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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나 지금이나 남것 탐하면 탈나거늘…

기사입력 2016. 12. 01   16:34

<45> 지푸라기 하나도 주고받지 마라!

무심코 입에 넣은 오미자 하나 중국의 스님과 한바탕 큰 싸움

오-초나라 사이 접경지에선 뽕나무 놓고 분쟁이 전쟁으로

 

 

 

 

 



오미자 사건

9월 15일 연암은 만리장성의 중요 관문인 고북구(古北口)라는 고을을 지나갔다. 열하로 갈 때는 시간에 쫓겨서 장성 구경을 못 했으나 이제는 그 구조와 기능을 고찰하고, 호랑이 ‘호(虎)’자의 호북구라는 고을 이름이 당나라 때 고북구로 바뀐 사연도 고증했다.

또한 산길의 쓸쓸한 절에도 들렀다. 승려는 둘뿐이었고, 뜨락에서 오미자를 말리고 있었다. 연암이 앉아서 오미자 몇 알을 주워 입에 넣자, 별안간 중 하나가 눈을 부릅뜨고 호통을 치며 다가왔다. 연암은 황급히 일어나 법당의 난간 가장자리로 몸을 피했다. 때마침 마부 춘택(春宅)이 담뱃불을 붙이러 왔다가, 상황이 심각함을 파악하고 중에게 욕설을 퍼부었다.

“이 인정머리 없는 돌중아! 우리 영감님이 더운 날씨에 시원한 물이 생각나서 허다하게 널려있는 오미자 몇 알로 군침을 돋우려 하신 것이다. 하늘에 위아래가 있고, 물에도 깊고 얕음이 있는데, 너는 어째서 당나귀처럼 위아래를 모르고 무례하게 구느냐? 천하에 무식한 놈 같으니라고!”

그러자 중은 모자를 벗어 던지더니, 입에 흰 거품을 물고 춘택에게 대꾸한다.

“너희네 영감이 내게 무슨 상관이야? 네게는 하늘같이 높아도 내가 두려워할 게 뭐냐?”

중의 대꾸가 채 끝나기도 전에 춘택은 냅다 그의 뺨을 후려갈기더니, 우리말로 쌍욕을 수없이 내뱉는다. 다른 중은 도망치듯 부엌문으로 가더니 편을 들지도, 말리지도 않는다. 연암은 그제야 안도하며 춘택에게 소란을 피우지 말라고 큰소리로 타이른다. 그러나 춘택은 분을 못 참고, 또 한 차례 주먹을 날려 중을 땅바닥에 쓰러뜨린 후 호통을 친다.

“우리 영감님이 너희 황제께 이 일을 아뢰는 날에는 네놈의 대가리가 쪼개지든지, 이 절이 허물어지게 될 것이다. 이 고얀 놈아!”

중이 일어나서 계속 지껄이자, 춘택은 벽돌을 집어 던지려 한다. 중은 달아났다가 곧 아가위(산사나무의 열매) 두 개를 가져와 건네며, 환한 얼굴로 청심환을 달란다. 연암이 한 알을 주니, 중은 머리를 무수히 조아린다. 연암은 혼자 상념에 젖었다.

“옛 성인은 옳은 일이 아니라면, 지푸라기 하나라도 남에게 주고받지 말라고 말씀하셨는데, 나는 너무 지나치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오미자 사건을 계기로 비로소 그 말씀이 옳다는 것을 깨달았다. 옛날에 뽕을 따던 오나라와 초나라의 여인들이 접경에 있는 뽕나무를 서로 자기네 것이라고 다투다가 결국 전쟁으로 번지지 않았던가?

몇 알의 오미자는 성인 말씀의 지푸라기 하나보다 많으며, 시비를 따지던 일은 뽕 따던 여인들의 다툼과 다를 게 무엇인가? 춘택과 중의 싸움으로 혹시 목숨을 잃는 자가 생겼다면, 양국 간의 병력 충돌로 번질 수도 있지 않았을까? 내가 학문이 얕고 조심성이 없어서 남의 오미자를 먹는 분별없는 행동을 했으니, 그 부끄러움과 두려움을 어찌 다 말로 형언할 수 있으리오!”

