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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정한 용기·투혼 담은 사실적 현장감 ‘생생’

입력 2015. 05. 12   18: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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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2> 달마우의 ‘로크루아, 마지막 테르시오’(2011)


전장 참혹함과 전사의 결의, 극사실주의 기법으로 묘사

절대강자 스페인 테르시오 보병의 퇴조 알린 역사적 전투

적장을 감동시킨 투혼… 명예로운 패배의 결연함 돋보여

 

 

 

 


 

 

 전쟁에서 이기면 좋겠지만 늘 그럴 수는 없다. 전투에 이기고 지는 것은 늘 있는 일(勝敗兵家之常事). 패배 또한 불가피하다. 문제는 어떻게 지느냐에 있다. 패배 자체보다 패배의 방식이 중요한 것은 군의 ‘명예’와 직결되기 때문이다. 승리를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것이 전쟁의 본질이고, 군인에게 가장 불명예스러운 일이 항복이지만 ‘명예스러운 항복’의 사례도 발견된다는 것은 경이로운 일이다.

 스페인의 현대 화가 달마우(Augusto Ferrer Dalmau·1964~)의 작품 ‘로크루아, 마지막 테르시오(Rocroi, the last tercio·2011)’는 1643년 5월 19일 벌어진 로크루아(Rocroi) 전투의 한 장면을 극사실주의(hyper-realism) 방식으로 묘사하고 있다. 여러 차례 전투가 치러진 어느 시점, 한 무리의 스페인 병사들이 5m가 넘는 긴 바늘창(pike)을 치켜들고 전방을 주시하고 있다. 그림 전면에 널브러져 있는 말과 군인들의 참혹한 모습에서 얼마나 치열한 전투가 벌어졌는지 알 수 있다. 지휘관을 포함한 대부분의 병사들도 이미 수차례 전투를 치르면서 크고 작은 부상으로 피투성이다. 그럼에도 그들의 전의는 전혀 수그러들지 않고 있다. 오히려 그 어떤 공격도 결단코 막아내리라는 불퇴전의 결의가 그들의 단호한 얼굴에 짙게 묻어난다. 사진보다 더 정교한 묘사는 전장의 참혹함과 함께 전사의 굳은 결의를 섬뜩하리만큼 사실적으로 전해준다.

 

 ● 30년 종교전쟁과 로크루아 전투

 당시 유럽은 30년 종교전쟁(1618~1648) 중이었다. 기독교 구교(가톨릭)와 신교(개신교) 간의 대립으로 시작된 전쟁은 유럽 국가 간의 패권투쟁으로 발전했다. 스페인과 신성로마제국(지금의 독일과 오스트리아)은 같은 합스부르크 가문으로 가톨릭의 강력한 후원세력이었다. 가톨릭 국가였던 프랑스가 개신교인 네덜란드와 스웨덴을 후원한 것은 스페인 세력이 프랑스로 확대되는 것을 막기 위해서였다. 스페인은 이탈리아와 플랑드르(벨기에)를 기반으로 프랑스를 압박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전쟁 초반 주도권은 스페인이 쥐고 있었다. 화승총병과 바늘창병을 유기적으로 결합한 밀집보병대형 테르시오(tercio)로 보병전투의 절대 강자로 군림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다. 테르시오 전법은 유럽 각국으로 전파됐지만 전투력에서 스페인 군대에 대적하기에는 역부족이었다.

 스페인의 전통적인 테르시오는 500에서 1000여 명의 바늘창 밀집대형을 중심으로 구축하되 양 측면에 1200명의 화승총병을 배치해 적의 측면 공격을 막고 네 모서리에도 기동력이 뛰어난 1200명의 화승총 부대를 운용해 적의 공격에 효과적으로 대응할 수 있도록 했다.

 화승총 전면과 측면에는 사정거리가 긴 머스킷총병들이 배치돼 선제공격을 담당했다. 잘 지휘될 경우 움직이는 성채처럼 견고한 방어력을 자랑했으며 일단 근접전이 벌어질 경우 그 어떤 부대도 5m가 넘는 거리에서 날아드는 바늘창의 무시무시한 공격에서 자유로울 수 없었다.

 

 ● 스페인 테르시오와 군사혁신

 그러나 세계 최강의 테르시오 군대도 새로운 전술 앞에 흔들리기 시작했다. 구스타프 아돌프(Gustav Adoph II) 스웨덴 왕은 유럽에서 처음으로 징병을 통한 상비군을 운용했다. 전투단위를 대대(battalion) 수준으로 경량화해 기동성을 강화하고 선회공격에 주로 사용됐던 기병에게 돌파공격 임무를 부여해 기병의 전술적 효과를 극대화했다. 각 연대(regiment)에 독자적으로 운용할 수 있는 12문의 소형 대포를 배치해 전술적 자율성과 공격성을 대폭 강화한 것도 혁신적인 일이었다. 머스킷총병을 확대하고 3단 일제사격 전술을 개발한 것도 전투력 향상에 큰 도움이 됐다. 소위 17세기 ‘군사혁신(military revolution)’이라 일컬어지는 일들이 한꺼번에 전개된 것이다.

