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획 완결 이야기로 풀어 쓴 북한사

5·16 정보 파악 늦은 北, 이틀 동안 ‘오락가락’

입력 2015. 05. 17   13:09
0 댓글

<46> 5·16과 북한


美 사주로 판단→일시적 기대·지지검토→우려 표명·비난 등 인식 급변

안보 위기 느낀 김일성 중·소와 동맹조약…정책변화·대남 접촉 시도도

 

 


 

 

 ■ 북한정치에서 남한 요인

 비록 정도의 차이는 있겠지만, 남북이 분단된 상황에서 한쪽의 국내정치는 상대방에게 ‘필연적’으로 영향을 미쳐 왔다. 이른바 한국정치에서 북한 요인, 또는 북한정치에서 남한 요인이다.

 휴전 이후 북한정치가 남한에 영향을 미친 사례로 대표적인 것이 김일성 부자의 사망과 김정은의 등장이라 할 수 있다. 그렇다면 반대로 한국정치사의 주요 사건 중 북한정치에 영향을 미친 것으로는 어떤 것이 있을까? 여러 사건들이 있겠지만 그중에서 빼놓을 수 없는 것이 1961년 일어났던 5·16일 것이다. 이 사건은 한국 현대사의 중요한 분기점이었던 만큼 북한에도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

 그러나 5·16 당시 북한의 반응과 이 사건이 북한에 미친 영향에 대해서는 사실 잘 알려진 것이 없었다. 일부 고위 탈북자의 증언이 있는 정도였고, 북한 문헌으로 확인된 바는 없었다. 그러나 2000년대 후반 들어서 중국의 문서기록보관소인 당안관 자료가 공개되면서 사건 당시 북·중 간에 오고간 외교전문과 중국대사관에서 파악한 북한 동향이 알려지기 시작했다.

 과연 5·16 당시 북한의 반응은 어떠했을까? 북한은 남측 상황을 제대로 파악하고 있었을까? 5·16이 북한에 미친 영향은 무엇일까? 오늘은 이에 대해 살펴보자.



 ■ 5·16에 대한 북한의 인식과 대응

 북한은 5·16 발생 이전부터 남한의 정치·사회적 혼란을 예의 주시하고 있었다. 1961년 3월 31일자 북한 주재 중국대사관이 본국에 타전한 전문에는 당시 남한의 장면 정부에 대해 대규모 대중투쟁이 발생하더라도 전복될 정도는 아니라고 평가하고 있다. 하지만 만일 대중투쟁이 격화돼 군부가 진압 과정에 투입된다면 일부 군부에 의한 자발적 반란 가능성도 있다는 평가를 내리고 있다.

 그러나 막상 1961년 5월 16일 새벽, 5·16이 발발하자 북한은 이에 대해 제대로 된 평가를 내리지 못하고 있었다. 북한이 직면한 가장 큰 문제는 ‘정보 부족’이었다. 당시 김일성은 이 같은 상황에 대해 대남부서 관계자들을 크게 질책하고, 모든 수단을 동원해 대남 정보를 수집하라고 지시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정보 부족 상황에서 북한의 5·16에 대한 인식과 대응은 이틀 동안 세 차례나 변하게 된다. 이 당시 북한은 5·16에 대해 미국의 사주→일시적 기대와 지지 검토→우려 표명 및 비난 순으로 변화된 인식을 보이고 있다.

 북한은 처음에는 5·16을 미국의 사주에 의한 것이라 판단했다. 당시 한국군의 작전통제권을 유엔군사령관이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한국군이 임의로 ‘군사정변’을 일으키기는 어려울 것이라는 데 근거한 것이다. 그러나 이때까지는 정보 부족으로 정확한 평가를 내릴 수 없었고, 대외 반응도 자제하는 편이었다. 사건 다음 날인 5월 17일 자 노동신문 1면도 이 사건에 대해 ‘군사정변에 의해 장면 정권 전복’이라는 간략한 사실보도만을 내보냈다.

 그러나 이후 북한의 평가는 ‘일시적 기대’로 변화했다. 이것은 5월 16일 오후 6시30분, 당시 북한 부수상 김일이 북한 주재 중국대사를 만나 사태에 대해 논의한 자리에서 언급된다. 김일은 5·16이 미국의 사주가 아닌 군부 내 ‘진보세력’에 의해 독자적으로 일어났을 가능성을 언급하며, 북한은 이를 지지하는 성명을 준비하고 있다고 했다.