연암은 이날 아주 값진 교훈을 얻었다. 1) 조선의 선량한 천민이 중국에서 목숨을 걸고 양반을 지킨다는 사실 2) 아무리 하찮은 것이라도 탐내서는 안 된다는 자기반성이 그것이다.

 


청나라 관우 탈.

 

 



홀대받는 사절단

9월 16일 사절단이 밀운성을 지나 백하(白河) 강에 이르렀을 때다. 나루에 모여든 사람들이 서로 먼저 건너려고 아우성이다. 열하로 갈 때는 이곳에서 청나라 관리들이 제반 편의를 봐주더니, 돌아오는 길에는 아무도 돌보지 않는다. 연암은 사절단이 판첸라마에게 무례하게 굴어서 푸대접을 받는다고 생각했다.

“세력이란 이토록 믿을 수 없는 것이로구나. 모두가 세력이 있는 곳으로 황급히 몰려가지만, 눈 깜짝할 사이에 시간은 흐르고 세력도 시들해져서 기댈 곳이 없어져 버리는 것이다. 흙으로 빚은 소는 바닷속으로 들어가면 흩어져 버리고, 빙산(氷山)은 햇빛을 만나면 녹는 것처럼, 천하에 없는 세력도 이처럼 사라져 버리는 것이니, 어찌 허무하지 아니한가?”


서울 동묘의 관우상.  필자 제공

 

 

 


관우를 공자처럼 섬기다니?

9월 17일 새벽, 연암은 회유현의 부마장을 출발해 청하로 가는 도중에 관제묘(關帝廟)에 들렀다. 삼국지에 등장하는 촉나라의 관우(關羽·162~219)를 모시는 사당이었다. 연암은 평소에 관우를 학식 있는 인물로 평가하지는 않았다. 그런데 중국 땅에 들어와 보니 공자에 버금가는 성인으로 추앙받는 것이 의아했다.

가는 곳마다 관제묘·관성묘·관왕묘·관우묘·관운묘·관묘 등 이름도 다양했다. 공자는 문인으로 문묘에 모셔지고, 관우는 무인으로 관묘에 모셔진 것이다. 심지어 임진왜란 후 명나라 황제는 친필과 건립자금을 지원해서 조선에 ‘동관왕묘’(東關王廟: 약칭 ‘동묘’)가 세워지도록 했다. 현재 서울 종로구 숭인동에 있는 사당이다.

연암은 명나라 초기부터 시작된, 관우를 숭상하는 그릇된 전통이 청나라에까지 이어져서 이제 사대부들도 관우를 학자로 여기는 현실을 보면서 다음과 같은 감회를 피력했다.

“무릇 학문이란 신중하게 생각하고, 사물을 논리적으로 분석하며, 의문이 생기면 자세하게 물어서 배움을 넓히는 것이다. 그러므로 그저 인품이 뛰어나다고 어떤 인물을 학자로 치켜세워서는 안 된다. 묻고 배우는 자세를 계속해온 인물이라야 진정한 학자라고 할 수 있다.

정의롭고 용맹스러운 관우는 공자가 편찬한 노나라 역사책 ‘춘추’를 평생 지니고 다니며, 분수를 모르고 날뛰던 오나라와 위나라의 적들을 올바르게 대처했다. 그렇다고 그를 학문에 통달한 것처럼 ‘제(帝)’라고 신격화하는 것은 잘못된 일이다. 그의 영혼이 살아있다면 이런 칭호를 받지 않을 것이고, 영혼이 사라졌다면 그따위 아첨이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청하에 이르니 연경으로 돌아가는 사람들이 부쩍 많아졌다. 사절단의 마부와 심부름꾼들이 문득 멀리 서남쪽의 돌산을 가리키며, 서산(西山)이라고 알려준다. 벌써 다섯 차례나 연경에 왔던 마부 취만(翠萬)과 두 번 연경에 왔던 심부름꾼 산이(山伊)는 서산을 구경했다고 한다. 연암은 그들과 함께 가기로 약속했으나, 실제로 방문한 기록은 보이지 않는다.


<이현표 전 주미한국문화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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