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획 완결 이야기로 풀어 쓴 북한사

남베트남 한국 외교관 3명 강제 북송될 뻔

입력 2015. 05. 03   16: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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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4> 남베트남 패망과 북한 ②


북한, 사이공 함락 직후부터 한국 외교관 억류·북송 공작

3자회담 열어 외교관·남파간첩 교환 추진했지만 무위로

베트남·북한 관계 급랭 계기로 억류 5년 만에 모두 석방

 

 


 

 

 ■  남베트남 패망과 한국 외교관 억류

 패망 한 달 전인 1975년 4월 1일 남베트남에는 외교관 21명(가족 59명)과 교민 1009명, 그리고 농업·의료·수자원 관련 사절단 45명 등 총 1134명의 우리 국민이 남아 있었다.

 그러나 북베트남의 무력 침공으로 상황이 급격히 악화되자 우리 정부는 공관원에 대해 철수를 지시하고 교민들에게도 자진철수를 독려했다. 또 비밀리에 해군 군함(LST)을 남베트남에 보내 구호물자를 전달하고 교민과 피난민을 수송하기 위한 ‘십자성 작전’도 전개했다.

 그러나 4월 30일 10시20분 남베트남 정부가 항복할 때까지 외교관 9명과 교민 160여 명은 탈출하지 못하고 공산 치하가 된 사이공(현 호찌민시)에 남게 됐다. 이후 외교관 9명 중 6명은 5월 7일까지 단독으로 탈출하거나 공산당국의 외국인 퇴거 조치에 따라 다행히 귀국했다. 그러나 이대용 공사, 안희완 영사, 서병호 총경 등 3명은 공산당국에 체포돼 사이공의 악명 높은 치화교도소에 수감됐다.

 당시 억류된 외교관 3인 중 최선임자는 이대용 공사였다. 이 공사는 1963년부터 대사관 무관(대령)으로 재직하며 국군의 베트남 파병 업무를 수행했고, 1968년 준장 진급 후 대사관 공사로 또다시 근무하던 중이었다.



 ■  북한의 외교관 북송 공작

 일반적으로 외교관들은 국제법에 따라 그 신분과 활동이 보호된다. 그러나 패망 당시 베트남 상황은 특수했다. 한국은 베트남 전쟁에 국군을 파병한 국가였고 북베트남과는 전쟁을 치른 사이였다. 여기에 남북한이 대치한 상황에서 북한은 북베트남과 밀접한 관계였다. 결국 공산정권에 의한 남베트남 패망은 우리 외교관들에게는 큰 위협이었던 것이다.

 이대용 공사도 이것을 걱정했다. 우려는 패망 하루 만에 현실로 다가왔다. 5월 1일 사이공 주재 일본 외교관은 ‘북한이 북베트남과 협의해 한국 외교관 전원을 평양으로 끌고 갈 계획’이라는 소식을 전해주었다.

 후에 알려진 사실도 이를 뒷받침하고 있다. 북한은 사이공 함락 직후부터 잔류한 한국 외교관의 귀국을 방해하고 억류해 놓을 것을 북베트남 측에 요청했다고 한다. 그리고 북베트남의 수도인 하노이 주재 북한대사 김상준이 남베트남 패망과 동시에 공작원들과 함께 사이공으로 내려와 본격적인 ‘공작활동’을 전개했다는 것이다.

 당시 북한의 목표는 북측에 연고가 있는 거물급 한국인은 북한으로 데려가고, 나머지는 고정간첩화해서 한국으로 돌려보낸다는 것이었다. 이 과정에서 사이공 교민을 포섭해 주요 외교관들의 행방과 과거 활동 등을 조사하기도 했다.

 이 점에서 이대용 공사 등 외교관 3명은 북한에겐 중요한 ‘공작 목표’였던 셈이다. 따라서 북한은 세 명의 외교관이 치화교도소에 수감됐을 때 이들을 북으로 데려가기 위한 ‘공작’을 벌였다. 당시 북한 공작원들은 베트남 비밀경찰들과 손잡고 이 공사 일행을 여섯 차례나 찾아와 협박과 회유를 하며 북으로 데려가고자 했다.
 특히 황해도가 고향인 이 공사에게는 북반부에서 도주한 ‘도망범’이라고 몰아세우다가 북에 있는 누나와 조카 소식을 전하며 회유하기도 했다. 북한으로서는 황해도 출신의 현직 외교관이자 장군인 이 공사를 북으로 데려간다면 선전용으로 활용할 가치가 매우 컸기 때문이다.



