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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모한 공격… 쓰라린 역사를 안기다

입력 2015. 11. 17   17: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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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2> 흘레보프스키의 ‘바르나에서 브와디스와프 3세의 죽음’ (1865~1875)


1444년 이슬람세력에 맞선 바르나 십자군의 결정적 패배

오스만튀르크의 영광 드러낸 역사화… 승자의 위풍 과시

 

 


 

  수만 명이 목숨을 걸고 싸우는 전투에서 가장 중요한 요소는 역시 장수다. 장수가 어떤 자질을 갖고 있느냐에 따라 승패가 결정된다. ‘무능한 부대는 없고 오직 무능한 장수만 있을 뿐이다’라는 말도 지휘관의 중요성을 일깨워준다. 그렇다면 가장 위험한 장수는 어떤 인물일까? 용기와 무모함을 구분하지 못하는 장수가 아닐까 한다. 장수가 죽으면 군대가 무너지니 무모한 장수만큼 더 위험한 일도 없을 것이다.

 

 

● 1444년 바르나 십자군

 15세기 유럽은 이슬람의 오스만튀르크제국의 공격으로 새로운 십자군 전쟁을 선포할 지경에 이르렀다. 몽골제국의 약화로 동쪽으로부터의 위협이 사라지자 중동의 이슬람세력은 서쪽으로 영향력을 넓히기 시작했다. 14세기 후반 발칸반도를 장악해 들어갔다. 콘스탄티노플(지금의 이스탄불)을 중심으로 한 일부 지역만이 겨우 비잔틴제국의 명맥을 유지할 뿐이었다. 전선은 헝가리 남부까지 올라와 있었다.

 1443년 로마교황 에우제니오 4세(Eugenio IV)는 이슬람 세력을 발칸반도에서 몰아내기 위해 다시 십자군 전쟁을 선포했다. 트랜실바니아공 야노스 후냐디(John Hunyadi, 1406~1456)가 거둔 놀라운 승리에 유럽은 고무되었다. 폴란드의 젊은 왕 브와디스와프 3세(1424~1444)가 헝가리 왕위에 오른 것도 큰 힘이 됐다. 바르나 십자군의 주력은 1만5000여 폴란드-헝가리 기사단이었다. 유럽 여러 지역에서 온 수천의 십자군이 가세했다. 제노바와 베네치아에서 출항한 수십 척의 함대도 북해로 향하고 있었다.

 십자군의 지휘를 맡은 이는 이미 여러 차례 오스만군과의 전투에서 승리를 거두었던 후냐디였다. 그는 오스만군과 싸워 이기는 법을 알고 있는 몇 안 되는 유럽의 장수로, 교황으로부터 ‘기독교의 챔피언(Christ’s Champion)’이란 호칭을 받은 인물이다. 그는 사소한 전투를 피하고 빠르게 진격하여 북해 연안도시 바르나(Varna·지금의 불가리아 동부)까지 진격했다. 진군 도중에 왈라키아(지금의 루마니아)의 4000여 기병이 합류하여 전력도 강화됐다.

 그러나 문제는 십자군 함대가 들어오기도 전에 5만의 오스만 대군이 바르나로 들이닥친 것이다. 신속히 후퇴하자는 주장도 있었지만 바르나는 북쪽의 가파른 고원지대와 남쪽의 호수, 그리고 동쪽으로 북해와 맞닿아 있기 때문에 서쪽에서 몰려드는 오스만군과의 승부를 피하기 어려운 상황이었다.

 1444년 11월 10일 아침 사령관 후냐디는 2만여 십자군을 호수와 고원 사이의 3.5㎞에 걸쳐 활모양으로 배치했다. 중앙에 헝가리와 폴란드 왕실 근위병과 귀족 기사 부대를 두고 그 뒤로 왈라키아 기병을 포진시켰다. 좌우에는 5000~6000명의 십자군이 갖가지 깃발 아래 전열을 갖추고 있었다. 오스만군도 비슷한 군형을 갖추었다. 중앙 대열에는 정예 예니체리(Janissary) 부대가 도랑과 목책으로 방어선을 구축한 채 십자군의 기병 공격을 대비하고 있었다. 오스만의 술탄 무라드 2세(Murad II, 1404~1444)는 뒤편 언덕에서 부대를 지휘했다. 좌우로는 시파이(Sipahi)라 불렸던 기병대와 여러 지역에서 차출된 보병들이 배치됐다. 북쪽 고원에는 사수와 아나톨리아 경기병을 배치하여 역습을 노렸다.

