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획 완결 열하일기로 배우는 나라사랑

유능한 수레 장인이 무능한 관리들보다 수백 배는 이롭도다!

입력 2016. 06. 10   15: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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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 고루한 사대부여, 깨어나라


태평·독륜차 소개하며 수레 예찬

“우리는 수레 관련 자리만 논하지 만드는 기술에 관한 연구는 안 해”

찬란했던 고구려의 옛 영광과 조선의 현실 대비해 사대부 비판

 

 

 


 

 

 

고구려 오회분 4호묘 벽화의 수레바퀴 만드는 신.

 

 


북진묘는 한민족의 신당(神堂)?

열하일기의 ‘일신수필’ 편에서 가장 주목할 내용은 북진묘(北鎭廟) 방문기와 수레 예찬론이라고 할 수 있다. 연암은 북진묘에 대해서는 ‘피서록’(피서 산장에 머물며 기록한 글) 편에서도 부연 설명했다. 비중 있게 다루고 싶었기 때문일 텐데, 구체적으로 무엇을 강조하고 싶었을까?

북진묘 방문기는 아래와 같이 시작된다.

“북진묘는 의무려산의 아래쪽에 있다. 뒤로는 많은 봉우리가 마치 병풍을 친 듯이 펼쳐져 있고, 앞으로는 큰 벌판을 내려다보고 있다. 넓고 푸른 바다로 둘러싸인 오른쪽으로는 광녕성을 안고 있는데, 마치 어린아이를 보듬은 듯하다. 집집이 비단 띠처럼 푸른 연기가 수없이 피어올라서 멀리 우뚝 선 쌍탑이 유난히 희게 보인다.”

연암은 원래 북진이 고조선과 고구려의 영토이며, 그곳에 한민족의 얼이 숨 쉬고 있다는 생각을 하고 있었다. 따라서 그에게는 사당을 뜻하는 ‘묘(廟)’자가 의아했을 것이다. 일반 가정에서는 가묘(家廟), 왕실에서는 종묘(宗廟)라고 부르는 사당은 조상의 신주를 모시고 제사를 지내던 곳이기 때문이다.

2500년 전에 편찬된 ‘예기(禮記)’에는 사당에서 행해지는 의식의 절차가 등장하며, 우리의 ‘삼국사기’에도 기원후 6년에 박혁거세의 사당을 세웠다는 기록이 보인다. 그런데 ‘열하일기’에는 북진묘가 조상을 모시는 사당이 아니라, 하늘의 물을 지상으로 퍼준다는 북두칠성 신을 모시는 신당(神堂)으로 묘사돼 있다.

“북진묘는 비와 물을 다스리는 현명제군(玄冥帝君)이라는 주인 신과 그를 보좌하는 신들을 모신 곳이다. 또한, 건물 내부에는 두 개의 조각상이 있는데, 하나는 북두칠성의 여섯 번째 별인 문창성군(文昌星君)이고, 또 하나는 옥처럼 예쁜 낭랑이라는 후궁이라고 한다.”

연암은 청나라가 중국의 동북쪽에서 비롯되었으므로 북진묘를 예전보다 더욱 융숭하게 받들고 있음을 지적했다. 17∼18세기에 강희제·옹정제·건륭제가 사당을 크게 증축하고, 친필도 여럿 남겼다는 것이다.

특히 연암은 1754년 가을 건륭제의 북진묘 참배를 주목했다. 43세의 황제가 제사를 지낸 후 “조선인이 지은 시가 이곳에 많은 것을 보니, 기자(箕子)의 천하를 다스리는 법이 여태껏 전해지나 보다”라고 쓴 글을 보았고, 보천석(補天石)이라는 바위에 경내의 늙은 소나무를 소재로 새겨 넣은 그림과 시를 보았기 때문이다.

또한 건륭제를 수행했던 조선인 김내(金내)가 지은 “북두칠성이 하늘을 받치는 기둥이 되어 영원히 황실을 지키리라”는 시가 보천석에 새겨진 것도 보았다. 연암은 김내의 시가 졸렬하며 조선인의 어투도 아니라고 혹평했지만, 그 시를 빌려 북진묘가 북두칠성을 섬기는 신당임을 확인하고 이렇게 말하고 싶었을 것이다.

