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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르망디 상륙작전의 영웅, 어떤 두려움도 없이…

입력 2015. 06. 09   17: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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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6> 존 폴 스트레인의 ‘유타해변’(1975)


나무 지팡이 짚고 45구경 콜트권총 든 시어도어 장군 

사실적인 배경에 초월적인 모습으로 그려 숭고함 강조

 


 

 

 6월 6일 현충일은 노르망디 상륙작전 기념일이기도 하다. ‘오버로드(Overlord)’란 암호명을 갖고 있는 이 작전은 2차 세계대전을 종식시키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영미 연합군의 계획은 프랑스 서부해안에 대규모 부대를 상륙시켜 곧장 독일 중심부로 진격하는 것이었다. 17만 명의 병력과 2만여 대의 차량, 800여 전함을 포함하는 5000여 척의 선박, 그리고 1만여 대의 비행기가 투입된 ‘지상 최대의 작전’이 전개된 것이다.

 흔히 비밀스러운 거사일을 나타내는 ‘디데이(D-Day)’란 말도 노르망디 상륙작전에서 연유하는 것이다. 작전의 성공 여부는 정확한 장소와 날짜를 독일군이 알지 못하게 하는 데 있었다. 독일군 방어사령관은 ‘사막의 여우’라 불리는 롬멜(Rommel)이었다. 독일군은 연합군이 유럽 서부해안으로 상륙작전을 펼칠 것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서부해안의 지리적 특성을 감안할 때 예상 가능한 상륙지점은 도버해협에서 가장 가까운 칼레(Calais)나 300㎞ 남서쪽의 노르망디, 그리고 더 왼쪽에 있는 항구도시 셰르부르(Cherbourg)였다. 문제는 정확한 장소와 날짜였다.

 연합군은 상륙에 필요한 충분한 전력을 마련하는 한편 독일군을 속이기 위한 다양한 기만전술을 전개했다. ‘보디가드’란 작전명으로 추진된 기만전술의 핵심 목표는 정확한 상륙지점을 눈치채지 못하게 함으로써 독일군의 전력을 분산시키는 것이었다. 연합군은 패튼 장군을 사령관으로 하는 유령 군단을 만들어 영국 남동 켄트에 주둔하고 있는 것으로 위장함으로써 히틀러를 완벽하게 속였다.

 프랑스 레지스탕스의 역할도 지대한 것이었다. 수십 대의 기관차와 500여 곳의 철도를 차단했다. 독일군의 전선과 통신망을 무력화시키는 것도 그들의 몫이었다. 디데이 새벽 노르망디는 사실상 고립된 것이나 다름없었다.

 원래 작전 일자는 6월 5일이었지만 강풍이 몰아쳐 하루 연기되었다. 6일 새벽 1시 가장 먼저 투입된 것은 2만3000여 명의 공수부대였다. 독일군의 충원과 반격을 사전에 막기 위해 노르망디로 들어오는 거점을 장악하는 것이 그들의 임무였다. 그러나 거센 바람과 어둠 때문에 대부분의 대원들이 목표 지점에서 크게 벗어나 버렸다. 보병의 상륙에 앞서 독일군 기지에 대한 공중폭격이 이뤄졌다. 여명이 밝아오면서 해변 독일군 진지에 대한 함포사격도 전개되었지만 독일군의 강고한 방어진지를 무력화하지는 못했다.

 오마하(Omaha) 해변에 미군 보병부대가 상륙하면서 본격적인 전투가 벌어진 것은 6시30분이었다.

 영화 ‘라이언 일병 구하기’(1998) 초반 20분간의 전투 장면은 오마하 해변의 참혹한 전투 모습을 사실적이면서 충격적으로 보여준다.

 유타(Utah)해변의 상황은 좀 나았다. 독일군 진지도 부분적으로 파괴됐고, 각종 상륙용 탱크가 제시간에 도착해 앞세울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첫 번째 상륙 부대는 가장 큰 피해를 입기 마련이다. 남아 있는 독일군 진지에서 뿜어내는 기관총 세례로부터 결코 자유로울 수 없기 때문이다.

 처음 유타해변에 도착한 부대는 시어도어 루스벨트 주니어(1887-1944) 준장이 이끄는 미군 제4사단 소속 제8보병연대였다. 그는 장군 신분임에도 불구하고 선봉부대원과 함께 가장 먼저 해변에 내렸다. 미국의 역사화가 존 폴 스트레인(1955-현존)이 그린 ‘유타해변’(1975)은 바로 이 순간을 담고 있다.

