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획 완결 지금 펜타곤은

계급 강등 묘수로 대대급 참전에도 ‘실리·명분’ 모두 챙겨

입력 2016. 11. 18   17: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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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1> 프랑스의 6·25전쟁 파병과 몽클라르 중령


 

몽클라르 중령은 누구?

 

2차 세계대전 때 외인부대 지휘

자유 프랑스군 이끌며 무장저항

태어날 아이에게 “자유 위해 참전”

계급 낮춰 자원한 ‘59세 노병’

 

 

당시 프랑스 국내외 상황

안보리 상임이사국 파병 책임 불구
북베트남군과 전투로 큰 지원 곤란
1950년 11월 29일 한반도 도착
‘지평리 전투’ 등서 혁혁한 전공

 

 

 

맥아더(오른쪽) 장군과 몽클라르(왼쪽) 중령.  필자 제공

 

 


우리 사회가 6·25전쟁을 대하는 접근법에서 고쳐야 할 점 가운데 하나는 감정에 호소하는 일종의 ‘감동 우선주의’다. 해마다 호국보훈의 달이 오고 6월 25일이 되면 정부 관련 부처와 언론들은 극적인 상황, 자극적인 사건, 영웅적인 인물을 앞세워 뭔가 임팩트 있는 콘텐츠를 만들려고 노력한다. 업무를 다루는 실무자는 ‘이렇게 하면 국민(장병)의 흥미를 끌 겁니다’라고 말하고 보고받는 책임자는 ‘뭔가 더 팍팍 와 닿는 거 없어?’라고 묻는다.

6·25전쟁의 역사적 사실을 ‘흥미 위주로 팍 와 닿게’ 만든 콘텐츠 중에는 프랑스군의 참전에 관한 것이 있다. ‘프랑스군의 장군이 6·25전쟁에 참전하려고 스스로 강등을 자청했다’는 것이 줄거리다. 그 과정에서 감동을 강조하기 위해 사실들을 살짝 뒤틀거나 침소봉대했다. 정작 국민에게 전달돼야 할 역사적 메시지는 가려졌다고 본다.

이 글에서는 국민에게 잘 알려지지 않은 당대의 역사적 배경, 프랑스군의 내부 사정 등을 밝혀 적고자 한다.

프랑스는 1950년 7월, 참전국으로는 일곱 번째로 6·25전쟁에 파병했다. 1950년 7월에 해군 구축함 라 그랑디에르(La Grandiere)를 보냈다. 육군은 1950년 11월 29일에 한반도에 도착했다. 지상군의 첫 교전은 1950년 12월 13일에 있었다.

프랑스는 대대급의 지상군을 파병했다. 대대장은 몽클라르 중령이었다. 그는 라울 마그랭 베르느레라는 이름도 갖고 있었다.

라울 마그랭 베르느레(Raoul C. Magrin-Vernerey, 1892~1964). 그는 제1차 세계대전에 참전했고, 제2차 세계대전 당시에는 외인부대를 지휘했다. 망명 자유프랑스군을 이끌며 무장저항운동을 했던 대표적 인물이다. 랄프 몽클라르(Ralph Monclar)는 이때 사용한 암호명이다.

그는 수많은 전투에서 전후방을 가리지 않고 싸워 18번이나 전상을 입었으며 18개의 훈장을 받았다. 이 무인의 투쟁은 독일 패망 후 프랑스가 승전국의 위치를 누릴 수 있는 역사적·실체적 근거를 보장한 소중한 국가적 자산이었다.

그는 6·25전쟁 발발 소식을 듣고 파병부대 지휘관에 자원했다. 그러나 그의 최종 계급은 육군 중장이었고 파병부대는 대대급이었다. 그는 중령으로의 강등을 자청했다. 출정을 앞둔 어느 날, 임신 중이던 아내에게 그는 다음과 같은 말을 남겼다고 한다. “나는 언제나 전장에서 살아왔소. 나는 곧 태어날 자식에게 아버지가 유엔군으로 자유를 위해 참전했다는 자랑스러운 기억을 물려주고 싶소.”

우리 언론의 콘텐츠는 대개 여기에서 끝난다. 그리고 마지막에 감동을 주는 문장을 덧붙이는 것이 공식이다. 우리 군도 매한가지다.

그러나 곰곰이 생각해보자. 한 국가의 장군이 영관급 장교로 강등을 자청해 대대급에 보직되는 것이 ‘내가 가겠소’ 하면 되는 일인가? 역전의 장수라고는 하지만 59세의 노병이 전투대대장으로 파병되는 일이 개인적 소망만으로 가능한 일이었을까? 아니다. 그렇다면 어떤 사정이 있었던 것일까? 이 일화를 제대로 이해하려면 당시 프랑스가 처한 국제적·국가적 상황을 살펴봐야 한다.

