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나로의 ‘전함을 옮기는메흐메드 2세’
메흐메드 2세, 전함 80여 척 ‘육로 수송 작전’ 주효
난공불락 비잔틴 제국 무너뜨리고 근대 변화 주도
창의적 전술 사실적 표현…‘산 위로 가는 배’ 생생
인간 활동 가운데 전쟁만큼 창의적 사고가 중요한 영역도 없다. 청동기와 철기 문명 자체가 무기 개발의 결과이며 현대 문명의 총아인 컴퓨터와 인터넷 자체가 군사적 목적을 위해 발명됐다. 더 파괴적이며 효율적인 신무기를 개발하려는 인간의 의지와 노력이 인류의 기술 발전을 이끈 동력이 됐던 것이다.
창의성은 단순히 새로운 기술에만 적용되는 것이 아니다. 통념을 넘어서는 사유의 유연함에서 더욱 빛난다. 그림에서 보는 것처럼 ‘배가 산으로 올라가고 있다.’ 물길에서만 배가 움직인다는 통념에 젖어 있는 사람에게는 이러한 모습 자체가 충격적이다.
물고기가 뭍에 있는 것만큼이나 부자연스러워 보인다. 그러나 따지고 보면 장비수송에 불과하다. 전함을 필요한 곳에 투입하기 위해 수송하고 있는 것이다. 중간에 공격받을 우려만 없다면 그리 어려운 작전도 아니다.
● 하룻밤에 끝난 수송작전
1453년 4월 22일 비잔틴 제국의 콘스탄티노플(Constantinople·지금의 이스탄불)을 공격하고 있던 오스만튀르크 제국의 메흐메드 2세(Mehmed II)는 황금뿔(Golden Horn) 만으로 전함을 투입하기 위해 육로를 통한 수송 작전을 단행했다. 당시 황금뿔 만은 굵은 쇠사슬로 차단돼 있었기 때문에 전함이 들어갈 수 없었다.
몇 차례 해전을 시도했지만 번번이 실패하자 전함 80여 척을 육로로 옮기는 기막힌 작전을 전개한 것이다. 이동거리가 2㎞나 됐지만 윤활유를 잔뜩 바른 통나무 위로 배를 굴려 하룻밤 만에 수송작전을 완벽하게 끝낸 것이다.
콘스탄티노플은 동쪽 바다로 돌출한 삼각형 도시로 남북 양면이 바다로 둘러싸이고 서쪽 4㎞ 정도만 육지와 연결돼 있었다. 도시 전체가 견고한 성채와 해자로 둘러싸여 있었기 때문에 적은 병력으로도 탁월한 방어력을 행사할 수 있는 유럽 최고의 방어도시였다. 통상적인 방법으로는 공략이 어려운 상황이었다.
오스만제국의 궁정화가로 활약했던 이탈리아 출신의 파우스토 조나로(Fausto Zonaro·1854~1929)가 그린 이 작품은 메흐메드 2세의 지휘 아래 전함을 옮기고 있는 오스만군의 모습을 사실적으로 보여준다. 오른쪽 대각선 길을 따라 올라가는 구도가 관람자의 시선을 이끌며 전반적으로 상승 분위기를 느끼게 한다.
오른편 하단에 질서 있게 도열한 오스만군은 21세의 젊은 통치자 메흐메드 2세의 안정적이고 자신감 넘치는 모습과 결합해 위대한 역사의 한 장면을 재현하고 있다. 1900년대 초 민족주의적 열정이 지배했던 시대의 정치적 분위기를 반영하고 있는 것이다.
작전은 마치 대낮에 이뤄진 것처럼 보이지만 실은 야밤에 추진됐다. 언덕 너머에 제노바인들이 관할하는 갈라타(Galata) 요새가 있었기 때문에 그들의 공격을 피할 수 있는 심야를 택한 것이다. 왼쪽 멀리 보이는 것이 콘스탄티노플이다. 희미하게나마 흰색 돔이 빛나는 하기아 소피아(Hagia Sophia) 성당을 발견할 수 있다. 콘스탄티노플과 갈라타 해안 사이로 좁고 길게 물이 흐르고 있는 곳이 황금뿔 만이다.
● 콘스탄티노플 봉쇄
오스만군이 콘스탄티노플 봉쇄를 시작한 것은 3주 전인 4월 3일이었다. 5만 명에서 8만 명으로 추정되는 보병이 대륙과 연결된 주요 도로를 봉쇄했고 150여 척의 각종 전함으로 구성된 함대가 바닷길을 막고 약한 곳을 노리고 있었다.
오스만의 비밀병기는 270㎏의 둥근 돌을 성채로 날려 보낼 수 있는, 길이가 무려 8m나 되는 대포였다. 오르반(Orban)이란 헝가리인이 만든 ‘바실리카’란 이름의 이 대포는 장전에만 3시간이 소요되고 정확도도 형편없었지만 한번 맞으면 요새의 한 축이 무너져 내릴 정도로 엄청난 위력을 자랑했다.
