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OME > 기획 > 공모전 > 열하일기로 배우는 나라사랑

“청의 조선사절단 특별 배려, 특전 아닌 회유책일 뿐”

기사입력 2016. 11. 24   16:26

<44> 연경으로 출발하다

사절단이 건륭제에게 올린 글

예부가 제멋대로 고치자 분노

“청은 큰 나라[大國]이기는 하나 명처럼 중심국가[中華]는 아냐

끊임없이 무엇 요구하는 오랑캐 우리에게 은혜 베푸는 듯 하지만

군비증강 막아 예속시키려는 속셈”

 

 

 

매를 이용해 사냥하는 청나라의 사냥도.

 

 




골짜기 같은 오랑캐 본성

9월 13일 아침, 조선사절단의 분위기는 침울했다. 전날 밤 갑자기 연경으로 돌아가라는 명령을 받고 밤새 떠날 준비를 한 데다 사절단이 건륭제에게 올린 글을 청나라 예부(禮部)가 제멋대로 고쳐서 보고한 것을 알고 분노가 폭발한 것이다. 예컨대 판첸라마를 마지못해 만났기에 황제에게 고마움을 표하지 않았으나, 예부는 “판첸라마를 만나는 복을 누렸습니다”라는 문구를 삽입했다.

사절단 대표는 임의로 수정한 것에 대한 항의 공문을 예부로 보냈다. 이에 예부 상서는 부족한 점을 보완하고 황제가 베푼 은혜에 보답하는 표현을 해줬는데 불평한다고 꾸짖었다. 게다가 사람을 보내서 빨리 길을 떠나라고 재촉하자, 소신을 굽혀야만 했다.

열하일기의 ‘행재잡록’(行在雜錄: 열하에서 두서없이 적은 글) 편에는 9월 2일부터 9월 12일까지 사절단과 청나라 예부 사이에 주고받은 공문이 공개됐다. 이 문서에는 청나라 조정이 한편으로는 사절단을 무시하고, 다른 한편으로는 공식행사 때 사절단 대표를 청나라 상서(尙書)급의 예우를 해준 특혜들도 열거돼 있다.

연암은 청나라가 조선에 베푸는 은혜를 받아들이는 조선인의 감정을 다음과 같이 설명했다.

“임진왜란 때 명나라 황제는 전국에서 모은 병사를 파병하고, 개인의 재물까지 군비로 충당하여 조선인을 왜놈의 침략에서 구원했다. 이는 자손만대에 잊지 못할 형제국가로서의 은혜다. 청나라도 조공을 감면해주고, 사절단이 열하에 도착하자 군기 대신을 보내 마중했으며, 조회나 공연 때 조선사절단을 각별히 배려했으나, 이는 특전이 아니라 오랑캐의 회유정책에 불과하다.”

당시 대부분의 조선인처럼 연암은 청나라를 큰 나라[大國]로 보았으나, 명나라와 같은 형제국가이자 세계의 중심국가인 중화(中華)로 생각하지는 않았다. 특히 청나라 민족을 골짜기에 시냇물이 흐르듯 끊임없이 무엇을 요구하는 오랑캐로 보았다.

결론적으로 청나라가 조선에 특혜를 주는 이유는 조선이 군비를 증강하지 못하도록 하고, 청나라에 흉년이나 전쟁이 나면 조선으로부터 원조나 군사 지원을 받기 위한 것이라면서, 이는 결코 영광스러운 일이 아니라 우려할 만한 걱정거리라고 평가했다. 아울러 청나라와의 공문 교환이나 청나라의 정세 파악을 현지 관리나 장군과 만나서 처리하는 것이 아니라, 양국의 통역에 의존하는 심각한 문제점을 지적했다.

 



청나라 궁녀들.

 

 


열하를 떠나는 감회

9월 13일 아침 식사 후 길을 떠난 연암은 도중에 마치 꿈을 꾸듯 상념에 젖었다.

“불교에서는 시간이 흐르면 애착심이 일어날까 봐 뽕나무 아래에서 사흘 밤을 계속 머물지 않는다는데, 나는 공자님을 모시고 엿새 밤이나 지내지 않았는가! 더구나 신선하고 깔끔해서 퍽 정이 들었던 숙소를 떠나자니 서운하기 그지없구나.

