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원근법 적용해 강하게 부각 … 미술사에 남을 르네상스 스타일
형식적인 伊 용병 전투 … 중세적 전투 방식+자본주의 계약 병존
어색·작위적인 그림 배치 … 화려해도 전사다운 투혼 보이지 않아
로마 공화정이 제국으로 우뚝 서는 데는 로마군단이 결정적인 역할을 담당했다. 이들은 사실상 직업군인이었고 군복무가 끝나면 로마시민의 자격이 주어졌다. 그러나 제국 말기에 이르자 한계를 드러내기 시작했다. 제국은 부패했고 광대한 영토는 너무 많은 군사비용을 요구했다. 제국의 대안은 값싼 게르만 용병을 고용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국가안보를 용병에 의존하면서 제국은 붕괴되기 시작했다. 결국 476년 서로마제국을 멸망시킨 것은 용병대장 오도아케르(Odoacer)였다.
14세기 이탈리아의 도시국가들이 부유해지면서 패권 다툼도 빈번해졌고 전문적 군대가 필요했다. 도시국가들의 해결책은 아이러니하게도 ‘용병(mercenary)’이었다. 직업군인인 용병을 고용해서 전쟁을 맡겼던 것이다. 15세기 말까지 이탈리아에서 치러진 전쟁은 대부분 용병에 의한 대리전쟁이었다. 그들은 특정 도시국가와 계약을 맺고 일정 기간 동안 국방을 책임졌다. 용병부대 지휘관을 계약자란 의미의 ‘콘도티에르(Condottier)’라 부른 것도 이런 까닭에서다.
용병대장 콘도티에르
1432년 피렌체 북부 산로마노(San Romano) 지역에서 벌어진 전투 역시 용병부대 간의 전투였다. 그해 5월 피렌체 사령관 톨렌티노(N. Tolentino)가 이끄는 용병부대는 밀라노와 가까운 북쪽 도시 루카(Lucca) 깊숙이 진격한 상태였다. 시에라(Sierra)와 밀라노는 이들을 막기 위해 더 많은 규모의 용병부대를 투입하게 된다. 6월 1일 이들 두 부대가 만난 곳은 초여름의 아침 햇살이 내리쬐는 산로마노 평원이었다. 언덕에 주둔하고 있던 용병대장 톨렌티노는 수적으로 우세한 적을 발견하고 곧바로 공격을 서두르게 된다. 적극적인 선제공격을 감행함으로써 수적 열세의 불리함을 상쇄할 수 있기 때문이다.
파울로 우첼로(Paulo Uccello, 1397~1475)의 작품 ‘산로마노(San Romano) 전투’는 톨렌티노 부대가 상대방을 공격하고 있는 장면을 생동감 넘치게 묘사하고 있다. 그림 정면에 백마를 타고 공격을 지휘하고 있는 이가 톨렌티노다. 앞발을 차올리며 에너지를 발산하고 있는 백마는 주변의 어두운 색깔과 극적 대비를 이루면서 지휘관의 위상을 드높이고 있다. 기하학적 문양의 독특한 모자를 쓴 그는 차가운 은빛 철갑에 얼굴을 숨긴 다른 기사들과 달리 인간적 풍모를 드러내며 그림의 중심을 잡고 있다.
용병부대의 형식적 전투 모습
당시 전투는 철제 갑옷을 입은 기사들 간의 마창경기와 비슷하게 이뤄졌다. 말의 가속력을 이용해 달려들면서 긴 창으로 상대의 가슴이나 머리를 가격해 말에서 떨어뜨리는 것으로 승패가 가름됐다. 창이 부서지면 도끼나 칼을 휘두르며 싸웠다.
그러나 이들의 전투는 그들의 화려한 복장만큼이나 형식적이었다. 사생결단의 전투와는 거리가 멀었다. 생명이 위험한 격렬한 전투는 서로 피했다. 상대를 죽이는 것보다 생포해 몸값을 받아내는 것이 유리했다. 그렇다보니 전투 결과도 불확실했다. 피렌체인들은 산로마노 전투에서 자신들이 승리했다고 주장하지만 시에라 연대기에서는 자신이 이겼다고 기록해 뒀다.
이탈리아 용병의 전투 모습은 지극히 중세적이지만 그 아래 깔려있는 사고는 자본주의적이다. 교역과 은행업 등 초기 자본주의 발전을 주도했던 이탈리아 도시국가에서 용병 제도가 활성화된 것은 우연이 아니다.