 처음 전투는 십자군이 우세한 것처럼 보였다. 좌측에서의 오스만 기병의 공격을 보기 좋게 격퇴하고 추격에 나선 것이다. 그러나 무질서하게 추격하던 십자군은 곧 측면 매복에 걸려 오히려 도망치는 상황이 됐다. 이들 대부분은 바르나 남쪽 습지에서 살육됐고 교황의 특사 체사리니(Cesarini)도 죽음을 피할 수 없었다.

 

 ● 브와디스와프의 무모한 돌격

 십자군의 좌측이 무너지자 우측도 위험해졌다. 중앙을 지키던 총사령관 후냐디가 나서야 할 상황이었다. 그는 브와디스와프 3세에게 자신이 돌아올 때까지 움직이지 말고 기다리라고 말한 뒤 2개의 기병 부대를 이끌고 달려갔다. 오스만군에게 후냐디는 존재 자체가 공포였다. 그는 일거에 오스만 기병을 격퇴하며 밀어붙였다. 오스만의 좌측이 붕괴되기 시작한 것이다.

 이때 극적 사건이 발생한다. 오스만의 좌측이 후퇴하는 것을 목격한 브와디스와프 3세는 후냐디의 경고를 무시하고 500의 폴란드 근위기병을 이끌고 오스만의 중앙으로 돌진한 것이다. 예니체리 부대를 돌파해서 술탄을 생포할 심산이었다.

그러나 술탄의 코앞에서 왕의 말이 꼬꾸라지면서 무모한 돌진은 실패로 끝나고 만다. 말에서 떨어진 브와디스와프 3세는 예니체리 전사 코자 하자르(Kodja Hazar)의 칼에 무참히 죽임을 당하게 된다. 참수된 그의 머리가 창에 매달리자 십자군의 전열은 급격히 붕괴되기 시작했다. 후냐디가 할 수 있는 일은 그나마 남은 병력을 수습해 후퇴하는 일뿐이었다. 십자군 수천 명이 살육됐고 포로로 잡힌 자들은 노예로 팔려갔다. 바르나 십자군의 참혹한 패배였다.

 폴란드 출신 화가 스타니스와프 흘레보프스키(1835~1884)의 작품 ‘바르나에서 브와디스와프 3세의 죽음’은 바로 이 순간을 장엄하게 묘사하고 있다. 백마와 함께 빛나는 철제 갑옷와 화려하게 치장된 안장은 그가 고귀한 자임을 말해준다. 부러진 칼과 벗겨진 투구는 그의 돌진이 얼마나 격렬한 것이었는지를 증명하고 있다. 말 위에서 이 모든 것을 주시하고 있는 이가 흰 터번을 쓴 술탄 무라드 2세다. 그는 십자군이 깨버린 휴전 문서를 가리키며 그들의 잘못을 꾸짖고 있다. 함께 돌진했던 근위병들도 죽임을 당하거나 포로로 잡혔다. 그들을 둘러싸고 있는 오스만 군대의 모습은 화려하면서도 위풍당당하다. 북해를 배경으로 전장이 펼쳐져 있고 왼쪽 멀리 바르나 요새가 보인다. 그림 좌측 십자군을 무찌르고 돌아온 이슬람 기병의 다소 지쳐있는 모습에서 치열한 전투가 벌어졌음을 느낄 수 있다.

 

 ● 사라져버린 승리의 기회

 바르나 전투에서의 승리는 1453년 콘스탄티노플(비잔틴제국)의 함락으로 이어졌다. 이후 발칸지역(유럽 남동부)은 거의 3백 년간 오스만의 지배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작품의 주인공은 브와디스와프 3세지만 결국 이 작품을 통해 보여주고자 하는 것은 오스만튀르크제국의 영광이다. 작가는 폴란드 출신이지만 19세기 중반 술탄의 궁중화가로 활약했던 인물이다. 당시 술탄 압둘라지즈는 재능 있는 작가를 초빙하여 오스만의 도덕적 우위와 위대함을 과시할 역사화를 제작하게 한 것이다.

 브와디스와프 3세의 무모한 돌진이 이 전투의 승패에 얼마나 결정적인 영향을 끼친 것일까? 당시 오스만은 절대적 전력에서 우위에 있었던 것은 확실하다. 그러나 철갑으로 무장한 십자군의 전력 또한 결코 만만찮았다. 기록에 남아 있듯이 오스만군의 일부는 3일이 지났을 때까지 자신들이 승리했음을 인식하지 못했을 정도로 그들의 피해도 적지 않았다. 적어도 그의 무모한 돌진이 없었다면 적의 좌측을 유린했던 후냐디의 부대가 돌아와 오스만군을 협공할 기회가 주어졌을 것이다.

궁극적 승패는 알 수 없지만 그의 무모한 돌격으로 승리의 가능성이 사라져버린 것은 확실하다. 장수의 무모함이 역사의 물길을 바꿀 수 있는 기회를 놓친 것이다.

중앙대 정치국제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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