英 웰링턴의 방어전략이 빛난 전투 … 나폴레옹은 역사속으로
사각형 방진 모서리를 강조 …佛 기병공격과 극적인 대비 그려
200년 전 이맘때 벨기에의 작은 마을 워털루를 향해 35만 대군이 모여들고 있었다. 유럽의 운명을 건 대결전이 벌어지려는 순간이었다. 프랑스혁명(1789) 이후 유럽을 제패했던 나폴레옹이 러시아 원정 실패(1812)와 라이프치히전투 패배(1813)로 엘바 섬으로 유배된 것이 1814년 4월의 일이다. 그러나 1815년 3월 엘바 섬을 탈출한 나폴레옹이 다시 권좌에 오르자마자 유럽 왕실들은 급히 반나폴레옹 동맹을 결성하고 군대를 동원하기 시작했다. 이미 6월 초 대규모의 영국 주도 연합군과 프러시아군이 프랑스 북부를 향해 진군하고 있었다.
나폴레옹은 프랑스 군대가 충분히 준비되지 않았지만 동맹군들이 집결할 경우 더욱 불리해질 것이라는 것을 알았기 때문에 공세적 입장을 택하게 된다. 그의 계획은 동맹군의 연결을 끊은 후 먼저 브뤼셀에서 남하하는 영국 연합군을 격파하고, 그런 다음 동부의 프러시아군을 물리친다는 계획이었다. 초반 승리를 통해 반나폴레옹 동맹을 깨고 평화협정을 이끌어낼 속셈이었다.
프랑스군이 벨기에 남쪽 국경을 넘어 프러시아 전초기지를 공격해 들어간 것이 6월 15일이었다. 웰링턴(Wellington) 장군이 지휘하는 6만8000여 연합군과 블뤼셔 원수가 이끄는 프러시아군 사이를 밀치며 돌진해 들어갔다. 벨기에 남부 샤를루아(Charleroi)에 도착한 나폴레옹은 프러시아군이 집결하는 동북쪽 리니(Lingy)로 프랑스군 주력을 진격시키는 한편 네(M. Ney) 장군이 이끄는 2군단을 보내 10여 ㎞ 북쪽 교통요지인 콰트르브라스(Quatre-Bras)를 점령토록 했다. 영국군이 프러시아군을 지원하는 것을 막기 위해서였다.
16일 리니전투에서 승리하자 나폴레옹은 승기를 잡았고 생각했다. 그러나 프러시아 군대는 나폴레옹의 기대와 달리 전력을 유지한 채 북쪽 우아브르(Wavre)로 후퇴했다. 그루시(Grouchy) 장군이 이끄는 3만여 추격부대는 그들의 꽁무니만 따라다닐 뿐이었다. 이 소식을 들은 웰링턴도 부대를 북쪽으로 이동시켰다.
비록 웰링턴은 후퇴하고 있었지만 어디서 싸울지는 자신이 정할 수 있었다. 그는 워털루(Waterloo) 남쪽에 위치한 몽생장(Mont-Saint-Jean)의 능선을 결전의 장소로 선택했다. 몽생장의 능선은 동서로 길게 뻗어 있는데 경사가 급한 데다 산마루를 따라 움푹 팬 길(sunken lane)이 나 있어 방어에 최적지였다. 그는 이미 1년 전에 이 지역을 답사하고 전술적 이점을 파악했다. 능선의 경사면이나 팬 길은 프랑스군이 자랑하는 대포사격과 기병 공격의 파괴력을 최소화할 수 있기 때문이다. 게다가 능선 앞쪽 농가들을 요새화하여 진격하는 프랑스군을 측면에서 공격할 수 있었다. 더욱 중요한 점은 프러시아군이 후퇴한 우아브르와의 거리가 12㎞에 불과하다는 것. 반나절이면 프러시아 지원부대가 도착할 수 있는 거리였다.
워털루전투는 18일 오전 10시가 넘어서야 시작됐다. 프랑스군의 입장에서 프러시아의 지원군이 오기 전에 웰링턴 부대를 패퇴시켜야 하는데 이상하게도 나폴레옹은 결전을 머뭇거렸다. 전날 내린 폭우로 대포를 이동시키기 힘들다는 것이 명목상 이유였다. 그러나 심한 위장병과 치질로 고생하고 있던 나폴레옹은 전장을 지키지 못할 만큼 심각한 상태였다.
나폴레옹의 계획은 웰링턴 부대를 좌우로 분산시킨 다음 엷어진 중앙을 돌파해 들어가는 것이었다. 그러기 위해 우선 요새화한 좌측 우고몽(Hougomont) 농가와 중앙 라에생트(la Haye Sainte) 농가를 장악하는 것이 필요했다. 이들 요새에는 기껏해야 400~500명이 주둔하고 있었다. 하지만 프랑스군의 파상공격을 용케 견뎌내면서 나폴레옹의 작전을 어긋나게 만들었다.
