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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열지사 의연함·기생의 투혼 … 충절의 향 ‘그윽’

입력 2015. 04. 14   18: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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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래부사 송상현 갑옷에 조복입고 끝까지 교전

스토리텔링 돋보이며 조선화 독특함 고스란히

 

 

   “신 동래부사 송상현 갑옷을 걸치고 칼을 쳐든 채 이 급박한 전황을 아뢰나이다. 지금 이 순간 적의 조총이 콩 볶듯 하고 칼날이 번득입니다. 기생들도 기왓장을 깨뜨려 성 밖을 향해 던지고, 팔순 노인들까지 낫을 쳐들고 성벽을 지키고 있습니다. 신 송상현 이제 전하가 계신 북녘을 향해 마지막 절을 올리면서 최후까지 싸우겠나이다.”  (1592년 음력 4월15일)

 

 


 

 유성룡의 ‘징비록’에 실려 있는 송상현(宋象賢, 1552-1592, 시호 충렬)의 마지막 장계이다. 중과부적의 열세상황에서도 끝까지 싸우겠노라는 비장한 결의가 묻어난다. 임진년(1592년) 4월 13일 부산포에 상륙한 왜군은 14일 부산진성을 함락시키고 곧 바로 동래성으로 들이닥쳤다. 당시 동래성에는 관군 3000여 명을 비롯한 2만여 명의 관민이 결사 항쟁했지만 조총으로 무장한 1만8000여 왜군의 상대가 되지 못했다.

 변박(卞璞)이 그린 ‘동래부순절도(東萊府殉節圖)’는 4월 15일 벌어진 동래성 전투의 전개상황을 담고 있다. 마치 새가 하늘에서 내려다보듯 조감법을 사용함으로써 동래성의 지형적 특성과 함께 이날 전투의 주요 장면을 한 폭의 화면에 효과적으로 보여준다. 그림 중앙에 동래성이 둥글게 자리 잡고 있고 금정산(井山) 등 뒷산들이 광활한 하늘을 배경으로 그려져 있어 전장의 모습이 한눈에 들어온다. 하나의 화폭에 다양한 시점의 이야기를 담은 동도이시법(東圖異時法)을 채택하여 보다 많은 이야기를 전달하고자 했다. 현장의 리얼리티를 중시하는 서양의 전쟁화와 달리 스토리텔링을 강조하는 동양의 역사화 전통을 따르고 있는 것이다.

 왜군이 침입했다는 소식을 들은 송상현은 인근 지역에 도움을 청하고 양민들을 성안으로 대피시켰다. 14일 저녁 양산과 울산 병력이 입성하는 등 비교적 신속하게 관군이 결집하여 항전태세를 갖추었다. 문제는 전투지휘를 맡아야할 경상좌병사 이각(李珏)이었다. 그는 “같이 성을 지키자”는 송상현의 요청을 뿌리치고 15일 아침 무리를 데리고 성 밖으로 나가버렸다. 그림에서 북문 밖으로 허겁지겁 도망치고 있는 이들이 이각의 무리다.

 

송상현의 결사항전 의지 드러나

 15일 아침이 되자 전날 부산진성을 함락시킨 왜군이 몰려와 동래성을 여러 겹으로 포위하기 시작했다. 송상현은 울산군수 이언성에게 동문을, 양산군수 조영구에게 서문을, 그리고 조방장 홍윤관에게는 북문을 각각 지키게 하고 자신은 남문 성루에 올라 장수기를 높이 달았다. 그림 아래쪽에는 “길을 내달라[假我途]”는 목패를 든 왜군에서 “죽기는 쉬우나 길을 빌려주기는 어렵다[戰死易 假道難]”는 팻말을 던짐으로써 결사항전의 의지를 드러내며 남문 위에서 군대를 지휘하는 붉은 조복(朝服)의 송상현을 발견할 수 있다. 그리고 곧장 전투가 벌어져 창과 검을 들고 공격하는 왜군에게 조선군이 화살을 퍼붓고 있는 장면이 중첩돼 있다.

흥미로운 점은 왜군의 철포(조총)병이 뒤에서 줄지어 구경만 하고 있다는 점이다. 사상자도 왜군이 훨씬 많아 보인다. 단정하게 군복을 입고 체계적으로 방어하고 있는 조선군에 비해 왜군은 복장도 통일돼 있지 않고 공격도 혼란스럽다. 조선군이 더욱 멋있게 그려졌던 것은 이 전투에서 순절한 충절열사들의 공헌을 드높이기 위해 제작된 그림이기 때문이다. 실제 전투에서는 잘 훈련된 일본 총포병의 공격에 조선의 궁수들이 제대로 전투력을 발휘하기 어려운 상황이었을 것이다. 조선 활과 왜군의 총포는 유효사정거리 100여 보로 비슷했지만 일제사격으로 탄막을 형성하는 총포는 개별사격에 의존하는 화살에 비해 전술적 우위를 확보할 수 있었다. 게다가 적이 방패나 인형같은 은폐물을 사용할 경우 화살의 살상력은 크게 떨어졌다.

