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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년 결’ 살린‘종이벗’ 67년

기사입력 2015. 04. 21   18:11

<102> 한지장 홍 춘 수

12세때 부친에게 제조법 익혀 한평생 외길

99번의 손길 거쳐야 비로소 한 장 완성

인내·고통의 연속이지만 전통방식 고수

˝전통 보존 넘어 예술로 소임 넓혀야죠”

 

 




 1966년 10월 13일. 이날은 불국사 경내 석가탑 보수를 위해 탑신을 해체하는 날로 국내외 저명 고고학자들이 긴장 속에 현장을 지키고 있었다. 천 년이 넘은 석탑 속에 과연 무엇이 들어 있을까. 마침내 2층 탑신부에 봉안돼 있던 금동제 사리외함이 공개되며 학자들은 경악했다. 1215년전(당시) 한지(韓紙)로 만들어진 무구정광대다라니경이 양호한 보존 상태로 발견된 것이다. 폭 6.7㎝, 길이 620㎝의 국내최초 목판권자본(卷子本·한지에 목판으로 찍은 것)으로 신라 35대 경덕왕 10년(751) 간행된 것이었다.

 세계 고고학계는 습기 찬 석탑 안에서 1200여 년의 세월을 견뎌낸 한지의 내구성에 놀랐다. 서양문명의 자존심으로 내세우던 구텐베르크(1397~1468)의 42행 성서(1455)는 당시 종이 부식 때문에 전시조차 불가능한 상태였다. 국가에서는 무구정광대다라니경과 동일한 성분의 한지를 제작해 수리한 뒤 1967년 국보 제126호로 지정했다.

 인류가 최초로 사용한 종이는 중국 후한시대(105) 채륜이 넝마를 찧어 만든 마지(麻紙)로 전해진다. 2~4세기께 한반도에 종이제조법이 전해졌고 삼국시대엔 제지기술이 보편화됐다. 통일신라 시기엔 닥 섬유로 만든 종이가 ‘계림지’로 불리며 대중화됐고 고려의 ‘고려지’는 투명하고 질기기로 유명해 해외수출 품목 중 최고인기를 차지했다는 기록이 전한다. 조선 태종 때는 조지서(造紙署)를 설치해 원료조달 및 종이규격을 국가가 관리했다.

 이처럼 역사 깊은 한지를 전통방식 그대로 만들어 국가 중요무형문화재 제117호 한지장(韓紙匠)으로 지정(2010년 3월 16일)된 명장이 지우(紙友) 홍춘수(洪春洙·78) 초대 인간문화재다. 전북 완주군 소양면 태승리에서 태어나 12살부터 부친(홍순성)이 운영하던 종이공장에서 제조법을 배운 그는 19세 때 현 부지(임실군 청웅면 구고리)로 옮긴 후로도 줄곧 이 일만 해오고 있다. 한지 전수관과 공장을 겸한 그의 자택 텃밭에는 한지의 주요재료인 닥나무와 황촉규가 무성히 자라고 있었다. 예부터 전북 일대는 닥 생산지로 유명했고 특히 전주시 신리·봉동·고산 등의 산간지방 닥은 품질이 뛰어나 전국 각지로 공급됐다.

 “좋은 한지가 긴 세월을 견뎌 내지만 좋게 만드는 사람 손끝에서 나와야 오래갈 수 있습니다. 자고로 비단 500년에 종이 1천 년이라지만 한지를 전통기법으로 만들어 관리만 잘하면 영구보전도 가능합니다.”

 지우는 설이나 추석 때 찢어진 문틈을 한지로 바르며 꽃잎이나 이끼를 넣어 무늬로 살려내던 추억을 회상했다. 문살에 바른 한지는 햇살과 달빛을 부드럽게 통과시키고 바름벽에 발랐을 적엔 흙의 기운을 전하면서 옷감으로 인한 피부오염도 방지해 주었다. 지우는 한 장의 한지를 만들기 위해서는 99번의 제작공정을 거친 후 마지막 백 번째 한지를 만든다 하여 백지(百紙)라 부르고, 고혹적인 흰 종이 색을 일러 백지(白紙)로도 부른다고 말했다.