 ■  남·북·베트남 3자 비밀협상

 우리 외교관들은 교도소에 수감 당시 현지 프랑스 대사관과 이순흥 한인회장의 도움을 받고 있었다. 이들을 통해 본국 외무부와 비밀리에 연락도 주고받았다. 우리 정부는 외교관들의 생사와 소재가 확인된 이후 대통령까지 나서서 우방국에 도움을 요청하는 등 이들의 석방을 위해 노력했다. 그러나 그때마다 베트남 당국의 대답은 자신들은 외교관 석방을 반대하지 않지만 북한이 반대한다는 것이었다. 북한이 배후에서 일정한 역할을 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던 중 1977년 11월 24일 프랑스 주재 한국대사의 보고가 해결의 실마리를 제공했다. 그 내용은 한국 정부가 억류 중인 외교관과 남한에 잡혀있는 남파간첩을 교환하고자 한다면 프랑스가 중재할 수 있다는 것이었다. 이 계획은 곧바로 대통령에게 보고돼 재가를 얻었고 이후 남·북·베트남 3자 비밀협상이 본격적으로 시작됐다.

 당시 협상에 참여했던 공로명 전 외무부 장관은 최근 회고록에서 이 부분에 대해 소상히 밝히고 있다. 그에 따르면, 1978년 7월 7일 뉴델리 주재 베트남 대사관에서 제1차 3자 예비회담이 개최됐다. 한국대표는 공로명 당시 외무부 아주국장이었고 북한대표는 박영수 조국평화통일위원회 참사였다. 베트남은 주인도 베트남대사관 1등 서기관이 참여했다.

 여섯 차례의 예비회담 이후 1978년 7월 24일 제1차 본회담이 개최됐다. 북한은 처음에 우리 외교관 1명과 북한의 남파간첩 70명, 즉 1 대 70의 비율로 교환을 요구했다. 이 비율은 이후 여러 차례의 조정을 거쳐 11월 17일 최종적으로 1대 7로 결정됐다.

 이후 본격적인 교환자 선정 작업이 진행됐다. 그러나 14차례의 비공개 회담이 진행되는 동안 북한의 계속된 억지로 양측의 이견은 좁혀지지 않았고, 급기야 1979년 5월 23일 회담은 성과 없이 종료됐다. 외교관들을 구할 수 있는 한 줄기 희망이 사라지는 듯했다.

 그러나 이 무렵 긍정적인 상황이 발생했다. 베트남의 캄보디아 침공에 대해 북한이 베트남을 비난하면서 양측 관계가 급랭하기 시작한 것이다. 우리 정부는 이 기회를 놓치지 않았다. 그리고 스웨덴 정부와 당시 베트남 당국과 관계가 깊었던 아이젠버그라는 이스라엘 국적의 사업가를 통해 외교관 석방을 이뤄냈다. 그 결과 외교관 3인은 억류 5년 만에 석방돼 1980년 4월 12일 평양이 아닌, 꿈에도 그리던 서울로 돌아오게 된다.



 ■  이대용 공사의 ‘악연’들

 이대용 공사가 사이공에 억류됐을 당시 만났던 두 명과의 ‘악연’이 눈길을 끈다. 한 명은 이 공사를 북으로 데려가기 위해 회유와 협박을 했던 북한 공작원 박영수다. 그는 당시 남·북·베트남 3자 비밀협상 때도 북측대표로 참가했었다.

 박영수가 주목을 받는 것은 그가 1994년 3월 판문점에서 개최된 남북실무자 접촉에서 남측 대표를 향해 ‘서울은 여기서 멀지 않다. 서울이 불바다가 되면 선생도 무사하지 못할 것’이라는 이른바 ‘서울 불바다’ 발언을 했던 자이기 때문이다. 그 자가 남베트남 패망 당시에는 우리 외교관 북송 공작의 장본인이었던 것이다.

 또 한 명은 베트남 비밀경찰 ‘즈엉 찐’이라는 자다. 그는 평양 유학을 다녀왔던 자로 수시로 이 공사를 심문하며 권총으로 위협하곤 했다. 다시는 만날 것 같지 않았던 그가 2002년 초 베트남 대사가 돼 서울에 온 것이다. 이대용 공사와 베트남 대사는 서울에서 별도로 만난 것으로 알려졌는데, ‘악연과의 재회’ 바로 그것이었던 것이다.

 4월 30일은 남베트남 패망 40년이 되는 날이었다. 지난 40년 동안 한·베트남은 적에서 협력관계로 변화했다. 한때 베트남은 북한과 긴밀했지만, 이젠 더 이상 그렇지만은 않은 것 같다. 역사란 그런 것일까? 흔히 영원한 적도, 영원한 우방도 없다고 하는데 정말 그런가 보다.

이신재 국방부 군사편찬연구소 연구원·북한학 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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