 이날 왜군은 그림에서처럼 3방면으로 공격했지만 산중턱에 설치돼 성곽 높이가 가장 낮은 동쪽 성곽을 집중 공략했다. 사실 동래성 남문 주변에는 해자가 있어 공성이 용이하지 않았다. 왜군의 성곽 공격은 총포부대의 근접사격지원을 받으면서 일본도로 무장한 보병부대가 높은 사다리를 통해 넘어가는 것이었다. 조선군에 화포가 있었지만 왜군이 성벽 가까이 근접할 경우 아무런 소용이 없었다. 왜군이 성벽 옆의 마안산(馬鞍山)을 넘어 성안으로 진입하면서 전황은 급변한다.

 

 조선 각궁 vs. 일본 카타나

 왜군이 성안으로 난입하자 전투는 시가지 백병전 양상으로 전개됐다. 북문을 지키던 조방장 홍윤관과 서쪽 성곽을 지키던 양산군수 조영규 병력까지 달려들어 싸웠으나 수적으로 열세인데다 단기접전에 강한 왜군을 막아내기란 역부족이었다. 조선군의 기본무기는 활과 창 같은 원거리 무기였다. 조선의 각궁(角弓)은 뛰어난 무기이기는 하나 숙련된 궁사가 아니면 사용하기 어려웠다. 창은 선제공격에 유리했지만 바싹 다가와 공격하는 적에게 무력했다. 이에 비해 왜군들은 모두 장검을 보유했다. 총포부대가 전술적으로 활용됐지만 실제 공격은 카타나(刀)와 같은 일본도로 무장한 보병에 의해 이루어졌다. 그림에서 왜군들이 휘두르고 있는 카타나는 외날의 장검으로 찌르거나 베는데 뛰어난 살상무기였다.

 그림의 초점은 동래성 내부에 맞춰져 있다. 가장 인상적인 부분은 객사 앞에서 붉은 조복을 입고 북쪽을 향해 단정히 정좌해 있는 송상현의 모습이다. 주변에서 벌어지는 치열한 전투상황에도 불구하고 죽음을 기다리는 충열지사의 의연함을 느낄 수 있다. 이와 함께 동헌의 지붕에 올라가 기왓장을 던지며 왜군에 저항하고 있는 기생들의 투혼에서 국가를 위한 헌신이 단지 양반들만의 일이 아니었음을 웅변하고 있다. 이러한 결연한 모습은 백성을 버리고 도망하는 이각 무리와 극적인 대조를 이루며 충절의 이미지를 극대화시키고 있다.

 이 그림이 제작된 것은 1760년으로 영조(1724-1776) 연간이다. 당시 조선은 정치적으로나 사회적으로 안정기에 들어서 있었고 성리학적 이념에 기반한 백성 교화가 더욱 중시됐다. 영정조 시대에 ‘삼강행실도’와 같은 계몽적 그림이 많이 제작된 데는 이러한 배경이 작용하고 있다. ‘동래부순절도’ 역시 그와 다르지 않다. 국가적 위기였던 임진왜란의 사례를 통해 백성들에게 충절의식을 고취시키고자 하는 정치적 의도가 깔려 있다. 기왓장을 던지며 왜군에 저항했던 여인들을 헌양하기 시작했다는 점에서 알 수 있듯이, 국가를 위한 충절에는 양반과 상민, 남과 여의 구분이 있을 수 없다는 보다 근대적 사유가 포함돼 있다.

 

 조선식 진경화풍의 역사화

 표현기법에서도 겸재 정선(鄭?, 1676-1759)에서 시작된 조선식 진경화풍이 많이 반영돼 있다. 부드럽고 완만한 산세와 나지막한 초가집, 한국소나무의 전형적인 자태를 통해 조선의 미감을 발견할 수 있다. 동양적 기록화의 일반적 특성을 갖고 있으면서도, 조선화의 독특함을 드러내고 있다.

 이 그림은 다소 도식적인 인물 표현과 성곽과 건물의 어색한 구조로 인해 그림의 격을 더 높이지 못하는 안타까움이 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충절의식을 고취시키고자 했던 제작의도를 구현하는 데는 모자람이 없는 것 같다. 왜군의 침략이라는 국가적 위기에 처해 죽음으로 결연히 맞섰던 충절열사의 의연한 모습과 무기를 내버리고 도망가는 무리들과의 극적인 대비를 통해 국난에 처했을 때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하는지를 알려주는 데 손색이 없는 작품이기 때문이다.

최영진 중앙대 정치국제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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