북한의 불법 남침에 유엔 회원국들이 공동 대응하기로 했을 때, 프랑스는 역사적·국제적 위상과 책임에 부합하는 수준의 파병을 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2차 대전의 참화에서 아직 회복하지 못한 데다, 인도차이나에서 호찌민과 구엔 지압이 이끄는 북베트남군을 상대로 전쟁을 치르는 중이었다. 물리적으로 전력을 보탤 여유 자체가 없었던 것이다(후일 몽클라르가 영국이나 터키처럼 최소한 연대급 부대를 보내야 한다고 보고했지만 프랑스 정부는 추가적 지원이 불가하다면서 ‘지금 현재 당신의 대대에 지원한 물량이면 인도차이나에서 세 개 대대를 유지할 수 있을 것’이라고 답신했을 정도다).

그러나 프랑스는 파병해야 했다. 프랑스는 유엔 안전보장이사회의 상임이사국으로서 유엔군 파병에 찬성했다. 국내적으로도 한반도에 파병을 해야 한다는 여론이 높았다. 고심 끝에 프랑스 육군은 현역과 예비역을 통틀어 자원자를 받아 엘리트부대를 꾸리고자 했다. 특수임무부대(TF) 조직 방식을 택하면 구색을 갖출 수 있을 것으로 기대했다. 하지만 그래도 1개 대대급 이상은 무리였다. 그것으로는 도저히 국제적 위신이 서지 않을 것이었다. 더군다나 당대 프랑스군은 장비나 전술적 측면 모두에서 현대전을 치를 만한 수준이 못 됐다.



프랑스의 히든 카드: 전쟁영웅 베르느레의 파병

이런 상황에서 역전의 노장인 라울 마그랭 베르느레 중장이 대대장으로 가겠다고 나선 것이다. 한 국가의 전쟁영웅이 노년에 파병을 자청하다니! 프랑스가 처한 어려움과 국제사회 질서유지에 대한 정부의 기여 의지를 상징적으로 보여줄 수 있는 안성맞춤의 해법이었다.

그러는 동안 프랑스군 내부적으로는 위기를 기회로 바꾸기 위한 노력이 계속됐다. 파병 대대의 구성원 중 참모진을 인사·정보·작전·군수 계통의 전문 인력으로 선발한 것이 그 일환이다. 출신 부대도 육군 보병부대, 해병대, 공수부대, 외인부대 등으로 다양하게 했다. 그리하여 프랑스군은 장교 39, 부사관 172, 병사 806명으로 특수임무 대대를 편성했다. 이 가운데는 전장관찰단 임무를 수행하는 특별 참모진도 포함됐다. 이들은 실시간으로 전장 상황을 기록하고 전훈을 도출했다.



치열한 격전지 한가운데 있었던 프랑스대대

프랑스군은 잘 싸웠다. 어려운 상황에서 대단한 선전을 했다. 1950년 11월 29일, 한반도에 도착한 후 프랑스군은 미 제2사단의 주력이 위치한 수원으로 이동했다. 당시 청천강전투에서 미 제2사단이 큰 피해를 봐 이를 보강할 필요성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격전을 치렀다. 이 전투 사례는 세계 현대전 10대 전투에 꼽히며, 전 세계 주요 사관학교의 전쟁사 교재에 용맹함의 표본으로 실려 있다. 바로 1951년 2월의 지평리 전투다.

이후 미 제2사단 23연대에 편조된 프랑스대대는 원주쌍터널전투, 단장의능선전투, 티본고지전투, 화살머리고지전투, 중가산전투 등에서 큰 활약을 했다. 전쟁 기간 교대 인원을 포함해 총 3421명이 참전했으며 부대원 중 262명이 전사하고 1008명이 부상했다. 실종은 7명, 포로는 12명이었다.



자유 수호 위해 싸우고 미군 편제도 습득

자, 그렇다면 프랑스군의 참전을 어떻게 정리하고 장병들에게 제시하면 좋을까? 나는 ‘6·25전쟁을 통해 명분과 실리를 모두 챙긴 프랑스’도 괜찮은 접근법이라고 본다. 적어도 해만 되면 지치지 않고 반복되는 ‘프랑스의 전쟁영웅 베르느레 중장이 대한민국의 자유와 민주주의를 지키기 위해 강등을 자청하여 몽클라르 중령으로 참전하다니! 아, 감동적이다’보다 낫지 않을까?

프랑스는 유엔 상임이사국으로서 자유민주주의 체제 수호를 위해 세계 각국과 함께 6·25전쟁에 참가했다. 이를 통해 국가의 국제적 위상을 공고히 하고 자유민주주의 세계 리더 국가로서의 입지를 굳힐 수 있었다. 그뿐만 아니라 참전을 통한 실익도 챙겼다. 프랑스군은 6·25전쟁에서 연합 및 합동 작전을 통해 당대 최강 미군의 훈련·편제·장비와 관련한 제도·노하우를 단기간에 습득했다. 또한 다수의 최신 무기 체계와 장비를 본국으로 가지고 갈 수 있었다.

이런 두 가지의 중차대한 임무, 과업을 수행할 수장으로서 역전의 노장 라울 마그랭 베르느레 중장은 가장 적격의 인물이었다고 평가할 수 있을 것이다.

<남보람 소령 / 군사편찬연구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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