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좌우대칭 나뭇결 올곧게 살려냈다

기사입력 2015. 04. 14   18:25

<101> 소목장 박 명 배

나무판 인두로 지져 무늬 살리는 낙동·낙송기법 사용

나무결엔 상상할 수 없는 갖가지 문양 숨어 있어

청와대 안방·해외 한국문화원 사랑방 가구로 명성

 

 문화재청은 나무를 다루는 명장을 대목장(제74호·본지 2014년 11월 7일 자 보도)과 소목장(제55호·1975년 1월 29일 지정)으로 나눠 인간문화재로 지정했다. 대목장(大木匠)은 궁궐·사찰·가옥 등 대형건축물을 짓는 목수며 소목장(小木匠)은 장롱·경대·문갑 등 실내가구를 제작하는 목수를 이르는데 작가로도 불린다. 문헌기록이나 출토유물로 확인된 목수의 역사는 2000년이 넘으며 소목장이란 명칭은 고려 초부터 사용됐다.

 중국이나 서구의 입식 생활 구조는 실내공간이 넓고 높아 가구들이 크고 장식적인 면이 두드러진다. 반면 온돌양식의 평좌생활을 주로 해온 한국인의 방안은 천장이 낮고 실내가 좁아 가구들이 작았으며 간결하게 만들어졌다. 전통적으로 한국의 소목 가구는 목리(木理·나뭇결이나 나이테)를 활용하는 안목이 뛰어나 역대왕실 및 사대부가(家)는 물론 동서양의 상류사회로부터 극진한 아낌을 받았다.

 이 같은 소목 가구를 잘 만들어 수집가들의 명품욕구를 충족시키고 한국인의 손재주를 세계에 널리 알린 이가 소목장 인간문화재로 지정(2010년 4월 22일)된 박명배(朴明培·66) 명장이다.

 

 

“500년 된 나무 벨 땐 죄짓는 기분

천 년간 변치 않는 명작 만들어

빚 갚겠다는 마음으로 소중히 다뤄

 


 

 


 

 


 

 


 

 


   그는 국내(청와대 안방가구·궁중유물박물관·일민미술관 외)와 국외(로마 교황청박물관 내 한국관, 스웨덴·오스트리아·미국 워싱턴 및 LA·독일 베를린·일본 오사카·벨라루스 등의 한국문화원 사랑방가구)의 소목 가구 소장을 통해 한국을 대표하는 소목장으로 국위를 선양했다. 박 명장은 다호리 출토유물(국립 중앙박물관)과 운현궁의 옛 가구 일습도 복원해 냈다.

 그가 작업하는 경기도 용인시 처인구 포곡면 영문리의 영산(永山)공방에는 박 명장이 남은 삶 동안 만들고도 남을 원목이 비축돼 있다. 그는 사람마다 자질과 성품이 다르듯이 목리도 천차만별이라 무궁무진한 영감을 불러일으킨다면서 18세부터 49년 동안 이 일만 해왔지만 싫증 내거나 게으름을 펴 본 적이 없다고 말했다.

 “500년 된 나무를 벨 때마다 죄짓는 기분이 들기도 합니다. 하필이면 내가 이 나무의 생명을 끊어야 하는가. 그러나 살아 있는 모든 것은 반드시 소멸이 있음을 알기에 천 년 가도 변치 않는 명작으로 탄생시켜 빚을 갚겠다는 자세로 소중히 다루지요.”

 그는 한 작품을 마무리할 즈음이면 어김없이 다음 작품 구상에 마음을 빼앗겨 나무 찾아 전국 방방곡곡을 누빈다. 경기도 은행나무·강원도 피나무·충청도 먹감나무·경상도 참죽나무·전라도 느티나무가 최고의 명품재료다. 원목에서 수분이 증발돼 뒤틀리고 갈라지는 걸 막기 위해 한겨울에 베며 잘린 면에는 풀이나 기름을 바른다. 원목을 그늘에서 2년간 비바람 맞히고 노천에서 3년 동안 햇볕 쏘인 후 다시 실내에서 2년을 건조해야 비로소 작품 원목으로 쓸 수 있다. 그는 “좋은 나무를 만나기란 좋은 배필을 만나는 것만큼이나 어렵다”고 말했다.