 1630년대 이후 브라이텐펠트 전투(1631)에서 랜 전투(1648)에 이르기까지 스웨덴과 프랑스 군이 거둔 일련의 승리는 이러한 군사혁신의 결과라 할 수 있다. 머스킷총이나 대포의 개선도 중요한 요인으로 작용했지만 역시 중요한 것은 이러한 변화를 군사혁신에 도입하고자 하는 의지와 노력이었다. 스페인 지휘관들도 전장의 환경변화에 적응하기 위해 노력했지만 전통의 테르시오 전법을 버리지 못했다. 혁신은 전통에 대한 근본적 도전 없이는 불가능하기 때문에 실패한 것이다.

 이런 점에서 그림의 소재가 된 로크루아 전투는 테르시오 전술의 저력과 한계를 동시에 보여준 사건이었다. 약 2만7000여 명의 스페인-신성로마제국 연합군이 프랑스 북부 작은 성채마을 로크루아를 포위하자 프랑스 지휘관 앙겐(Enghien) 공작은 2만3000여 군대를 급히 그곳으로 진군시켰다. 로크루아는 울창한 삼림지대로 둘러싸여 있었지만 다행히 남쪽에서 들어가는 좁은 능선 길 하나가 열려 있었다. 그 길을 따라 이동한 프랑스 군은 마을 남쪽 능선 아래에 부대를 주둔시켰다. 작은 하천 하나를 사이에 두고 두 군대는 하룻밤을 보냈다.

 전투는 5월 19일 아침 6시에 시작됐다. 양 군대는 중앙의 바늘창 보병부대를 중심으로 양 측면에 기병부대를 배치했다. 후위에도 예비대를 포진해 한쪽이 밀릴 경우 언제든지 투입할 태세를 갖췄다. 전투가 시작되고 보병부대 간에 근접전이 치열하게 진행되는 사이 21살의 앙겐 공작이 지휘하는 프랑스 우익 기병의 공격이 시작됐다. 스페인의 좌측을 맡았던 플랑드르 기병이 밀리면서 스페인 보병의 왼쪽 측면이 노출되는 상황이 발생했다. 이 틈을 타 프랑스 기병이 스페인의 우익 측면과 후미를 공격하자 여기에 배치된 독일과 이탈리아계 보병부대의 전열이 급속히 붕괴되면서 전세는 프랑스 쪽으로 기울게 된다.

 전투가 시작된 지 2시간도 채 지나지 않아 전장을 지키고 있는 스페인 군은 수백 명 규모로 줄어든 2개의 테르시오밖에 없었다. 나머지는 모두 붕괴됐거나 도망간 상황. 그들은 세 차례 더 기병공격을 막아냈고 프랑스의 일방적인 대포 공격에도 흔들리지 않고 전열을 지켰다.

 

 ● 패배의 진정한 방식

 그림은 프랑스 기병의 공격을 기다리고 있는 스페인 마지막 생존 전사들의 모습을 담고 있다. 4시간이나 계속된 격렬한 전투로 많은 전우들이 죽었고 전세 또한 바꿀 수 없는 상황이지만 끝내 굴복하지 않고 결연한 의지로 전선을 지키고 있는 테르시오 병사들의 모습을 매우 사실적으로 표현했다. 옷가지 하나, 병기 하나에도 정성을 다한 그림이라는 것을 느낄 수 있다. 철저한 고증으로 로크루아 전투의 극적인 장면을 재현한 것이다.

 패배에 직면하고도 용감하고 당당한 자세를 잃지 않는 스페인 군인들의 얼굴에서는 적에 대한 강한 살의마저 느껴진다. 그림 전체를 지배하는 어둡고 무거운 톤은 패배의 현실을 직감하게 하지만 결의에 찬 투혼은 여전히 견고하다. 100년 넘게 지켜온 세계 최강 군대로서의 자부심과 명예를 단호한 결의로 지켜내고 있는 것이다. 진정한 용기(courage)는 패배가 불가피한 상황에서도 전의를 잃지 않는 것이다. 그런 점에서 단순한 용감함(bravery)과 구분된다. 스페인 테르시오가 절대강자로 군림할 수 있었던 것도 이러한 용기와 투혼이 있었기 때문에 가능했을 것이다. 그들의 투혼에 감동한 프랑스 지휘관 앙겐은 그들이 자신들의 깃발과 무기를 갖고 후퇴할 수 있도록 허용하는 관대함을 베풀었다.

 전사에서는 이 전투를 기점으로 스페인 테르시오가 누려왔던 군사적 우위가 사라지기 시작했다고 적고 있다. 이는 스페인 제국의 퇴조를 의미한다. 스페인의 몰락은 현실의 우위에 너무 안주했기 때문이다. 변혁하지 않는 군대는 결코 승리할 수 없다는 것을 이처럼 극적으로 보여주는 사례도 많지 않을 것이다.

  최영진 중앙대 정치국제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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