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획 완결 제2차 세계대전 시크릿100선

美·英, 평화 원칙을 밝히고 전쟁 목표를 정하다

입력 2015. 11. 27   17: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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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5) 대서양 헌장


日 진주만 공습 때 美 참전의 토대

국제연합 헌장 이념적 기초 활용

 


 

 

 

 미국이 제2차 세계대전의 공식적인 교전국이 되기 전부터 프랭클린 루스벨트 대통령은 전황을 예의 주시하고 있었다. 독일이 프랑스를 점령하고 영국까지 압박하고 있는 상황에서 미국이 2차 대전을 계속 강 건너 불 보듯 해도 되는지 알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루스벨트는 2차 대전에 참전할 경우 미국과 영국 그리고 소련의 공통적인 전쟁 목표에 대해 고민하고 있었다. 루스벨트와 처칠, 스탈린은 나치 독일을 패배시키는 것을 공통의 전쟁 목표로 삼는 데 공감대를 형성한 상태였다. 이에 더해 국가들의 생존과 번영을 위해 전쟁 위협으로 제국주의적 확장과 정치적인 강압을 행하는 독일의 무력을 영원히 금지시키는 국제조약체제를 받아들여 무장을 해제하고 국가를 개혁해야만 한다는 데도 동의하고 있었다.

 하지만 전반적인 미국의 국내 여론은 전쟁 참여나 영국·소련과의 동맹 관계 체결에 비판적이었다. 지도자로서 처칠과 스탈린에 대한 평가도 좋지 않았다. 둘은 제국주의자로 알려져 있는 데다 영국 우월주의자와 공산주의자의 이미지도 벗어버리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이런 상황에서 윌스니언(Wilsonian·미국 민주주의의 가치를 세계에 전파하고 세계평화를 위한 세계 각국의 책임을 강조하는 사람들)이었던 루스벨트는 미국의 이상주의자와 국제주의자들에게도 호소력을 지닐 수 있는 전쟁 목표에 대한 원칙적 선언을 원했다.



 

 1941년 8월 9일부터 12일까지 루스벨트와 처칠은 뉴펀들랜드 플라센티아 베이에 정박 중이던 전함에서 회담을 했다. 최근의 전략적 관계와 미국이 교전국이 됐을 경우 향후 계획을 상의하기 위해서였다. 또한 그들은 소련 연방이 일본으로부터 위협받으면서 유럽과 아시아의 2개 전선에서 전투를 벌여야 하는 압박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게 도움을 줄 것이라는 메시지를 스탈린에게 전해 그를 안심시키고 싶어했다.

 미 해군의 구축함과 군사원조 물품을 영국에 지원하는 협상에서 루스벨트가 내건 조건은 처칠이 대서양 헌장에 서명하는 것이었다. 대서양 헌장은 자국 국민들과 잠재적인 동맹국들에게 그들이 영토 또는 경제적으로 제국적 이익을 추구하지 않는다는 것을 확인하고 민족 자결권과 공해 자유 원칙을 보장하는 것을 주요 내용으로 하는 미국과 영국 사이의 조약 증서였다. 또한 이 증서는 루스벨트의 ‘네 가지 자유’를 구체화한 미래의 희망들에 대한 내용을 담고 있었다. 네 가지 자유란 공포로부터의 자유, 결핍으로부터의 자유, 신앙 생활의 자유, 언론과 의사표현의 자유로 1941년 1월 루스벨트의 연설에서 공표됐다.

 해외에 다수의 식민지를 보유하고 있던 영국에 대서양 헌장의 각 조항은 상당히 곤혹스러운 내용이었다. 하지만 당시 전쟁의 한가운데서 독일의 위협에 직면해 미국의 도움이 절실했던 처칠로서는 이 조약을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다. 이 조약이 내건 목표들이 ‘존경스러운 원칙’이라는 외교적 수사(修辭)와 함께. 하지만 그는 헌장의 실현 가능성에 대해서는 특별히 언급하지 않았다. 이런 처칠의 모습을 보면서 스탈린은 같은 해 말 대서양 헌장을 받아들이는 데 동의했다.

 흥미로운 것은 처칠과 루스벨트 중 그 누구도 실제적으로 대서양 헌장에 서명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대신 헌장을 보도자료로 만들어 배포했다. 조항을 만들고 발표까지 했으나 서명은 하지 않은 기이한 대서양 헌장을 그렇다고 무의미한 것으로 평가절하하기는 어렵다. 대서양 헌장의 각 조항을 논의하며 1941년 8월 루스벨트·처칠·스탈린이 형성한 공감대는 같은 해 12월 일본의 진주만 공습이 일어났을 때 미국이 즉각 참전하는 토대가 됐다. 또한 상당히 이상주의적이고 편의주의적인 대서양 헌장의 조항은 이후 창설되는 국제연합(United Nations) 헌장의 이념적 기초를 제공하는 등 큰 영향을 미쳤다.

