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획 완결 전쟁과미술

강렬한 색채·비현실적 구도…중세 분위기 물씬

입력 2015. 05. 05   15: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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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1> 로세티의 '잔 다르크' (1882)


백년전쟁서 절체절명 위기 맞은 프랑스 왕실의 구세주

신의 계시 받은 처녀의 돌격에 감동한 병사들 죽음 불사‘

라파엘전파’ 화풍의 잔 다르크, 전사 아닌 관능적 느낌

 


 


 

 

 “세상이 지금보다 500년 더 젊었을 때, 모든 사건들은 지금보다 훨씬 더 선명한 윤곽을 갖고 있었다. 모든 경험은 어린아이의 마음에 새겨지는 슬픔과 즐거움처럼 직접적이면서도 절대적인 성격을 띠었다.”(하위징아)

 ‘중세의 가을’이 깊어가던 15세기 유럽은 도시와 시장이라는 근대적 형식이 일반화됐지만 유럽인들의 삶을 지배했던 것은 기독교적 세계관이었다. 이런 세계에서는 전쟁 역시 신의 개입으로 완성된다. 성경에 나와 있는 많은 전투가 그렇듯이 신의 계시와 도움으로 그 운명이 결정된다. 승리가 신의 축복이라면 패배는 신의 응징이며 감당해야 할 고난이다.



 ●백년전쟁과 오를레앙 봉쇄

 이런 점에서 가장 중세적 전투는 잔 다르크(Jeanne d’Arc·1412~1431)가 활약한 ‘오를레앙 봉쇄전’이다. 당시 영국과 프랑스는 백년전쟁(1337~1453) 중이었고, 전쟁은 후반부로 치닫고 있었다. 다소 잠잠했던 전쟁이 1415년 다시 재연된 것은 프랑스 내분과 연관돼 있다. 샤를 6세가 제대로 통치력을 발휘하지 못하는 사이에 부르고뉴(Burgundy)와 아르마냑(Armagnac) 세력의 분쟁은 군사적으로 대립할 정도의 내란으로 발전한 상태였고, 새로 등극한 영국의 헨리 5세는 이를 이용할 심산이었다. 프랑스 원정에 나선 헨리 5세는 그 유명한 아쟁코트(Agincourt) 전투에서 결정적 승리를 거두면서 프랑스 왕위계승권을 가져오게 된다. 그는 프랑스 공주와 결혼하고 샤를 6세가 사망할 경우 자신의 후예가 왕위를 승계하는 것을 약속받았던 것이다.

 1424년 헨리 5세와 샤를 6세가 모두 죽었지만 전쟁은 계속됐다. 프랑스 왕위계승권자인 샤를 왕세자(Dauphin Charles)를 비롯한 왕실 지지 세력이 건재했기 때문이다. 1428년 여름 살리스버리의 2000여 궁사를 비롯해 1만여 증원군을 보충한 영국군은 프랑스 왕실 세력을 결정적으로 패퇴시키기 위해 오를레앙으로 향했다. 오를레앙은 프랑스 샤를 왕세자의 강력한 지지 세력인 아르마냑인들의 근거지였다. 루아르 강변에 위치한 오를레앙은 프랑스의 동부와 서부, 그리고 남부와 연결되는 교통의 요지이기 때문에 이곳을 빼앗길 경우 전세는 돌이킬 수 없는 상황에 처하게 된다. 프랑스 서부를 차지하고 있는 부르고뉴는 이미 영국과 동맹을 맺고 프랑스 왕실을 압박하고 있었다. 이미 영국과 브르고뉴 세력이 프랑스 영토의 3분의 2 이상을 차지하고 있는 상황에서 이들이 프랑스 중부를 차지할 경우 프랑스 왕실은 역사에서 사라질 운명이었다.

 1428년 10월 오를레앙 수비를 맡고 있던 장 드 뒤누아(Jean de Dunois)는 영국군이 오를레앙 시내와 연결돼 있는 남문 다리를 공격할 것을 예측하고 방어막을 구축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방어요새도 영국군의 몇 차례 공격에 힘없이 무너지게 되자 프랑스 영주들은 “어떤 대가를 치르더라도” 부르고뉴와 평화협정을 맺어야 한다고 샤를 왕세자를 압박하기 시작했다. 게다가 다음해 2월 오를레앙을 구하기 위해 블루아(Blois)에서 출발한 프랑스-스코틀랜드 연합군이 헤링(Herrigns) 전투에서 궤멸됨으로써 프랑스군의 사기는 땅바닥으로 떨어졌고 더 이상 구원의 희망마저 보이지 않는 상황이 됐다. 프랑스 귀족들은 다시 분열해 서로를 비방했고 샤를 왕세자는 그 어떤 리더십도 발휘할 수 없는 상황에서 프랑스의 패배는 자명해 보였다.



 ●정면공격을 고집한 잔 다르크

 이런 상황에서 잔 다르크가 등장한다. 그녀는 “영국군을 물리치고 프랑스 왕을 즉위시켜라”라는 천사의 계시를 받고 찾아갔지만 프랑스 왕실이나 귀족들이 처음부터 그녀를 믿은 것은 아니다. 오히려 여자 마법사가 아닌가 의심했다. 사실 프랑스 왕실의 입장에서는 더 이상 지원세력도 없는 상황에서 종교적 마력을 지닌 어린 소녀에게 마지막 기대를 걸 수밖에 없었다. 그만큼 프랑스 왕실은 위급한 상황에 놓여 있었다.

