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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 좋아하고 잘 기르는 사람이 목마 행정 맡아야”

기사입력 2016. 11. 17   18:06

<43> 조선 말 사육 문제점과 해결 방안 제시하다

우리가 가난한 것은 목축 못하기 때문

청은 목동 하나가 수백 필 말떼 관리

우리는 장군이 타는 말까지 수입해

외국 우수 혈통 말로 품종 개량해야

 

 

 

건륭제와 그의 애마(愛馬).  필자 제공

 


청나라와 조선 말

열하일기는 청나라 제도에 비해 낙후된 조선의 사회현실을 비판하는 데 그치지 않고, 나름대로 창의적인 대안을 제시하고 있다. 이런 의미에서 나라의 살림살이에 도움이 되는 실용서(實用書)이자, 나라사랑을 배우는 참 교과서라고 할 수 있다.

1780년 9월 12일 아침, 태학의 시습재에서 악기를 구경하고 숙소로 돌아오던 중에 연암은 수백 필의 말 떼를 목격했다. 말들은 수숫대나 막대기를 든 목동의 지시에 따라 대오를 지어 행진하는 사람들처럼 움직이고 있었다. 당당하고 절도 있는 청나라 말들은 조선사절단 숙소 밖에 매어둔 볼품없는 조선 말들과 뚜렷한 차이가 있었다.

이때 문득 연암은 수년 전에 친구인 정철조(鄭喆祚·1730~1781)와 우리나라 토종말이 점차 작아져서 멸종될 것이라는 대화를 나눴던 것을 회고한다. 참고로 문과(文科) 합격자인 정철조는 기계와 지도 제작은 물론, 천문지리에도 조예가 깊어서 해시계도 만들었던 인물이다. 또한, 그림·글씨에 뛰어났으며 석치(石癡·돌에 미친 바보)라는 호에서 보듯이 벼루도 잘 만들었다고 한다.

악와수에서 출현했다는 용마의 상상도. 필자 제공

말의 개량과 길들이기

박지원이 황해도 금천의 연암협(燕巖峽·제비바위 골짜기)에서 살고 호도 ‘연암’으로 지은 것은 목축을 해보겠다는 큰 뜻이 있었기 때문이다. 첩첩산중의 연암협은 묘하게도 양쪽이 평평한 골짜기이며, 물가의 풀들이 아주 좋아서 말과 소 같은 가축 수백 마리를 기르기에 충분한 곳이었다.

연암은 조선에서의 말 사육의 문제점을 다음과 같이 지적한다.

“우리나라가 가난한 것은 목축을 제대로 할 줄 모르기 때문이다. 우리나라에서 가장 큰 말 목장은 제주도다. 원나라 세조가 보내서 기른 말을 400~500년 동안 종자를 한 번도 갈지 않았으니, 악와(渥와)라는 연못에서 출현했다는 용마(龍馬)처럼 신비한 말이라도 조랑말이 되는 것은 당연하다. 조랑말을 타고 적진에 들어가서 싸우는 꼴을 상상해보라! 이것이 첫째로 한심한 일이다.

 

제주도의 조랑말.

 


대궐에서 기르는 말에서부터 장군이 타는 말에 이르기까지 토종말은 없고, 모두 요동·심양 등에서 수입하니, 청나라와 교역이 끊어지면 어떻게 되겠는가? 이것이 둘째로 한심한 일이다. 임금이 행차할 때 신하들은 말을 빌리거나 나귀를 타고 뒤따르니 위엄이 없어 보인다. 이것이 셋째로 한심한 일이다.”

이어서 연암은 네 가지 문제점을 더 열거한다. 4) 높은 계급의 문관은 말을 타지 않으니 기르지 않고 5) 100명 이상의 병사를 거느리는 장교는 말을 가질 형편이 못 되어 한 달에 세 번씩 훈련에 임할 때 말을 세내서 타며 6) 역참에 그나마 좋은 말들을 배치하지만, 과로에 시달려 곧 죽어버리고 7) 굴레와 고삐를 매어 말을 자유롭지 못하게 한다는 것이다.

결론적으로 연암은 “말도 인간과 같이 감정을 가진 존재이므로 그 본성에 맞는 대우를 해줘야 한다”는 점을 강조하면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세 가지 방안을 제시한다.