결국 나폴레옹은 정면 돌파를 단행하게 된다. 오후 1시 에를롱(D’Erlon) 원수가 이끄는 1군단이 영국군의 좌현을 밀어붙였다. 치열한 전투가 1시간 넘게 계속되면서 프랑스군이 산 능선까지 밀고 들어갔다. 하지만 욱스브리지(Uxbridge)가 지휘하는 영국 중갑기병의 공격으로 결정적 순간을 놓치고 3000여 명의 사상자를 낸 후 물러나게 된다. 영국기병 역시 너무 깊숙이 들어오는 바람에 프랑스 창기병과 대포 공격에 분쇄됐다.
프랑스의 12파운드 그리보발 대포는 여전히 위력적이었다. 오후 4시께 웰링턴은 사상자를 줄이기 위해 부대를 능선 아래로 이동시키는데 전투를 지휘하던 네 장군은 영국군이 후퇴하는 것으로 착각한다. 기병을 지원할 보병이 채 준비되지 않았지만 조급했던 네 장군은 1만2000여 명의 기병을 이끌고 영국군 중앙을 돌격했다.
프랑스 화가 앙리-펠릭스-에마뉘엘 필리포토(Henri-Felix-Emmanuel Philippoteaux, 1815~1884)의 ‘워털루전투’(1874)는 이 순간의 모습을 사실적이면서도 격정적으로 표현하고 있다. 무섭게 달려드는 프랑스 기병 공격에 웰링턴은 방진(infantry square) 구축을 명령했다. 보통 1개 대대 단위로 구성되는 방진은 2-4열로 구성된 사각형 인간요새로 포격이나 보병 공격에는 취약했지만 기병 공격에는 가장 효과적인 방어전술이다.
그림 왼쪽에서 붉은 제복의 영국군이 어떻게 방어하는지 잘 보여준다. 전열의 병사들은 총검을 세워 말들의 접근을 막는 한편 후위의 병사들이 기병이나 말에게 사격을 가하고 있다. 방진은 충분한 거리를 두고 구축해 아군 간의 사격을 피할 수 있었다. 일단 기병 공격이 추동력을 상실하게 되면 효과적인 공격은 어려워진다.
작가는 사각형의 방진 한쪽 모서리를 강조함으로써 마치 뾰쪽한 창으로 프랑스 기병군단을 뚫고 들어가는 듯한 느낌을 갖게 한다. 개개의 병사의 일사분란한 방진을 구축하고 흔들림없이 자신의 역할을 다할 때 방진은 그 자체로 날카로운 창이 된다. 넘실대듯이 언덕을 휩쓸고 지나가는 프랑스 기병과 극적인 대조를 이루며 강력한 방어력을 효과적으로 드러내고 있다.
1차 기병 공격은 강력한 규율로 무장한 영국군 방진에 의해 참혹한 실패로 끝났지만 전진 배치된 대포와 보병 공격이 동반되면서 영국군의 강력한 방어선이 조금씩 허물어지기 시작했다. 전방의 라에상트까지 프랑스군에게 점령되자 웰링턴은 위기감을 느끼게 된다.
네 장군는 나폴레옹에게 근위대를 출동시킬 것을 요청했다. 근위대는 나폴레옹 직속 부대로, 프랑스군의 최후·최강 전력이었다. 영국군이 흔들리고 있는 그 시점에 근위대를 공격에 가담시켰다면 워털루의 운명은 달라졌을지 모른다. 그러나 나폴레옹은 망설였다. 영국군이 정비될 수 있는 시간을 준 것이다.
결국 근위대를 동원, 총공격에 나서지만 능선에서 그들을 기다리고 있던 영국군에 의해 제압된다. 게다가 이미 프러시아군이 프랑스군의 우현으로 밀고 들어오는 상황이었기 때문에 전세를 돌릴 수 없었다. 역사상 가장 결정적 전투 중 하나가 그렇게 끝나고 말았다.
워털루는 ‘영원한 패배’를 상징한다. 그렇기 때문에 나폴레옹의 잘못에 더 많은 설명을 부여하는 경우가 많다. 하지만 승패를 가른 것은 웰링턴의 뛰어난 전략이었다. 몽생장이라는 지역을 전장으로 선택한 것이나 프랑스의 전술적 우위를 상쇄시킬 방어전략을 마련한 것도 그였다. 용장(勇將)보다 지장(智將)이 중요한 이유이기도 하다.
중앙대 정치국제학과 교수
오늘의 뉴스
Hot Photo News
많이 본 기사
이 기사를 스크랩 하시겠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