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획 완결 알려지지않은 6·25 전쟁영웅

박격포의 귀재, 적 진지를 초토화시키다

입력 2015. 04. 26   13: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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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 신용관(申用寬) 중위와 춘천·동락리 전투


19세 김재옥 교사의 제보로 

동락초 점령한 적 연대 격멸

박격포소대 활약으로 승리

화기류 2000여점 등 노획도

북한군에 대한 자신감 찾아



 

 


 

 

   ●대한민국 사관후보생의 자긍심으로 열악한 여건 극복

 신용관 중위는 1926년 12월 5일 서울시 종로구 명륜동에서 출생했으며, 1948년 12월 육사 제8기로 사관학교에 입교했다. 당시 사관학교의 급식 여건은 보리밥과 콩나물국이 전부일 정도로 열악했다. 그뿐만 아니라 복장도 미군이 물려준 낡은 전투복과 군화로 대충 갖췄을 정도였다.

그러나 신용관 후보생은 자랑스러운 대한민국의 장교가 된다는 벅찬 자긍심으로 이 모든 역경을 극복했다. 특히 그는 생도 시절 내내 군사 장비에 많은 흥미를 가졌으며 누구보다도 열심히 무기 조작과 운용술을 익혔다.

1949년 5월, 1350여 명(8기 특별반 포함)의 동기생들과 함께 임관한 신용관 소위의 첫 부임지는 춘천 제6사단 제7연대였다. 사단은 3개 보병연대(제2·7·19연대)와 제16포병대대, 공병대대로 구성돼 있었다. 그가 소속된 제7연대는 1949년 5월 이후, 전쟁 발발 시까지 38도선 경계 임무를 수행했다. 전쟁 직전 중위로 진급한 신용관은 제2대대 제8중대의 81㎜ 박격포 소대장이 됐다. 화기 조작에 남다른 재능을 보였던 그의 역량을 유감없이 발휘할 수 있는 보직이었다.



 ●장병들의 결사항전과 시민·학생 지원으로 적 남진 저지

 1950년 6월 23일 24시를 기해 두 달간 계속되던 비상이 풀렸다. 이어 휴가를 자유롭게 시행하라는 육본의 지시가 하달됐다. 그러나 38선에서는 북한군 군관의 빈번한 정찰 활동과 대규모 병력 이동이 목격되고 있었다. 이에 따라 사단장은 단호하게 “전 장병 영내 대기!”를 지시했다. 이미 제7연대는 전쟁 이전, 춘천 시민·학생들의 지원으로 최전방에 견고한 방어진지를 구축해 뒀다. 주요 접근로에 콘크리트 유개호 9개소, 중대마다 2~3개소의 통나무 벙커, 각 소대를 연결하는 거미줄 같은 교통호도 준비했다. 장병들의 사기 또한 높았다. 외출·휴가 중지에 누구 한 사람 불평하지 않았다.

 6월 25일 04시 북한군의 남침이 시작됐다. 제6사단은 열세한 전투력으로 무려 사흘을 적 제2군단에 맞섰다. 이 때문에 적의 개전 초기 전략은 엉망이 됐다. 분노한 김일성은 춘천전투를 망친 제2군단장 김광협과 제2사단장 이청송을 즉각 해임했다. 그러나 제6사단은 전선조정으로 6월 27일 18시 눈물을 머금고 춘천을 적에게 내주고 말았다.



 ●여교사 제보가 적 연대 격멸에 결정적 역할

 제6사단은 원주를 거쳐 충청북도 음성까지 철수했다. 1950년 7월 6일 13시쯤, 제7연대 제2대대는 부용산(644m)으로 이동 중이었다. 이 과정에서 대대장 김종수 소령은 “국군을 태산같이 믿었는데 이게 무슨 꼴이냐?”며 국군 장교에게 따지는 한 처녀로부터 중요한 정보를 들었다. 그녀는 청주사범학교를 졸업하고, 불과 한 달 전에 19세 나이로 동락초등학교로 부임한 김재옥 선생이었다.

