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남북전쟁 승부 가른 최대 격전지
전장의 긴박한 상황 사실적으로 표현
한국 현대사는 많은 날짜로 기억된다. 8·15와 6·25에서 5·16과 10·26으로 이어지는 한국 현대사에서 유독 빛나는 날짜가 ‘4·19’다. 다른 어느 날보다 4·19가 소중한 것은 젊은 학생들의 피와 땀으로 한국 민주주의를 일궈냈기 때문이다. 1960년 4월 19일, 민주주의를 위해 분연히 일어섰던 그 젊은 투혼이 오늘의 대한민국을 이룩한 힘의 하나임을 부인할 수 없을 것이다.
민주주의의 관점에서 보면 1863년에 일어난 게티스버그(Gettysburg) 전투는 현대 민주주의와 가장 깊은 연관성을 갖고 있다. 우리가 민주주의를 언급할 때 곧잘 되뇌는 ‘국민의, 국민에 의한, 국민을 위한 정부(Government of the people, by the people, for the people)’라는 표현이 바로 이 전투의 전몰용사를 위한 추모식(11월)에서 링컨(A. Lincoln) 대통령이 한 연설의 일부이기 때문이다.
노예해방을 둘러싼 남부와 북부의 갈등이 내전으로 치달았던 것이 미국의 남북전쟁(1861~1865)이다. 게티스버그는 이 전쟁의 최대 승부처였다. 내전 초기 전력의 열세에도 불구하고 우위를 차지한 것은 남군이었다. 적지 않은 병력손실에도 불구하고 과감한 공격을 주도했던 로버트 리(Robert Lee, 1807~1870) 장군이 있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다. 1863년 6월, 남군은 이러한 여세를 몰아 북군의 수도인 워싱턴 D.C를 에워싸며 북쪽으로 진군했다. 그들은 전선을 북쪽으로 옮기면서 필라델피아나 볼티모어, 그리고 워싱턴과 같은 북부의 주요 도시를 위협해 남부의 독립을 허용하는 평화협정을 얻어낼 심산이었다.
●남북전쟁 최대 승부처 게티스버그
북군은 워싱턴 앞을 흐르는 포토맥(Potomac) 강을 등지고 남군을 견제하고 있었다. 6월 29일 북상하던 남군이 방향을 틀어 워싱턴 쪽으로 남하하자 북군 또한 이를 막기 위해 집결하기 시작했다. 그들이 만난 곳은 워싱턴에서 90㎞ 서북쪽에 위치한 게티스버그라는 작은 마을이었다. 당시 이름조차 잘 알려지지 않았던 이곳에서 16만여 명의 남군과 북군이 결전을 벌이게 되리라고는 아무도 상상하지 못했다. 6월 30일, 남군이 게티스버그를 향해 진군하는 사이 이곳에 먼저 도착한 것은 뷰퍼드(Buford) 장군이 이끄는 북군의 기병대였다. 남군이 게티스버그 북쪽과 서쪽에서 공격할 것이라는 것을 간파한 그는 마을 북쪽에 견고한 방어선을 구축했다.
7월 1일 새벽, 게티스버그로 진군하던 남군은 뷰퍼드의 기병대와 만나 역사적인 전투를 벌이게 된다. 게티스버그 전투가 시작된 것이다. 이날 전투에서 5만여 명의 양측 군대가 맞붙었다. 북쪽과 서쪽 능선을 장악한 북군이 전술적으로 유리했지만 사기충천한 남군을 막아내기에는 역부족이었다. 오후부터 방어선이 붕괴되기 시작하자, 북군은 마을 남쪽의 언덕과 능선으로 후퇴해 낚싯바늘 모양의 방어진을 구축했다. 이후 이틀간의 전투는 이 언덕과 능선을 중심으로 벌어지게 된다. 이곳을 중심으로 강력한 방어벽을 설치한 북군에 대한 남군의 처절한 공격이 계속됐다. 북군은 전술적으로 유리한 위치에 있었다. 언덕 고지에 방어벽을 설치하고 아래에서 달려오는 남군을 향해 총탄과 포탄을 퍼부었다. 총알이 떨어진 북군의 한 연대는 거의 자살에 가까운 총검 공격을 감행해 남군을 막아내기도 했다.
●무모한 남군의 돌격작전 실패로 끝나
전투 사흘째 오전 남군의 양 측면 공격이 다시 시작됐다. 하지만 별다른 성과를 거두지 못하자 리 장군은 작전을 바꿔 북군의 오른쪽 중앙공격을 지시하게 된다. 용맹스러운 버지니아 부대를 포함한 1만2000여 명의 남군이 돌격을 감행했다. 지휘관의 이름을 따 ‘피켓의 돌격(Pickett’s Charge)’으로 알려진 이 공격은 1.2㎞의 평야를 지나 능선에 자리 잡은 북군을 향해 달려드는 것이었다. 이들은 빗발처럼 쏟아지는 포탄과 라이플 총탄을 뚫고 능선을 향해 달렸다.