 그러나 북한의 이 같은 생각은 5월 17일 노동당 중앙청사에서 개최된 긴급 정치위원회를 통해 ‘우려’로 또 한번 변화된다. 이때까지도 북한은 정확한 정보 수집이 이뤄지지 않은 상태였지만 5·16이 미국의 사주에 의해 일어난 것이 아닐 가능성이 90%라고 평가한다. 그리고 자신들이 생각한 군대 내 ‘진보세력’이 ‘친미’ ‘반공’을 강조한다는 것을 근거로 본격적인 ‘경계’에 돌입하게 된다.

 5월 18일 개최된 당 중앙상임위원회에서는 이 평가를 더욱 확고히 한다. 5·16 주도세력에 대한 평가가 군부 내 ‘진보세력’에서 극심한 ‘반동세력’으로 완전히 달라졌다. 또 이들이 ‘반공’을 기본방침으로 내걸자 이때부터 비난 선전을 전개한다. 5월 20일과 24일에는 군사정권 반대와 주한미군 철수를 주장하는 군중대회를 개최하기에 이른다.



 ■ 5·16 이후 북한의 정책변화

 김일성은 ‘반공’을 강조하는 군사정권이 남측에 등장한 것을 큰 위협으로 인식했다. 헝가리 외교문서에 따르면 김일성은 당시 남한 ‘군부세력들’이 국내 문제의 돌파구를 찾아 북침을 개시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었고, 이에 대비해 군에 방심하지 말고 경계를 철저히 서라는 명령을 하달하기도 했다. 김일성의 위기인식은 이후 세 가지 정책 변화로 나타난다.

 첫째, 중국과 소련을 찾아가 ‘동맹조약’을 체결한다. 이는 안전보장을 강화하기 위한 중요한 조치였다. 김일성은 1961년 6월 29일 평양을 떠나 7월 6일에는 소련과, 이어서 5일 뒤인 7월 11일에는 중국과 ‘우호협력 및 상호원조조약’을 체결한다.

 이 조약들은 정치·군사·경제·문화 등 여러 내용을 담고 있지만 그 핵심은 ‘자동 군사개입 조항’을 포함한 것이었다. 사실 북한은 중·소와의 동맹조약 체결을 이전부터 논의하고 있었지만 별 진척은 없는 상태였다. 그러던 중 발생한 5·16은 북한이 중·소와 조약을 체결하는 데 중요한 동인으로 작용하게 된 것이다.

 둘째, 국내정책 변화를 시도한다. 정책 변화는 1961년 5월 18일 개최된 당 중앙상임위원회에서부터 논의되기 시작했다. 이 회의에서는 처음으로 ‘국방·경제 병진노선’이 논의된다. 이 노선은 1962년 12월 당 중앙위원회 제4기 5차 전원회의에서 정식 채택되지만, 이미 5·16 직후 심각하게 논의되고 있었던 것이다.

 또 1961년부터 시행하기로 했던 이른바 7개년 경제계획(1961~67)의 선포도 연기한다. 아예 시작 시기를 2년 늦춰 1963년부터 착수하기로 결정한다. 북한으로선 국방 부문에 대한 집중투자를 위해서 불가피한 조치였을 것이다. 1961년 9월 개최된 제4차 당 대회에서 본래 계획대로 1961년부터 시작한다고 선포하지만, 실패는 예견된 것이었다.

   결국 이 계획은 당초 목표했던 1967년에 끝내지 못하고 3년을 연장해 1970년에야 겨우 완료를 선포할 정도로 북한경제에 큰 부담을 지우게 된다.

 셋째, 대남 접촉을 시도한다. 김일성은 사건 직후 모든 대남 정보망을 총동원해 정세 파악에 열을 올렸다. 사건의 배경, 주도세력과 그들의 성향, 미국과의 관계 등을 파악해 새로운 대남정책을 추진하기 위해서였다.

 그리고 1961년 7월 중순 정치위원회를 개최하고, 그때까지 수집된 자료를 토대로 새로운 대남정책 수립에 들어갔다. 이 자리에서 5·16 주도세력의 신상을 확인하고, 이들과 접촉하기 위해 8월에 황태성을 남파한다. 황태성은 경북 상주에서 태어나 조선공산당에서 활동하다 월북했던 자로서, 북한에서는 무역성 부상 등을 역임했다. 그러나 남파된 황태성은 1961년 12월 체포돼 1963년 12월 14일 간첩죄로 사형에 처해진다.

 이렇듯 5·16은 한국 국내정치뿐만 아니라 북한의 내부정치와 남북관계에까지 영향을 미친 ‘중대한 사건’이었다. 그리고 분단 상황이 지속되는 한 일방의 내부문제가 상대방의 국내정치에 영향을 미치는 양상은 앞으로도 계속될 수밖에 없을 것이다.

이신재 국방부 군사편찬연구소 연구원·북한학 박사

< 저작권자 ⓒ 국방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
댓글 0

오늘의 뉴스

Hot Photo News

많이 본 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