학간(63·3사 13기) 예비역 육군소령 등 3남매가 아버지 고(故) 이승규 예비역 육군대위의 납골함을 어루만지며 작별인사를 나눴다.


국립서울현충원에서의 봉안식

고명딸인 이경화(58) 국방홍보원 주무관은 어린 시절로 돌아간 듯 “아빠, 미국에 있는 쌍둥이들은 못 왔어요. 서운해하지 않으실 거죠? 오늘 저녁에 꿈속에서 만나요”라며 대답 없는 아버지와 애틋한 대화를 나눴다.

이날 봉안된 유해는 모두 6위. 여느 유가족들과 달리 이들 3남매의 얼굴은 편안해 보였다. “오늘은 위로보다 축하받을 날이죠. 선친께서 이렇게 국립묘지에 오셨으니까요. 대한민국에 태어난 것이 정말 자랑스러워요.”

머리카락이 하얗게 센 둘째 아들 이학면(60·기행 7기) 예비역 육군대위의 말에 나머지 두 남매는 ‘맞아, 맞아’라며 고개를 끄덕였다. 천륜으로 맺어진 아버지의 안장식에서 3남매가 ‘축하’라는 단어를 언급하다니, 모르는 사람이 들으면 오해할 법하지만 이들의 가족사를 듣고 나면 절로 마음이 숙연해진다.



 

 

 

남다른 국가관·청렴 의식 지닌 국방인

아버지인 고 이승규 육군대위는 1930년 5월 18일 경상남도 창원에서 3남 가운데 둘째로 태어났다. 총명했던 그는 어머니의 전폭적인 지원 아래 풍운의 꿈을 안고 서울대학교 농대에 진학했다.

그러나 1950년 6월 25일, 북한의 불법 남침으로 시작된 6·25전쟁은 정의감 강했던 대학생을 전쟁터로 이끌었다. 펜 대신 총을 든 그는 현지임관으로 소위 계급장을 달고 총탄 빗발치는 전투 현장을 누비던 중 적 총탄에 쓰러져 부산으로 긴급 후송돼 생사를 오갔다.

“당시 적 총탄 8발을 맞았는데 기적적으로 살아나셨어요. 몸에 난 총탄 자국을 영광의 상처로 여기셨죠. 특히 한 발은 왼쪽 두개골을 스쳐 3분의 1 정도가 함몰됐는데 다행히 뇌 기능에는 문제가 없어서 이후 군 생활도 계속하시고, 육군대위로 전역 후에는 기무부대 군무원 채용 시험에 합격해 열심히 사셨어요.”

맏형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둘째 아들은 “우리 아버지는 전상 후유증으로 힘든 상황에서도 남다른 국가관과 청렴 의식으로 점철된 국방인이었다”며 이와 관련된 일화를 소개했다.

“아버지는 참전용사였지만 생전에 국가유공자 신청을 하지 않으셨어요. 제가 고등학생 때 ‘아버지 국가유공자 신청하시면 저희 취업할 때 가산점도 받을 수 있는데 왜 않으세요’라고 여쭸다가 혼쭐이 났었죠. ‘내가 군무원으로 이미 나라의 녹을 받고 있는데 무슨 국가유공자로 등록하느냐’고 그러시더라고요. 또 제가 신체검사에서 4급 방위병 등급을 받았는데 ‘재검받고 현역으로 가라’고 하셔서, 이왕 가는 거 장교를 지원했죠. 지금 생각하면 정말 기막혔던 일은 후반기 교육 중 손가락 두 마디만 한 담석이 발견됐을 때였어요. 군의관은 빨리 수술받지 않으면 생명이 위태롭다고 하는데 아버지께서 수술동의서에 사인을 안 하시는 겁니다. 임관 후 수술받게 하겠다고. 만약 그 전에 잘못되면 국립묘지 가는데 이보다 영광스러운 일이 어딨겠냐고. 아버지는 늘 나라가 1순위였어요. 자식들도 당연하게 받아들였고요.”



 

 


아버지께 배운 대로 행동하려 노력

‘부모는 자식의 거울’이라고 했다. 혹자는 고지식하다고 손가락질했지만 자식들은 올곧은 아버지를 존경했고, 배운 대로 행동하며 살려고 노력했다.

첫째는 보병으로 20년 군 복무 후 예비군 중대장으로 정년 퇴임했고, 둘째는 7년간 공병 장교 복무를 마치고 국민건강보험공단에서 국민 삶의 질 향상에 힘쓰고 있다. 셋째인 이경화 주무관은 국방부에서 38년간 근무한 산 역사이고, 남편도 국방부 서기관 출신이다. 미국에 있는 넷째(이찬호)는 학사장교로 대위 제대했고, 막내(이순모)는 육사 41기로 입학했다가 임관을 불과 6개월여 남긴 4학년 때 질병으로 자퇴했다. 이들 가족이 국방인으로 산 기간을 합치면 모두 138년이다.

아쉽게도 아버지는 살아생전 자식들의 사회진출을 다 보지 못했다. 36년 전인 1981년, 향년 52세로 유명을 달리한 것. 위암으로 10년 투병생활을 하는 동안 초등학교 교사였던 아내의 퇴직금으로 병원비를 충당하면서도 국가유공자 등록을 거부했고, 가족들은 고인을 공원묘지에 모실 수밖에 없었다.

그러다 5년 전 국가에서 진행하는 훈장 찾아주기 사업을 통해 아버지께서 52년 화랑무공훈장을 수훈한 사실을 알게 됐고, 국가유공자 지정도 일사천리로 진행됐다.

“하늘을 우러러 한 점 부끄럼 없이 살다 간다. 남은 가족들도 그렇게 살기를 바란다”고 유언하셨어요. 아버지의 정신을 후손들이 이었으면 하는 바람으로 올해 이장을 결정했고요. 오늘 현충원 묘역을 보면서 울컥하네요. 이렇게 많은 분이 목숨 바쳐 지킨 이 나라를 소중히 가꾸는 것이 우리 모두의 몫임을 다시금 깨닫습니다.”(이학면 예비역 육군대위)

송현숙 기자 < rokaw@dema.mil.kr >

< 저작권자 ⓒ 국방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
댓글 0

오늘의 뉴스

Hot Photo News

많이 본 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