 영산공방엔 톱 대패 끌 자귀 그무개 인두 등 작업공구만도 백 가지가 넘으며 새로운 공법이 도입될 때마다 새 공구를 만들어 쓴다. 그가 만드는 소목 가구는 책장 머릿장 문갑 반닫이 등 수십 가지다. 책장 하나를 만드는 데도 뼈대와 문틀 데생→연귀(45도 각도로 맞춤)짜임→호장태 제작→밀랍 칠 광택→어피가죽으로 연마 후 기름칠→장식부착 등의 정밀공정을 거쳐야 한다.

 “여러 나무의 무늬 속에는 우리가 상상하지 못했던 뜻밖의 문양이 숨어 있습니다. 현대미술의 어떤 추상화로도 이를 대신할 수 없지요. 소목장은 세상에 단 하나밖에 없는 작품을 탄생시키기 위해 온갖 정성을 다합니다.”

 충남 홍성군 홍성읍 대교리에서 출생한 박 명장은 학교 졸업 후 소일하다 아버지(박병국)의 권유로 상경했다. 서라벌예대 최회권 교수가 운영하던 공예미술연구소에 들어가 소목 일을 배우며 스케치와 데생을 익혔다. 같은 시기 짜맞춤 전통기법의 고수였던 허기행 명장을 만나면서 그의 기능은 일취월장하게 되었다.

 1981년 개인공방을 차려 작품 활동에 전념하면서도 더 배워야 한다는 일념으로 최순우(1916~1987) 국립중앙박물관장을 찾아가 개인지도를 받았다. 수많은 고대유물을 비교분석하면서 그는 우리 전통목가구가 좌우대칭의 면(面) 비례가 특징임을 터득하게 되었다. 박 명장의 작품이 아름다운 목리를 좌우대칭으로 배치해 화려한 칠과 장식을 대신한다는 학계의 평가는 여기서 비롯된 것이다.

 그는 나무판을 인두로 지져 나뭇결을 뚜렷하게 살려내는 낙동·낙송기법을 사용해 1992년 전승공예대전에서 대통령상을 받았다. 현재도 이 기법은 제작절차가 까다롭고 시일이 오래 걸려 다수가 꺼린다. 이후로도 동아공예대전 대상, 전국기능대회 1위 등 여러 상을 휩쓸며 대한민국 명장으로 지정(1998)됐고 각종 기능대회 심사위원을 거쳐 용인대와 전통공예건축학교에 나가 후진을 양성하고 있다.

 전통적으로 우리 선조들은 손님을 맞아 학문과 세상을 논하는 사랑방 가구는 단순한 구조·쾌적한 면비례·간결한 선(線)을 생명으로 여겼고 여자가 거처하는 안방가구는 밝고 곱고 화사함을 중시했다. 최근의 실내가구 배치에도 이 같은 색조감각은 통용된다고 박 명장은 귀띔한다.

 “우리의 소목 가구는 어디에 놓이든 다른 세간들과 잘 어울려 단아한 아름다움을 자아냅니다. 겉치레를 삼가고 자연 그대로의 재질을 살려내는 소박함 때문이지요. 소목 가구는 겸손한 자세로 만들어야 합니다.”

 예부터 우리네 소목 가구는 개인의 주택구조에 맞춰 맞춤 제작해온 까닭에 일정한 규격품이 없었고 지역적 특성이 강했다. 호남에선 목리를 귀하게 여겼고 영남은 상감기법을 즐겨 썼으며 기호지역은 실용성을 높이 쳤다. 현존하는 고가구가 어두운색을 띠는 건 세월의 때가 묻어 변색했기 때문이다.

 지난 3월 24일부터 4월 1일까지 서울 예술의전당에서 개최된 목야회의 제10회 ‘소목장 박명배와 그의 제자전’에는 박 명장의 책장을 비롯해 14명의 제자가 출품해 호사가들의 큰 관심을 모았다. 목야회(木也會)는 전통공예건축학교서 박 명장이 양성해 낸 제자들의 모임이다. 현재 전수조교는 없고 이수자 6명(양석중·홍훈표·방석호·김형철·이만식·유진경)과 교육생 7명(정재훈 외)이 있다.

이규원 <시인·‘조선왕릉실록’ 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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