정리=김가영 기자/자료=‘2차 세계대전 시크릿 100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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日 진주만 공습 때 美 참전의 토대

국제연합 헌장 이념적 기초 활용

 


 

 

 

 미국이 제2차 세계대전의 공식적인 교전국이 되기 전부터 프랭클린 루스벨트 대통령은 전황을 예의 주시하고 있었다. 독일이 프랑스를 점령하고 영국까지 압박하고 있는 상황에서 미국이 2차 대전을 계속 강 건너 불 보듯 해도 되는지 알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루스벨트는 2차 대전에 참전할 경우 미국과 영국 그리고 소련의 공통적인 전쟁 목표에 대해 고민하고 있었다. 루스벨트와 처칠, 스탈린은 나치 독일을 패배시키는 것을 공통의 전쟁 목표로 삼는 데 공감대를 형성한 상태였다. 이에 더해 국가들의 생존과 번영을 위해 전쟁 위협으로 제국주의적 확장과 정치적인 강압을 행하는 독일의 무력을 영원히 금지시키는 국제조약체제를 받아들여 무장을 해제하고 국가를 개혁해야만 한다는 데도 동의하고 있었다.

 하지만 전반적인 미국의 국내 여론은 전쟁 참여나 영국·소련과의 동맹 관계 체결에 비판적이었다. 지도자로서 처칠과 스탈린에 대한 평가도 좋지 않았다. 둘은 제국주의자로 알려져 있는 데다 영국 우월주의자와 공산주의자의 이미지도 벗어버리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이런 상황에서 윌스니언(Wilsonian·미국 민주주의의 가치를 세계에 전파하고 세계평화를 위한 세계 각국의 책임을 강조하는 사람들)이었던 루스벨트는 미국의 이상주의자와 국제주의자들에게도 호소력을 지닐 수 있는 전쟁 목표에 대한 원칙적 선언을 원했다.



 

 1941년 8월 9일부터 12일까지 루스벨트와 처칠은 뉴펀들랜드 플라센티아 베이에 정박 중이던 전함에서 회담을 했다. 최근의 전략적 관계와 미국이 교전국이 됐을 경우 향후 계획을 상의하기 위해서였다. 또한 그들은 소련 연방이 일본으로부터 위협받으면서 유럽과 아시아의 2개 전선에서 전투를 벌여야 하는 압박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게 도움을 줄 것이라는 메시지를 스탈린에게 전해 그를 안심시키고 싶어했다.

 미 해군의 구축함과 군사원조 물품을 영국에 지원하는 협상에서 루스벨트가 내건 조건은 처칠이 대서양 헌장에 서명하는 것이었다. 대서양 헌장은 자국 국민들과 잠재적인 동맹국들에게 그들이 영토 또는 경제적으로 제국적 이익을 추구하지 않는다는 것을 확인하고 민족 자결권과 공해 자유 원칙을 보장하는 것을 주요 내용으로 하는 미국과 영국 사이의 조약 증서였다. 또한 이 증서는 루스벨트의 ‘네 가지 자유’를 구체화한 미래의 희망들에 대한 내용을 담고 있었다. 네 가지 자유란 공포로부터의 자유, 결핍으로부터의 자유, 신앙 생활의 자유, 언론과 의사표현의 자유로 1941년 1월 루스벨트의 연설에서 공표됐다.

 해외에 다수의 식민지를 보유하고 있던 영국에 대서양 헌장의 각 조항은 상당히 곤혹스러운 내용이었다. 하지만 당시 전쟁의 한가운데서 독일의 위협에 직면해 미국의 도움이 절실했던 처칠로서는 이 조약을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다. 이 조약이 내건 목표들이 ‘존경스러운 원칙’이라는 외교적 수사(修辭)와 함께. 하지만 그는 헌장의 실현 가능성에 대해서는 특별히 언급하지 않았다. 이런 처칠의 모습을 보면서 스탈린은 같은 해 말 대서양 헌장을 받아들이는 데 동의했다.

 흥미로운 것은 처칠과 루스벨트 중 그 누구도 실제적으로 대서양 헌장에 서명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대신 헌장을 보도자료로 만들어 배포했다. 조항을 만들고 발표까지 했으나 서명은 하지 않은 기이한 대서양 헌장을 그렇다고 무의미한 것으로 평가절하하기는 어렵다. 대서양 헌장의 각 조항을 논의하며 1941년 8월 루스벨트·처칠·스탈린이 형성한 공감대는 같은 해 12월 일본의 진주만 공습이 일어났을 때 미국이 즉각 참전하는 토대가 됐다. 또한 상당히 이상주의적이고 편의주의적인 대서양 헌장의 조항은 이후 창설되는 국제연합(United Nations) 헌장의 이념적 기초를 제공하는 등 큰 영향을 미쳤다.

정리=김가영 기자/자료=‘2차 세계대전 시크릿 100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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