나는 일찌감치 과거를 그만두어 진사(進士)에 이르지도 못했고, 국학(성균관)에서 공부하고 싶었지만, 그것도 여의치 않았다. 그런데 홀연히 이역만리 외진 변방의 태학에서 엿새나 즐겁게 지내다니, 이런 우연이 어디 있겠는가? 신라의 최치원(崔致遠) 선생이나 고려의 이제현(李齊賢) 선생도 중국을 방문했지만, 나처럼 중국 북쪽 변방지방을 여행하지는 못했다.

앞으로 수천 수백 년 후에 몇 사람이나 이곳을 찾을지 모르지만, 나는 이번에 뜻밖에도 남들이 들르지 못한 여러 곳을 다녔다. 11세기 송나라의 재상 왕증과 부필, 문장가 소철(소동파의 동생)이 먼지를 휘날리며 지나간 수레바퀴 자국과 말 발자국이 눈앞에 선하구나. 아, 세상살이란 이처럼 앞일을 알 수 없는 것이로구나!”



연암이 태학에서 보았던 공자의 모습.

 

 

 

 

황실의 사냥터를 지나며

연암은 갈 때와는 다른 길로 연경으로 돌아왔다. 강희제가 내몽골의 초원에 길과 다리를 놓고, 황실의 사냥터 겸 군사훈련장을 조성해 놓은 ‘목란위장(木蘭圍場)’을 지나온 것이다. ‘목란’은 지역 이름이고, ‘위장’이란 국가에서 설치한 사냥터를 의미한다.

9월 14일 아침, 연암이 왕가영에서 점심을 먹고 황포령을 지날 때다. 붉은 보석과 푸른 깃으로 장식한 모자를 쓴 20세 청년이 검정말을 타고 가는데, 그의 앞에 1명, 뒤에는 30명이나 되는 기마병이 호위한다. 모두 화려한 복장에 금장식이 된 안장 위에 앉아, 활과 화살 혹은 조총을 메고 번개처럼 달리는데, 행인에게 물러나라는 소리를 지르지는 않는다.

청년은 건륭제의 친조카인 예왕(豫王)이었다. 연암은 뒤따르던 태평차가 잠시 멈춰 쉬는 동안 수레에서 들려오는 여자 목소리에 주목했다.

“여인들은 북쪽의 열린 창으로 다투어 얼굴을 내민다. 구름처럼 틀어 올린 검은 머리에는 맑은 옥(玉)이 별처럼 반짝이고 금빛 꽃과 푸른 비취가 함께 어우러져 꿈에 보는 듯하다. 곱고 요염한 얼굴은 마치 떨어지는 시냇물에 놀란 기러기와 같다. 창을 닫고 떠나는 수레에는 세 여인이 탔는데, 모두 예왕을 모시는 궁녀란다.”

9월 15일 아침, 연암은 여관에서 나와 바로 아래에 있는 관제묘에 들렀다가 그곳에서 숙박한 것으로 보이는 예왕을 만났다. 이미 거나하게 취한 예왕이 술을 권하자 연암은 태연히 마셨다. 몇 마디를 나누다가 예왕이 술을 토하는 것을 보고 연암은 황실 인물의 경망스러움에 실망했다.

아침 식사를 마치고 연암이 10㎞ 정도 이동했을 때다. 100여 명의 기병이 산 아래로 달리고, 팔뚝에 매를 앉힌 10여 명의 기병이 산골짜기를 누빈다. 매의 눈을 검은 가죽으로 가렸는데, 함부로 날아 다리를 다치지 않도록 하고, 눈의 총기를 키우기 위해서란다. 황제의 손자들은 사흘 동안 겨우 메추라기 한 마리를 잡고, 이제 토끼 한 마리를 사냥 중인데 그마저 신통치 않다. 연암은 말한다.

“강희제는 1681년 오대산에서 활을 쏘아 호랑이를 잡아 그곳 지명을 석호천으로 지었다. 또한, 화살 30개로 29마리의 토끼를 잡고, 송정에서 호랑이를 세 마리나 잡은 일화를 그려서 사고판다니 귀신같은 활 솜씨라고 하겠다. 후손들도 말은 잘 타는데, 호랑이를 만나서 솜씨를 발휘하는 것을 보지 못해 아쉽다.”

자료=필자 제공

<이현표 전 주미한국문화원장>

< 저작권자 ⓒ 국방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

기사에 대한 의견 개 있습니다. 로그인 후에 작성하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