“첫째, 인간이 힘들면 쉬고 싶고, 답답하면 벗어나고 싶고, 오그리면 펴고 싶고, 가려우면 긁고 싶어 한다. 말을 편안하게 해주기 위해 굴레와 고삐를 풀어주어야 한다. 둘째, 말이 익히고, 따뜻하며, 짠 음식을 싫어하니 날 음식을 먹이고, 물도 찬물을 마시게 한다. 셋째, 외국에서 우수한 혈통의 수컷 말을 데려다가 토종말과 교미를 시켜서 품종을 개량해야 한다.”

무엇보다도 연암은 벼슬하는 양반들이 허드렛일을 알려고도 하려고도 하지 않는 병폐를 지적하면서, 말을 좋아하고, 잘 먹이고, 기르고, 다룰 줄 아는 자에게 목마(牧馬) 행정을 맡기는 것이 중요함을 강조한다.

 

청심환의 주재료인 우황.  필자 제공


청심환의 인기

열하에서 엿새를 머무르는 동안 연암은 윤가전·왕민호와 그의 룸메이트 추사시·기풍액·학성 등의 벗을 사귀었다. 9월 12일 저녁에는 광동안찰사 왕신(汪新)의 비서가 찾아와서 말을 전했다.

“안찰사께서 내일 정오쯤에 선생님을 찾아뵙고, 글과 그림을 금칠로 그린 부채를 선물하시겠답니다. 부디 외출하지 않으셨으면 합니다.”

연암은 이틀 전에 기풍액을 만나는 자리에 왕신이 함께 있었기 때문에 반가워하면서, 그렇게 하겠다고 대답했다. 이날 밤 무슨 일이 벌어질 줄도 모르고!

잠시 후 조선사절단 대표가 대성전에서 예를 올리고 숙소로 돌아와서, 안내를 맡았던 왕민호와 추사시에게 청심환 몇 알과 부채 몇 자루를 보냈다. 1634년 명나라 사신이 조선에 와서 성균관에 들렀다가 유생들에게 백금 50냥을 주었다는 사실을 알았던 연암은 두 사람을 찾아가 유감을 표시하고 돌아왔다.

저녁 식사 후, 연암은 왕민호의 제자가 가져온 붉은 종이쪽지를 받았다. 최고 품질의 은 두 냥을 보내니 청심환을 한 알만 주면 고맙겠다는 왕민호의 편지였다. 연암은 청심환 두 알을 보내고, 은은 돌려보냈다.

청심환은 열하일기에 15차례나 등장하며, 홍대용의 청나라 방문기 ‘연기(燕記)’에도 16차례나 보인다. 이는 청나라 사람들의 조선 청심환에 대한 애착을 짐작게 한다. 요즘 중국인들이 우리 화장품에 매료된 것처럼! 특히 궁중에서 제작된 청심환이 진짜라는 것을 알기에, 왕민호는 염치 불고하고 연암에게 부탁을 했다.

“연경으로 돌아가라!”

저녁이 깊어갈 때쯤, 황제로부터 “조선사절단은 서둘러 연경으로 돌아가라!”는 명령이 떨어졌다. 일행은 부산하게 떠날 채비를 했다. 한밤중에 연암이 기풍액에게 작별을 고하자, 그는 10월 7일 연경에서 만나자고 제안했다. 쾌히 승낙한 연암은 왕민호에게 갔다. 그는 “내일, 추석날(9월 13일) 달밤에 만나기로 했는데, 기약도 없이 이렇게 떠나시면 어찌합니까?”라며 울먹인다.

학성의 숙소에 갔으나 만나지 못하고, 윤가전에게 들러서 작별을 고하니, 그는 눈물을 닦으며 말한다.

“늙으니 산다는 게 아침 이슬 같다는 것을 실감하게 됩니다. 밝은 달 아래 이별하니, 선생이 그리울 땐 저 달을 보고 님 대하듯 하리다. 부디 술과 여자를 멀리하시고, 큰일을 이루시구려. 시간이 되면, 연경에 가서 다시 만납시다.”

<이현표 전 주미한국문화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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