 닥은 닥나무의 준말로 껍질은 삶아 한지, 잎은 덖어 음용 차, 뿌리의 미백성분으론 화장품을 만들어 버릴 게 없는 토종자생목이다. 황촉규(黃蜀葵)는 닥풀로도 불리며 뿌리서 나온 액즙이 닥의 섬유질을 잘 엉키게 해 한지제작에 필수적인 다년생 풀이다. 현재는 생산원가 절감을 이유로 닥나무 대신 수입펄프를 쓰고, 황촉규 대용으로 화공약품인 팜을 사용하지만 지우는 전통방식만을 고수한다. 이렇게 만들어진 홍씨네 한지는 ‘청웅한지’로 불리며 전국 최고품질이라는 명성을 얻어 왔다.

 “닥나무를 베고 찌고 벗기고 말리고, 다시 삶고 두들기고 뜨고 말리면서 67년을 살아왔지만 다른 일은 생각해 본 적이 없어요. 사람도 이처럼 수많은 연단을 거쳐야 성장한다는 걸 깨달으며 견뎌냈습니다. 위기와 모진 세월도 많았지요.”

 청웅한지의 전성기는 1950~60년대였다. 6·25 한국전쟁 직후 정부가 유실된 공문서와 호적대장을 복원하면서 한지수요도 급격히 증가했다. 한창 호황일 때는 20여 명의 기술자가 임실 한지공장에서 복닥거렸고 침식만 제공하면 그냥 일하겠다는 기술 지망생이 줄을 이었다고 한다. 이렇듯 절정에 달했던 한지산업이 쇠락의 길로 접어든 건 1980년대 대량생산된 기계식 한지와 중국산 화선지가 값싸게 유통되면서부터다. 전통방식으로 한지를 뜨던 사람들은 급속히 사라져갔다.

 전통한지를 제작하는 과정은 인내와 반복의 연속이다. 겨울(12~1월)에 벤 닥나무를 쪄 벗긴 껍질이 피닥으로 불리는 흑피(黑皮)다. 피닥을 물에 불려 백닥으로 만들었다가 종이물이 될 때까지 수십 공정을 더 거친다. 외발(홀림)로 뜬 종이물을 우물 정(井)자 모양으로 엉키게 만들면 비로소 우리 전통의 질기고 얇은 한지가 만들어지는 것이다. 지우는 “고달프기만 하고 돈도 안 되는 이 일을 누가 하겠느냐”면서 전통명맥은 큰사위(노정훈·53 전수조교)가 겨우 잇고 있다고 말했다.

 “전통한지는 물·불·인간의 조화로 빚어지는 최고의 걸작품입니다. 닥을 종이물로 만드는 동안에는 물, 탈수와 건조를 시킬 때는 불, 종이로 뜨는 공정에는 고도로 숙련된 기술이 필요하지요. 천·지·인 삼합일체가 담긴 게 종이라는 생각입니다.”

 지우는 “한지에 관련된 것 외에는 말을 할 줄 모른다”고 낮추면서 전해오는 전통종이 종류만도 240가지가 넘는다고 말했다. 두 장의 종이를 맞붙여 떠낸 음양지, 김이나 이끼를 넣은 태지(苔紙), 소나무 껍질을 섞어 만든 송피지, 닥 섬유를 거칠게 간 운용지, 옻나무 액을 여러 번 입힌 옻칠지 등. 약간의 광선만 투과시키고 나머지 빛을 흡수해 그윽한 분위기를 연출해 주는 맹지(盲紙)는 신혼부부의 문살용으로 큰 인기다.

 최근 들어 지우는 족보제작에 사용되는 전용복사지, 사군자를 그릴 때 쓰는 특수화선지, 황토를 종이물에 섞어 만든 황토벽지 등을 개발해 전통한지의 존립위기를 극복해 내고 있다. 전통재료와 제작방식을 고수하되 현대사회서 어떻게 쓰일지를 연구하는 게 그의 일상화두다. 전통보존의 차원을 뛰어넘어 예술의 영역으로 지평을 넓혀 가는 것 또한 그의 책무로 여기고 있다.

 “전통한지는 역사를 기록해온 실증자료로 우리 민족의 삶에 깊숙이 자리했습니다. 어느 국가를 막론하고 종이를 빼놓고선 역사를 논할 수가 없지요.” 지우는 다른 사람이 보기엔 전수관의 좁은 공간에서 한지 만드는 작업이 답답하게 느껴질지 모르지만 한 가지 일에 몰두하는 것처럼 행복한 것도 없다고 말했다.

이규원 <시인· ‘조선왕릉실록’ 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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