이 시기 이탈리아에서 르네상스(Renaissance)가 발생한 것도 이와 무관하지 않다. 신의 관점에서 사물을 인식하고자 했던 것이 중세적 시각이라면 인간의 눈으로 세상을 포착하고자 했던 것이 르네상스다. 자본주의 역시 인간의 시선과 욕망으로 세상을 이해한다. 그렇기 때문에 자본주의와 르네상스는 근대적 사유의 토대를 이루는 것이다. 중세에서 근대로 넘어오는 전환기가 르네상스라면 여기에는 중세적 양식과 함께 근대적 특성이 병존할 수밖에 없다. 특히 르네상스 초기 작품에는 이러한 경향이 두드러진다. 중세적 스타일에도 불구하고 자본주의적 본질을 가졌던 이탈리아 용병과 마찬가지로 르네상스 초기 작품에는 근대적 구도로 사물을 표현하고자 했으면서도 중세 말기의 양식적 특성 또한 강하게 남아 있음을 발견할 수 있다.
우첼로의 ‘산로마노 전투’는 그런 점에서 르네상스 초기 회화의 대표적 작품이다. 중세가 끝나가던 14세기 유럽 화단에는 매우 화려하고 정교한 자연적 묘사가 유행했다. 환상적인 천상의 세계를 보여주고자 했던 고딕 시대의 열정은 더욱 심화돼 금박의 사치스러운 패턴 양식과 섬세하고 정교한 세부 묘사로 발전했다. 흔히 ‘국제고딕양식’이라 불리는 이러한 특징은 우첼로의 말에서 가장 잘 드러난다. 황금빛 패턴으로 장식한 말 목걸이(collar)와 가슴걸이는 말들의 역동적인 움직임과 어울리며 화려함을 배가시키고 있다. 기사들의 은빛 철갑 역시 매우 정교하게 묘사돼 마치 백과사전을 펴놓은 듯하다.
이 작품이 미술사에 빛나는 것은 르네상스 양식의 가장 중요한 특징인 직선 원근법(linear perspective)을 착실히 적용했기 때문이다. 화가는 그림에 공간적 입체감을 부여하기 위해 고도로 계산된 원근법에 따라 인물과 소품을 배치했다. 거리에 따라 인물의 크기를 달리했고 보이는 각도에 따라 넓거나 좁게 묘사했다. 근경과 원경은 초목으로 완전히 구분함으로써 전면의 전투장면에서 보다 강한 현장감을 느끼게 된다. 특히 바닥에 떨어진 부서진 창들을 하나의 소실점(말머리)으로 향하게 배치해 공간적 입체감을 더욱 뚜렷이 느끼도록 그렸다.
3차원 동영상의 충격
사물을 입체적으로 묘사한다는 것은 ‘우리가 보는’대로 그린다는 것을 의미한다. 우리는 두 눈으로 공간의 깊이를 지각할 수 있기 때문에 사물을 입체적으로 인식할 수 있다. 평면회화에 익숙했던 중세인들이 이 작품을 처음 보았을 때 받았을 충격을 상상하기가 쉽지 않다. 길이 3m의 장대한 그림에 담겨 있는 입체적 형상은 마치 눈앞에서 움직이는 듯이 생생했을 것이다. 이는 처음 3차원 동영상을 본 사람들이 느끼게 되는 시각적 충격과 비슷하다고 할 수 있다.
물론 바닥에 쓰러진 기사의 왜소함이나 경직되고 작위적인 창들의 배치, 그리고 기사들의 어색한 동작에서 알 수 있듯이 미켈란젤로나 라파엘로 수준의 자연스러움까지는 도달하지 못했다. 게다가 메디치가로 그림을 옮겨 다는 과정에서 아치형의 하늘 부분이 사라짐으로써 다소 답답한 느낌 또한 받게 된다.
그러나 바로 그러한 어색함과 답답함이 15세기 이탈리아 용병의 실체가 아닌가 한다. 그들은 군인이지만 군인답지 못했다. 겉모습만 화려했지 전사다운 투혼이 없었다. 돈벌이에 눈이 먼 장사치와 크게 다르지 않았다. 전투는 의례적이었고 소극적이었다. 화끈한 전투는 찾아보기 어려웠고 병력 손실을 막는 데 급급했다. 용병은 겉으로는 화려하고 웅장했지만 기실 전투력을 발휘할 수 없는 부대였다. 르네상스를 주도했던 이탈리아 도시국가들이 16세기 들어 프랑스와 스페인에 휘둘릴 수밖에 없었던 이유도 여기에 있다.
중앙대 정치국제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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