 잔 다르크의 첫 번째 임무는 오를레앙을 구하는 것이었다. 그녀에 대한 소문은 이미 파다하게 퍼져 있었다. 4월 29일 저녁 8시 한 차례 기적을 행하며 절망의 도시 오를레앙에 그녀가 도착했을 때 그곳에 주둔 중인 군사와 시민들은 감동의 눈물을 쏟아내며 격렬히 환대했다. 그녀의 도착으로 프랑스 병사들의 사기는 극도로 고양됐고 벌써 승리한 듯한 분위기에 젖어들었다. 신의 계시를 받은 순결한 처녀의 존재만으로도 그들의 감정은 격발됐고 그 어떤 일도 함께 할 수 있을 것 같은 충동에 휩싸이게 됐던 것이다.

 본격적인 전투가 벌어진 것은 블루아의 증원군이 도착한 5월 4일부터였다. 오를레앙의 봉쇄를 풀기 위해서는 주변에 설치된 영국군 진지를 하나씩 점령해야 했다. 안전한 차선책을 도모하는 프랑스 귀족들과 달리 잔 다르크는 늘 즉각적인 정면공격을 주장했다. 전투가 시작되면 그녀는 맨 앞에서 병사들을 이끌었다. 5월 7일 가장 치열한 전투가 벌어졌던 남문전투에서 그녀는 화살에 맞아 다친 몸이었지만 홀로 깃발을 흔들며 공격사다리를 타고 돌진했다. 이 모습을 본 프랑스 병사들이 그녀를 따라 공격에 나섬으로써 영국군은 무너지기 시작했다. 가장 강력한 봉쇄진지였던 남문요새를 빼앗기자 5월 8일 영국군은 봉쇄를 풀고 떠났다. 한때 절망의 도시였던 오를레앙은 구원과 축복의 상징이 된 것이다. 그 후 잔 다르크가 이끄는 프랑스군은 연전연승을 구가했고, 7월 17일 라임즈(Reimes)에서 샤를 7세의 즉위식이 거행됨으로써 그녀에게 주어진 신의 계시는 모두 실현됐다.

 이런 전투에서 전술은 무의미하다. 사실 잔 다르크의 정면공격은 무모하기 이를 데 없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녀의 그 무모한 돌격에 감동한 프랑스 병사들이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고 뒤따랐기 때문에 가능했던 승리였다. 그녀와 함께라면 죽음마저도 축복으로 간주했던 이들의 중세적 정신세계를 이해하지 않는다면 설명하기 어려운 일이다. 근대적 합리성으로 납득할 수 없는 중세적 감수성과 격렬함이 있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다.

 잔 다르크는 다양한 화가들에 의해 그려졌다. ‘오를레앙의 처녀’라는 그의 별명에서 알 수 있듯이 순결함과 전투적 이미지가 결합된 작품이 지배적이다. 그런데 영국 화가 단테 가브리엘 로세티(Dante Gabriel Rossetti·1828~1882)의 ‘잔 다르크’(1882)는 다소 의외의 작품이다. 다른 잔 다르크 그림에서 발견되는 전사적 이미지를 찾아보기 어렵기 때문이다. 전통적인 인물 초상화와 달리 측면의 얼굴을 클로즈업한 구성이나 붉게 윤기 나는 머리칼과 겉옷, 뚜렷한 윤곽의 얼굴과 두툼한 입술, 그리고 강한 목선은 다소 관능적 분위기마저 느끼게 한다.



 ●풍부한 세부 묘사와 강렬한 색채 강조

 이 작품을 그린 로세티는 라파엘전파(Pre-Raphaelite)에 속하는 화가로서 중세적 분위기를 강조했다. 그들은 라파엘이나 미켈란젤로로 대표되는 르네상스나 고전주의적 안정적인 매너리즘에서 벗어나 15세기 중세미술에서 발견되는 풍부한 세부 묘사와 강렬한 색채, 복잡한 구성으로 돌아갈 것을 주장했다. 어떤 점에서 그러한 표현 방식이 중세의 가을 분위기와 일치하기 때문이다.

 강렬한 색채는 중세적 삶을 지배했던 감정의 격렬함을 느낄 수 있다. 어떤 안정적 조화와 숭고함도 발견할 수 없었던 중세 시대, 안정적인 구도와 차분한 색채는 어울리기 어렵다. 사실적 표현도 중세적이지 않다. 현실과 공상이 복잡하게 뒤섞여 존재했던 중세적 삶에 있어 비현실적일 만큼 복잡하게 얽혀 있는 구도가 더 현실적일지 모른다. 다소 어색해 보이는 색채와 구도, 게다가 다소 감각적인 인물표현조차 성속(聖俗)이 복잡하게 교직돼 있었던 중세사회의 본질적인 모습일지 모른다. 라파엘전파가 추구했던 것이 중세적 미학이라면 로세티의 그림만큼 잔 다르크와 그 시대를 정확하게 그린 작품은 없을 것이다.

중앙대 정치국제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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