 적의 총탄이 빗발치는 가운데도 시어도어 장군은 한 손으로 나무 지팡이를 짚고 다른 손으로는 45구경 콜트자동권총만 든 채 의연하게 걸어가고 있다. 독일군의 총탄에 부하들이 쓰러져가는 긴급한 상황임에도 그의 얼굴에서는 어떤 두려움이나 격정도 발견할 수 없다. 견고함을 넘어 초연해 보이기까지 한다. 다른 병사들은 왼쪽의 독일군을 향해 사격 중이지만, 오로지 시어도어 장군만은 정면을 주시하며 주변과 분리된다. 전반적으로 매우 사실적으로 그려졌지만 그만은 초월적인 모습으로 묘사됨으로써 영웅적 숭고함을 강조하고 있는 것이다.

 그는 미국의 26대 대통령 시어도어 루스벨트의 큰아들로서 굳이 전쟁에 참전할 필요가 없었다. 이미 1차 세계대전에 참전하여 무공을 세운 바 있고, 당시의 부상으로 인해 심한 관절염에 심장도 좋지 않은 상태였다. 이후 푸에르토리코와 필리핀 총독을 지낸 바 있다. 루스벨트 가문의 적자로서 사회적 명망을 누리기에 충분한 경력을 쌓았지만, 조국의 부름에 다시 응한 것이다.

 당시 그는 지팡이에 의지해야 할 정도로 몸이 불편한 상태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휘관으로서 솔선수범하는 모습을 보이기 위해 죽음을 무릅쓰고 최일선에 나선 것이다.

 “처음 전투에 뛰어든 부대의 행동방식이 이후 모든 부대의 행동방식을 규정하게 될 것”이라고 믿었던 시어도어 장군은 어떻게 싸워야 될지를 몸소 행동으로 보여줌으로써 병사들을 이끌었다.

 그는 독일군 총탄이 날아드는 상황에서도 적 진지공격을 진두지휘했을 뿐만 아니라 뒤엉켜 있는 차량들을 직접 교통 정리할 정도로 용감했다. 뒤이어 도착하는 부대원을 일일이 환영하며 그들의 용기를 북돋워 줬다. 그의 헌신적인 지휘에 힘입어 유타해변의 상륙작전은 오마하해변에 비해 훨씬 수월하게 전개됐다. 그의 부대는 다른 부대에 비해 사상자도 적었고 진격 속도도 빨랐다.

 안타깝게도 그는 상륙 후 한 달여 만에 심장마비로 사망하게 된다. 함께 노르망디 상륙작전에 참가한 아들 ?틴 대위와 오랜만에 긴 대화를 나눈 후 밤 10시쯤 갑작스러운 마비증세로 숨을 거둔 것이다. 그의 나이 56세였다. 일선에서 뛰기에는 힘든 나이였다.

 노르망디 상륙작전은 처음 계획한 대로 이루어지지는 않았지만 프랑스 서부해안에 교두보를 마련하고 안정적 보급기지를 구축할 수 있었다는 점에서 성공적인 작전으로 기록돼 있다. 이날 하루 연합군 사상자는 1만여 명에 달하는 것으로 알려져 얼마나 참혹한 전투가 전개되었는지 짐작하게 한다. 작전을 지휘한 아이젠하워 총사령관은 작전 실패에 대한 연설문까지 미리 써두었을 정도로 결과를 예측하기 힘든 전투였다.

 거시적으로 볼 때 인적·물적 자원이 뛰어난 연합군을 독일군이 막아내기는 사실상 어려웠을 것이다. 이미 동부전선에서 소련군에게 밀리고 있었기 때문에 상황을 역전시키는 것도 어려운 상황이었다. 그럼에도 이 작전이 예상보다 적은 사상자로서 이 정도의 성공을 거둘 수 있었던 것은 시어도어 장군과 같은 헌신적인 지휘관이 있었기 때문에 가능했던 일이다. 이런 군인, 이런 정치인이 있었기 때문에 미국은 2차 세계대전을 승리로 이끌 수 있었다. 세계의 패권국가로 우뚝 솟을 수 있었던 것도 이러한 인물이 있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다.

 중앙대 정치국제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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