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획 완결 리더의 식탁

하늘에서 펑펑 내리는 情 가득한 ‘군것질 선물’

입력 2016. 12. 21   17: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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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7> 베를린 봉쇄와 건포도 폭격기


장난감 낙하산에 건포도·사탕 등 매달아 투하

베를린 봉쇄 기간 10만여 어린이에게 큰 즐거움

서독 국민들 연합국 신뢰하게 된 큰 요인으로

 



‘건포도 폭격기(raisin bomber)’라는 비행기가 있다. 일명 사탕 폭격기라고도 한다. 공중에서 폭탄 대신 건포도와 사탕을 투하한 수송기의 별명인데 1948년부터 1949년까지 연합국과 소련이 대립했던 베를린 봉쇄 때 있었던 일이다. 연합국은 소련이 베를린으로 향하는 모든 육상 운송로를 차단하자 군용 수송기로 서베를린 시민의 생활 필수품을 공수하며 맞섰다. 이때 생필품을 실어 나르던 미군 수송기 조종사들이 땅 위에서 손을 흔드는 아이들을 보고 손수건 등에 초콜릿과 사탕, 건포도 등 군것질거리를 싸서 작은 장난감 낙하산에 매달아 상공을 선회하며 조종석 창밖으로 던져 주었다. 서베를린 시민들이 이 연합군 수송기에 붙여준 별명이 바로 건포도 폭격기다.



발단은 베를린 봉쇄였다.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나면서 옛 독일의 수도 베를린은 미국·영국·프랑스 연합국이 점령한 서베를린과 소련군이 점령한 동베를린으로 나뉘었다.

독일 화폐 가치의 하락으로 경제 혼란이 심각해지자 서방 연합국은 화폐개혁을 통해 문제를 해결하려 했다. 그러자 소련은 새로운 독일 마르크화 사용을 거부하면서 서방 측 화폐개혁에 대한 대응으로 1948년 6월, 서베를린으로 향하는 모든 도로와 철도를 폐쇄했다. 서방 세계로부터 서베를린으로 들어오는 식량과 연료를 차단하고 소련이 독점 공급함으로써 연합국을 몰아내고 베를린 시 전체에 대한 지배력을 확보하겠다는 계획이었다.



미군 수송기 조종사 아이디어로 시작

연합국은 이에 대응해 서베를린을 소련에 넘겨주지 않겠다는 의지를 분명히 했다. 서베를린을 넘겨주면 다음은 서독이 공산권으로 넘어가고 다음은 유럽 전체가 위태로워지기 때문이었다.

그 결과로 사상 초유의 공중 수송 작전이 시작됐다. 200만 명에 이르는 서베를린 시민이 매일 먹고 사는 데 필요한 생필품이 서독으로부터 비행기로 공수됐다. 이를 위해 62초에 한 대꼴로 생필품을 실은 수송기가 베를린에 착륙했다.

베를린 봉쇄에 따른 연합국의 공수 대작전은 1948년 6월 24일부터 이듬해인 1949년 5월 11일까지 계속됐다. 이 기간 미국과 영국 군용 수송기가 총 27만7264회 이륙해 매일 1만3000톤의 생활필수품과 연료를 서베를린 시민에게 공수했다. 서방 측의 의지를 확인한 소련 정부는 결국 1949년 5월 12일, 서베를린에 대한 봉쇄를 해제했다.

건포도 폭격기는 이때 등장했다. 처음 시작은 미군 수송기 조종사의 자발적이고 개인적인 호의에서 비롯됐다. 당시 서베를린으로 생필품을 공수하는 C-47과 C-54 수송기를 조종하던 게일 할보르센 중위는 봉쇄된 베를린에서 힘겹게 지내는 어린이들에게 작지만 특별한 선물을 해주고 싶었다.

그래서 머물고 있던 공군 기지에서 동료 조종사들과 함께 사탕과 초콜릿, 건포도 등을 모았고 입지 않는 옷으로 작은 낙하산을 만든 후 모은 사탕과 초콜릿 등을 헝겊에 싸 매달았다. 그리고 당시 연합군 수송기가 이착륙하는 비행장 주변에 모여들어 비행기가 뜨고 내리는 모습을 구경하며 손을 흔드는 아이들에게 모형 낙하산으로 군것질거리를 투하해 선물했다.

군것질 낙하산을 만들고 있는 게일 할보르센 미 공군 중위.

언론 보도 후 미 공군 ‘군것질 작전’으로

게일 할보르센 중위의 모습을 본 동료 조종사들이 군것질 낙하산 투하에 동참하기 시작했고 이 모습이 독일 언론에 보도되면서 베를린과 서독 시민들로부터 좋은 반응을 얻게 되자 공수작전을 지휘하던 윌리엄 터너 장군이 적극적인 지원에 나섰다. 몇몇 공군 조종사의 개인적인 선물 차원을 넘어 아예 군것질 작전(Little Vittle Operation)이라는 이름으로 대대적인 군것질거리 투하가 시작된 것이다.



1949년 1월까지 25만 개 군것질 낙하

이 작전이 알려지면서 베를린 시민과 독일 국민들의 지지가 커졌고 미국 국민의 대중적인 지원이 쏟아졌다. 미국 제과협회에서는 할보르센 중위에게 필요한 물량이 어느 정도인지를 물은 후 수톤 규모의 초콜릿과 사탕, 껌을 지원했고, 미국 학교에서는 사탕과 껌을 매단 낙하산을 만들어 독일의 미군 공군기지로 보냈다. 민간인들의 적극적인 동참에 힘입어 할보르센 중위를 비롯한 수송기 조종사들은 1949년 1월까지 모두 25만 개의 군것질 낙하산을 공중에서 투하하면서 베를린 봉쇄 기간 중 10만여 명의 어린이들에게 작은 즐거움을 선사했다.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난 지 얼마 되지 않아 제대로 복구가 되지 않은 베를린이었기에 이때 처음 초콜릿을 맛본 어린이들도 적지 않았다고 전해진다.



연합군·독일 국민 우호 증진에 기여

군것질 낙하산의 규모가 커지면서 어린이들의 안전 문제로 인해 개별적인 낙하산 투하에서 학교와 병원 등에 사탕·초콜릿을 전달하는 식으로 바뀌었지만 어쨌든 이 군것질 작전은 연합군과 베를린 시민, 독일 국민의 우호 증진에 크게 기여한 것으로 평가됐다.

군것질 낙하산 작전과 건포도 폭격기는 작은 에피소드에 불과할 수도 있다. 하지만 조종사 한 명이 만들어 낸 사랑과 이런 소소한 이야기를 군것질 작전으로 확대시킨 감각이 서독 국민이 연합국을 신뢰하게 만든 요인이 아닐까 싶다.


<윤덕노 음식문화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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