‘북진묘는 본래 단군 이후 북두칠성을 섬기기 위한 우리 조상의 신당이었다. 그런데 안타깝게도 당나라 이후에 전통적이고 유교적인 중국의 사당으로 변모됐다.’


고구려 안악 5호분 벽화.

 



북진묘 전경.  필자 제공

 

 

 

고구려의 영광을 일깨우는 수레 예찬

연암은 북진묘 시찰의 감회보다 훨씬 뭉클한 감동을 주는 글을 ‘일신수필’ 편에 게재했다. ‘수레 제도[車制]’라는 소제목이 붙은 수레 예찬론이 그것이다. 사실 수레에 관심을 가진 인물은 연암만이 아니었다.

“수많은 말과 수레바퀴 구르는 소리가 천둥 같아서 옆 사람의 말소리가 들리지 않을 정도이니 천하의 장관이로다!” 연암보다 14년 전에 중국을 다녀온 홍대용의 ‘을병연행록’의 내용이다. 박제가·유득공·이덕무 등도 수레 제도의 중요성을 역설했다. 1783년 대사헌 홍양호가 정조 임금에게 올린 상소문에도 수레 제도 도입의 필요성이 언급돼 있다.

그러나 연암이 그들과 다른 점은 당시에는 발견되지도 않았던 만주와 북한 지역의 고구려 고분벽화를 마치 본 것처럼 서술했다는 사실이다. 다양한 수레가 그려졌으며, 심지어 수레 만드는 신(神)과 대장장이 신이 등장하는 벽화 말이다! 묘하게도 수레 예찬론은 찬란한 고구려의 영광과 고루한 조선의 현실을 적나라하게 대비한다.

“사람이 타는 수레를 태평차(太平車)라고 한다. 바퀴는 높이가 팔꿈치에 닿고 살이 서른 개인데, 대추나무로 둥글게 테를 만들고 그 위를 쇳조각과 쇠못으로 온통 입혔다. 짐을 싣는 수레는 대차(大車)라고 한다. 바퀴 높이가 태평차보다 조금 낮으며 바퀴의 살은 십(十)자가 두 개인 입(입)자 모양이다. 태평차는 겉바퀴가 돌아가는 반면에, 대차는 굴대가 돌아간다.

독륜차(獨輪車)는 한 사람이 수레 양쪽의 채를 겨드랑이에 끼고 밀고 가는 외바퀴 수레다. 길가에서 떡·경단·과자·과일 등을 파는 장수들은 독륜차를 이용하며, 밭에 거름을 실어 나르는 데에도 편리하다. 그 밖에 전투용·공사용·화재진압용 수레 등 수없이 많으나, 우리 생활에 긴요한 것은 사람이 타는 수레와 짐 싣는 수레다.”

연암은 조선에도 수레가 있지만 보편화되지 못하는 이유가 산이 많아서 수레가 적합하지 않다는 등 궤변을 늘어놓은 사대부들에게 있다고 신랄하게 비판한다.

“우리 국민이 가난한 것은 수레 제도가 발달하지 못했기 때문이며, 그 책임은 사대부들에게 있다! 그들은 주나라 관직과 직무를 기록한 ‘주례’를 보고 수레바퀴 만드는 관리, 수레 가마 만드는 관리, 수레 끄는 막대를 만드는 관리를 들먹인다. 그러나 수레 만드는 기술과 작동 방법에 관해서는 연구하지 않는다. 그저 읽을 뿐이니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아하, 슬프다! 헌원(軒轅)이라는 전설 속의 왕은 한자 이름에서 보듯이 수레를 창조한 인물이다. 이후 훌륭한 장인들에 의해서 수레는 눈부신 발전을 했고 수레 제도 또한 통일되었다. 이런 발전이 백성 위에 군림하고 으스대는 관리들의 학식보다 수백 배나 국민의 삶에 이롭고 국가의 경영에 큰 도움이 되는 것 아닌가?

청나라에서 내가 날마다 수레를 보고 놀랍고도 즐거운 것은 수레 제도로 온갖 일을 미루어 짐작할 수 있기 때문이다. 또한, 수천 년 동안 이러한 발전을 위해서 성인이 얼마나 고심했는지를 어렴풋이나마 알 수 있기 때문이다!”

<이헌표 전 주미한국문화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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