한때 북군의 방어선이 흔들리며 위기에 처하기도 했으나 곧 증원군이 도착하면서 남군의 저돌적 공격을 막아냈다. 결국 이 공격은 처절한 실패로 끝났다. 공격에 참가한 남군 가운데 절반 이상이 돌아가지 못했다. 결국 게티스버그 전투는 북군의 승리로 기록됐다. 하지만 양측의 전력손실은 기록적이다. 남군의 사상자는 2만8000여 명으로 전력의 3분의 1을 상실했다. 북군 사상자 또한 2만3000여 명으로 결코 적은 숫자가 아니다.
일러스트레이션 전문 화가 투르 디 툴스트럽(Thure de Thulstrup, 1848~1930)의 작품 ‘게티스버그 전투(1886)’는 3일째 전투에서 피켓의 돌격을 막고 있는 북군의 전투 장면을 담고 있다. 나지막한 평원에서 능선을 향해 달려오는 남군의 모습을 발견할 수 있다. 그들의 머리 위로 포탄이 작렬하고 있으며, 화약연기가 앞을 가릴 정도로 많은 총탄이 발사되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용맹한 남군 보병들이 북군의 좌측 방어선을 뚫고 뛰어들고 있다. 이들을 막기 위해 후위의 북군이 급히 앞으로 달려가는 모습이 보인다. 그림 중앙에는 말을 탄 핸콕(Winfield Hancock, 1824~1886) 장군이 용감하게 부대를 지휘하고 있다. 잠시 후 그는 총탄에 맞아 부상하지만 남군을 완전히 격퇴할 때까지 전장을 떠나지 않았다. 그림 오른쪽, ‘나폴레옹’이라 불렸던 12파운드 황동대포를 황급히 옮기는 모습에서 전장의 긴박함이 느껴진다.
●핸콕 장군의 강인함 돋보이게 표현
이 그림은 게티스버그 전투 모습을 매우 사실적으로 표현하고 있다. 잡지에 게재되는 삽화의 특성상 전투 장면을 가능한 한 그대로 재현하고자 했기 때문이다. 전투 현장에 가보지 않은 사람이라도 이 그림을 보면 전투가 전개된 지형과 분위기를 느끼는 데 어려움이 없을 것이다. 특히 전장의 긴박하고 위급한 상황에서도 흔들림 없이 부대를 지휘하는 핸콕 장군의 강인한 자세를 강조함으로써 그림의 메시지를 분명히 전달하고 있다. 사실적 표현에 머무르지 않고 전투의 본질을 보여준다는 점에서 삽화 이상의 가치를 갖고 있는 작품이라 할 수 있다.
게티스버그 전투는 결정적 승리를 기대했던 남부에 좌절을 안겨준 사건이었다. 이 전투 이후 남군은 더 이상 북진하지 못하고 전반적으로 수세에 몰린다. 인구와 산업에서 열세였던 남부의 입장에서 전쟁이 장기화될 경우 불리해질 수밖에 없었다. 북부 공장에서 대량생산된 스프링필드 소총과 나폴레옹 대포로 무장한 북군을 감당하기 어려웠다. 거시적 관점에서 볼 때 북부의 승리는 자명해 보인다.
그러나 전술적 차원에서 볼 때 게티스버그 전투에서 남군의 패배는 지휘관의 오만과 실수의 결과였다. 남군의 가장 큰 문제는 부대의 눈과 귀가 돼야 할 기병대가 제 역할을 하지 못했다는 것이었다. 9500여 명의 기병대가 전투가 벌어진 것을 모른 채 다른 곳에 가 있었고 적의 규모나 동태에 대한 아무런 정보도 제공해주지 않았다. 그들은 상대에 대해 아무런 정보도 갖지 않은 상태에서 북군이 선택한 장소에서 전투를 치른 것이다. 그 이후 많은 오판과 실수 역시 이 문제에서 연유된 것이다.
당시 게티스버그 전투는 사흘간의 전투에서 5만1000여 명의 사상자가 발생한 참혹한 사건이었다. 어떤 식으로든 전쟁의 당위성을 설명할 필요성을 느끼고 있던 링컨 대통령은 그해 11월 열린 추모식에서 인류 역사에서 가장 유명한 연설 가운데 하나인 ‘게티스버그 연설’을 하게 된다. 단지 270여 단어로 구성된 이 짧은 연설이 이토록 큰 의미를 남기게 될 줄은 링컨 자신도 몰랐을 것이다. 그러나 자유와 평등의 가치를 지키기 위해 우리의 소중한 생명마저 바칠 수 있음을, 그러한 헌신의 결의만이 민주주의를 지킬 수 있음을 링컨은 분명히 알고 있었던 것이다.
중앙대 정치국제학과 교수▲ 모조피지 석판화. 디지털 복원. 미국 국회도서관 소장. 남군의 공격을 막아낸 핸콕 장군
북군 2군단을 지휘한 핸콕 장군은 총상에도 불구하고 끝까지 전장을 지키며 남군의 저돌적 공격을 막아냄으로써 전투의 영웅으로 떠올랐다. 전쟁 후 정치인으로 성공해 민주당 대통령 후보로 출마하기도 했다. 스프링필드 소총의 위력
보병의 기본무기는 스프링필드 라이플이었다. 이 소총은 총강 안의 나선으로 총알을 회전시킴으로써 유효사거리가 300m가 넘었다. 총구로 장전해야 하는 어려움은 있었지만 원추형 납탄을 사용해 치명적인 살상력을 자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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