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北 여진족서 南 삼포 왜인까지 토벌 ‘전공 혁혁’

입력 2016. 11. 16   17: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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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2> 문무겸전의 위인 황형


황형(黃衡·1459~1520)은 조선 중종 때 무신으로 자는 언평(彦平), 시호는 장무(莊武), 본관은 창원(昌原)이다. 황형의 아버지가 늙도록 자식이 없었는데 후부인(後夫人)인 사헌부감찰 남인보(南仁甫)의 딸이 해주의 수양산(首陽山)에서 기도해 그를 낳았다.

 

 “성현 사업 알려라” 임금이 책 하사


황형은 어려서부터 글을 읽어 큰 뜻을 통했고 관례(성년식)를 치른 뒤에 원주의 원보곤(元甫崑)의 딸에게 장가들었다. 원보곤은 당시에 문천군수(文川郡守)로 있었다.

황형이 어느 날 사냥을 따라갔다가 큰 멧돼지가 앞에서 튀어나오자 곧 화살 한 발을 쏘아 쓰러뜨리니 원보곤이 매우 놀라 기이하게 여기고서 “문(文)과 무(武)는 애당초 서로 다른 것이 아니다”고 말했다. 원보곤은 사위에게 활과 말을 대주면서 무예를 익히도록 권장했다. 황형은 1년도 채 안 돼 1480년에 무과(武科)에 급제했다.

성종은 친히 황형을 불러 경서를 얼마나 읽었는지 물었다. 황형이 “신은 사서삼경을 모두 읽었습니다”라고 대답하니 임금이 매우 가상히 여기고 기뻐하며 무사들을 가르치게 했다. 또한, 꼭 경전을 읽어 성현의 사업을 알도록 하라면서 책 한 질을 하사하니 당시 사람들이 부러워하고 칭송했다. 당시 임금으로부터 책을 선물받는다는 것은 대단한 영광이었다. 훈련원 판관으로 있던 중 1486년 중시(重試)에서 장원으로 뽑혀 절충장군(折衝將軍·정3품 당상관 무관 품계)으로 품계가 올라 유원진(柔遠鎭)과 혜산진(惠山鎭)의 첨사(僉使·일선 진영을 관장하던 무관직)가 됐다.

당시 야인(野人·여진족)이 국경을 침범해 변경의 수령을 살해하니 황형은 원수(元帥)인 허종(許琮)을 따라 선봉(先鋒)이 됐다. 군대가 귀환할 때 후미(後尾)의 군대로서 울지령(蔚地嶺)에 머물고 있었는데 적(賊)이 곧장 후미의 군대를 공격하니 황형이 그들을 격파해 퇴각시킴으로써 일군(一軍)이 그 덕분에 온전할 수 있었다.

 

풍모 ‘군계일학’…中 사신도 칭찬

 


얼마 뒤에 삼포(三浦)의 왜인들이 변란을 일으켜 성벽을 함락하자 남쪽 지방이 크게 소란했다. 임금이 특별히 황형을 방어사(防禦使)로 임명해 가서 토벌하게 했다. 그는 밤낮없이 급히 길을 달려가 적을 대패(大敗)시키고 수백 명을 베어 죽였다. 남은 무리는 뿔뿔이 흩어졌으며 다투어 배에 오르려다가 바다에 빠져 죽은 자들이 셀 수 없을 정도로 많았다. 승전보가 조정에 알려지자 임금은 승지(承旨)를 보내 선유(宣諭·임금의 유지나 훈유를 백성에게 널리 알려 공포함)하고 특별히 그를 정헌(正憲) 품계로 승진시켰다.

그의 생김새는 우람했고 활 쏘는 기예가 두드러지게 뛰어났다. 사람들이 멀리서 바라보면 모습이 헌걸차고 의젓해 그를 모르는 사람도 그가 큰 인물이 될 것임을 단번에 알아보았다. 화사(華使·중국의 사신)인 왕헌신(王憲臣)이 그를 한 번 보더니 기이하다고 칭찬하고서 자루 안에 있던 약물(藥物)을 꺼내어 신물(信物·신표로 주는 물품)로 그에게 선사했다. 이로써 중국 조정에 있는 사람들도 그의 성명(姓名)을 듣게 됐다.

그가 남쪽의 왜구를 정벌할 때에는 일찍이 그를 논핵(論劾·죄과나 허물을 분석해 탄핵함)한 자를 휘하의 종사관(從事官)으로 두었다.

어떤 이는 그자가 황형을 해칠까 싶어 위태롭게 여겼으나 황형은 속마음을 털어놓고 그를 대했으며 털끝만큼도 낯빛에 꺼림칙한 낌새를 드러내지 않았다. 이에 그 사람이 이전의 일을 부끄럽게 여기고 황형에게 고마워하며 “내가 공에게 포용(包容)을 받은 지 오래되었습니다”라고 했다.

대에 무종(武宗)으로 추중

 


그는 젊어서부터 군진(軍陣)에 노련해 사졸(士卒)들의 인심을 얻었고 강토(疆土·나라의 경계 안에 있는 땅)의 형세와 노중(虜衆·오랑캐 무리)의 강약(强弱) 등에 대해서도 눈 안에 환하게 들어 있지 않은 것이 없었다. 서쪽·남쪽·북쪽 변경의 절도사를 두루 역임했으며, 국가가 그를 장성(長城)처럼 믿고 의지한 기간이 거의 30년이나 됐다.

그 또한 한 시대를 만났음을 알고서 임금에게 받은 은혜에 감격해 벼슬에 제수될 때마다 번번이 일신을 잊고 나라를 위해 죽는 것을 자기의 책임으로 여겼으므로 일세(一世) 사람들이 모두 공을 무종(武宗·무예에 있어 으뜸인 사람)으로 추중(推重)했다.

문무를 겸전하고 사통팔달의 달인으로 평생을 국가에 충성한 황형의 업적은 후세에 많은 가르침으로 이어진다.

<박희 한국문인협회 전통문학위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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