 김재옥 교사의 증언은 이러했다. “7월 6일, 언제나 다름없이 학교에 나왔다. 점심 무렵 밖이 소란해 내다봤더니, 북한군이 학교 운동장에 들어서고 있었다. 곧이어 마을 청년 한상준이 피살되고, 집집의 소·돼지·닭들이 도살됐다. 몰래 뒷문으로 나와 국군을 찾아 험한 능선을 몇 개 넘어서 달려갔다. 644고지 암자에서 겨우 국군을 만날 수 있었다.”(출처: 6·25전쟁 다하지 못한 이야기들)

 이에 대대장은 적을 기습 공격할 것을 지시했다. 당시 동락초등학교에는 연대 규모의 적병들이 북적거리고 있었다. 운동장에 늘어선 10여 문의 화포와 수십 대의 차량. 그러나 아군은 병력 300명, 기관총 1정, 81㎜ 박격포 1문이 전부였다. 각 중대는 은밀하게 공격지점으로 이동했다. 김재옥 교사는 선두에서 직접 안내했다. 무방비 상태의 적들은 경계병 하나 세우지 않고 나무 그늘에서 쉬고 있었다. 17시 정각. 총탄이 우박처럼 쏟아졌다. 불의의 습격을 당한 적들은 추풍낙엽처럼 쓰러졌다. 이런 와중에서도 적 포병은 포구를 아군 공격부대로 돌렸다.



 ●박격포 제1탄! 적 포병 진지 중앙에 떨어지다

 아군은 81㎜ 박격포 1문이 적 포병을 잠재울 수 있는 유일한 화기였다. 그러나 아직 포판이 도착하지 않은 상태였다(박격포는 포신, 포다리, 포판으로 구성). 적 포병이 일제 사격을 하면 대대 전체가 위기에 빠질 수 있는 긴급한 순간이었다. 다행히 피투성이가 된 부사수가 포판을 지고 결사적으로 달려와 사격 준비를 했으나 이번에는 조준경이 없었다.

 더 이상 지체할 수 없었다. 신용관 중위는 거리를 어림하며 제1탄을 날렸다. 다행히 첫 탄은 정확하게 운동장 중앙의 적 포진지에 떨어졌다. 제2탄, 제3탄이 계속 날았다. 적 시체가 공중으로 튀어 오르고 트럭에 실려 있던 포탄까지 연쇄 폭발했다. 결국 적 48연대는 엄청난 장비를 유기한 채 와해되고 말았다. 확인 결과 1000여 명의 적이 죽었다. 노획한 장비만도 화기류 2000여 점, 화포 12문, 차량 80대, 장갑차 10대에 달했다. 이 전투를 계기로 국군은 북한군에 대해 자신감을 되찾게 됐다.



 ●6·25전쟁 최대의 전승지 동락초등교 폐교 위기에 놓이다

 신용관 중위의 활약은 이후에도 계속됐다. 7월 16일 이화령에서도 박격포소대의 맹활약으로 적을 저지했다. 또한 그는 낙동강전투는 물론 북진 때도 많은 전공을 세웠다. 이런 활약상은 한국전쟁사(제1권 273~274쪽)에 상세하게 수록돼 있다.

 한편 당시 동락리 전투를 목격했던 주민들은 지금도 이 사실을 후세에 전해주고 있다. 동락초등학교 김재숙(56) 교장도 당시 상황을 많은 어르신들로부터 들었다고 말했다. 또 김재옥 교사의 투철한 애국심을 기리고 선양하기 위해 동락초등학교에는 ‘미니 전쟁박물관’(김재옥 선생 기념관)도 생겨났다.

그러나 요즘 6·25전쟁 최대의 전승지인 이곳을 찾는 발길이 뚝 끊겼다. 조국 대한민국을 맨주먹으로 지킨 그날의 호국용사를 기억하는 사람조차 많지 않다. 전승 장소였던 동락초등학교의 전교생도 불과 19명에 불과할 정도로 쇠락해 보는 이들을 안타깝게 하고 있다.


전쟁과평화연구소 신종태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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