이에 비해 비잔틴제국의 전력은 상대적으로 열악했다. 전투에 참여할 수 있는 병사는 7000명에 불과했고 해안을 방어할 연합함대도 26척에 불과했다. 이탈리아나 유럽의 지원군도 기대하기 어려운 상황이었다. 황제 콘스탄틴 11세(Constantine IX)는 로마 교황에게 도움을 요청했지만 유럽 제국들은 지원군을 보낼 형편이 못됐다. 오로지 도시방어전 전문가 지오바니 쥐스티니아니(G. Giustiniani) 장군과 함께 온 700여 명의 자원군과 마침 황금뿔 만에 있던 몇 척의 베네치아 함선들만이 추가적인 전력이었다.
메흐메드 2세가 전함을 육로로 수송, 황금뿔 만에 배치한 것은 콘스탄티노플의 전력을 분산시키기 위해서였다.
황금뿔 만에 오스만 전함이 등장하면서 서쪽 성채를 지키던 일부 병력을 북쪽 해안에 배치하지 않을 수 없었다. 콘스탄틴 11세는 자신이 서쪽 성채의 중심을 맡고 쥐스티니아니를 오른쪽, 그리고 다른 장군들을 왼쪽에 배치해 방어에 나섰다.
오스만의 공격은 거대한 대포 사격으로 시작됐다. 전술적 효과는 크지 않았지만 그 자체로 위협적이었다. 수차례 공성전이 전개됐지만 견고한 방어벽을 뚫지는 못했다. 지상의 전투만큼이나 지하의 땅굴에서도 치열한 전투가 벌어졌다. ‘그리스의 불(Greek fire)’로 불리는 화염방사기 같은 무기가 사용되기도 했다.
● 패기만만한 21세 왕 전면공격
몇 차례 항복 제안이 거절되자 메흐메드 2세는 29일 자정을 기해 전면 공격을 감행했다. 최종 작전회의에서 일부의 반대가 있었지만, 21살의 패기만만한 왕은 전면공격의 승부수를 던진 것이다. 우선 거대한 대포 공격과 함께 오스만의 기독교부대와 비정규 경보병(asaps) 부대를 투입했다. 붕괴된 북쪽 성벽으로는 아나톨리아 부대가 달려들었다. 위태로운 방어벽이 겨우 지탱되고 있었다.
그러나 마지막 정예 예니체리(Janissary) 부대가 성벽을 공격하자 방어선은 무너지기 시작했다. 용맹한 쥐스티니아니 장군이 부상으로 후송되자 그의 병력도 후퇴했기 때문이다. 콘스탄틴 황제가 분투하며 중앙 전선을 지켜내고 있었지만 좌우로 달려드는 오스만군을 막기에는 역부족이었다.
● 르네상스와 대항해시대 열어
성문 한 곳에서 오스만의 깃발이 휘날리기 시작하자 방어벽은 급격히 붕괴됐다.
일부 그리스와 이탈리아 병사들은 항구로 달아나기 시작했고, 길이 막힌 병사들은 바다로 뛰어들었다. 콘스탄틴 황제도 최후의 공격을 감행하다 목숨을 잃었다.
29일 아침 콘스탄티노플이 함락되면서 참혹하기 이를 데 없는 약탈과 살육이 자행됐다. 수천 명의 시민이 죽임을 당했고 절규와 비명, 검붉은 피가 도시를 가득 채웠다. 단 3일의 통상적인 약탈 기간 동안 천년의 문명도시 콘스탄티노플이 거의 폐허로 변해버렸다. 메흐메드 2세가 이 광경을 보고 눈물을 흘릴 정도였다.
콘스탄티노플의 함락으로 1200년을 지탱해온 비잔틴제국은 역사에서 사라져 버렸다. 이 전투가 아니었더라도 미래를 기대하기 어려울 정도로 쇠락한 상태였다. 이때를 전후해 많은 그리스 학자들은 이탈리아로 이주해 이탈리아 르네상스의 중요한 계기를 만들었다.
오스만의 팽창으로 유럽인들은 더 안전하고 수익성 높은 무역로를 찾기 위해 바다로 나섰다. 40년 뒤인 1492년 콜럼버스가 발견한 것이 아메리카대륙이었다. 식민지 경쟁의 새로운 시대가 열린 것이다.
르네상스가 근대의 시작이라면 콘스탄티노플의 함락은 중세의 종식을 의미한다. 메흐메드 2세는 배를 산으로 보내는 창의적인 사유를 통해 중세에서 근대로 역사적 변화를 주도할 수 있었던 것이다.
역사변화는 전통적 사유에 구속되지 않는 창조적 인물에 의해 개척되고 있다는 것을 보여준 사례라 할 수 있다.
중앙대 정치국제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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