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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급스러운 광택과 견고함…세계가 반했다

기사입력 2015. 04. 07   17:30

<100> 망건장 강 전 향

 




 

 

 

 

 

 

 옛 선비들이 외출할 때는 망건(網巾) 위에 탕건(宕巾)을 쓰고 갓(笠)끈을 매는 게 가장 중요한 일상관례였다. 고종 32년(1895) 일제에 의해 강제단발령이 시행되기 전까지만 해도 이 3대 두건(頭巾)은 ‘밥은 굶어도 반드시 갖춰야 한다’는 상류사회의 의관 덕목으로 자리 잡아 그 수요가 엄청났다. 오늘날엔 기억의 저편으로 사라져가는 구시대 장식품으로 전락했지만 한때는 중국왕실과 상류층에서까지 귀하게 여기던 ‘조선의 공예품’이었으며 값비싼 수출품목 중 하나였다.

 국가에서는 세 두건의 수요가 소수이긴 하지만 소중한 전통문화유산의 제작기능 전승을 위해 각각 중요무형문화재로 지정했다. 설핏 한 사람의 기능명장이 세 종목을 모두 섭렵할 듯싶지만 실상을 알고 나면 근본적으로 불가능하다. 제주특별자치도 제주시 건입동 사라봉 동남쪽 기슭에 자리한 제주 무형문화재 전수회관에서 전해 들은 세 분야의 인간문화재 얘기는 제주여인의 고단한 삶과 애환이 녹아있는 흥미진진한 드라마와도 같았다. 국가 중요무형문화재 제66호로 지정(1980. 11. 17)된 망건장(匠) 강전향(姜全香·73) 인간문화재(2009. 9. 25 지정)의 62년 명장 일생은 더욱 애절했다.



“망건 짜는 게 학교 숙제보다 어려웠지”

 강 명장은 “외할머니가 어머니(이수여·93)에게 가르쳤고 저는 어머니에게 배워 딸(전영인·47, 이수자)에게 전승시켜 가업 4대를 이어가고 있다”면서 이선아(48) 김현진(41) 두 전수자는 며느리라고 말했다. 어머니는 1987년 1월 5일 2대 인간문화재 지정 이후 현재는 명예보유자 신분이며 “아직도 정신이 맑고 육신도 건강하다”고 덧붙였다. 그는 12세부터 망건 짜는 걸 배웠는데 “학교숙제보다 어머니가 내주는 망건 짜기 숙제가 더 어려웠다”며 “제주 삼양동 집에서 관덕정 5일장까지 걸어가 망건 파는 일은 더욱 힘들었다”고 기억을 되살렸다.

 망건은 갓을 쓸 때 머리카락이 흩어지지 않도록 앞이마로부터 뒤통수 쪽을 둘러치는 너비 7㎝, 길이 75㎝ 안팎의 머리띠이며 말총으로 엮는다. 고려 말기부터 널리 보급됐고 조선의 선비들은 집안에 거처할 때도 잠자거나 세면할 때를 제외하고는 반드시 착용했다.

 강 명장은 ①편자짜기 ②바닥뜨기 ③당걸기 ④감싸기 ⑤관자걸기의 망건제작 전 과정을 어머니한테 배운 그대로 전통기법을 고수하고 있다. 망건 위를 졸라매는 당(살춤), 아래를 당기는 편자(선단), 이마와 머리카락을 고정시키는 앞, 머리둘레를 감싸는 뒤를 정교하게 짠 뒤 관자·동곳·풍잠을 다는데 모두가 순간의 방심도 허용되지 않는 초정밀 작업이다. 조선 시대 조정에서는 1품 비취관자, 2품 금관자, 3품은 목관자(당상관)를 달아 벼슬과 신분을 구분 지었다.

 제주 무형문화재 전수회관에서 매주 1회씩 전수교육을 할 때마다 강 명장은 ‘놋다리 노래’를 즐겨 부른다. ‘무슨 망건 쓰고 왔노 외 올 망건 쓰고 왔네/ 무슨 풍잠 달고 왔노 옥각 풍잠 달고 왔네/ 무슨 관자 달고 왔노 옥관자를 달고 왔네/ 무슨 동곳 꽂고 왔노 산호 동곳 꽂고 왔네….’ 가사 속에 최상품의 망건이 명료하게 묘사돼 있다. 북제주군의 ‘망건요사(謠詞)’에는 이런 대목도 있다. ‘한 간에는 옷 믿은 망건/ 한 간에는 집 믿은 망건/ 정의 좁쌀 내 믿은 망건/ 함덕 짚신 내 믿은 망건’. 망건을 짜서 얻은 소득으로 옷·집은 물론 좁쌀·짚신까지 마련했다는 내용으로 당시 제주도민의 소득에 크게 기여했음을 방증한다.

 조선 말엽에는 망건제작이 전국적으로 성행하여 서울 편자·황등(익산) 앞·논산 뒤·김제 당·통영 관자를 최고로 쳤으며 이 중에서도 공주의 양화일·양화백 형제가 만든 망건은 고종황제에게 진상된 후 왕실납품의 특권까지 얻어냈다고 전해진다. 또한 1925년 한 해 동안 제주시내 712호 가구에서 5만9000여 개의 망건을 생산해 살림에 보탰다는 기록이 전한다.

 이처럼 성황을 이뤘던 망건의 위상은 서양문물 도입으로 의상문화의 지각변동과 산업사회의 물량 공세로 속절없이 무너졌다. 1980년대 들어 전국의 망건 명장들은 이미 자취를 감췄고 오직 제주에서만 그 명맥이 위태롭게 유지되고 있었다. 1985년 전북 완주의 임덕수(1903~1985) 초대 기능보유자가 사망하자 제주의 이수여 명장을 2대 인간문화재로 지정했는데 민속학계에서는 ‘평생을 통해 숙달된 기능의 완성도가 누구와도 비교가 안 되는 최고수준’이라는 평가서를 내놓은 바 있다.

 “제주 4·3사건으로 우리 집안에선 어머니와 저만 살아남았어요. 제주시 삼양동에서 태어나 지금껏 살고 있습니다. 바늘에 말총 실을 꿰어 한 땀 한 땀 망건을 엮어내며 가족 잃은 슬픔을 삭여냈지요.”

 망건을 만들 때는 20가닥짜리 말총 두 줄을 왼발가락에 끼우고 베를 짜듯 엮어나가는데 말총 성질을 잘 알고 도구 활용에 능숙해야 완성도 높은 제품을 출시할 수 있다. 말총 길이가 짧거나 중간에 끊어지면 처음부터 다시 짜야 한다. 한라산록의 야생마는 곶자왈(나무와 덩굴식물이 뒤엉킨 곳을 이르는 제주방언)을 뛰어다니느라 말총이 상해 거의 쓸 수가 없다. 사람 머리카락은 섬세하고 부드러워 귀하게 여기며 주로 해진 망건을 수리할 때 사용한다. 망건을 짜는 도구인 당은 물기를 머금지 않는 박달나무를 쓴다.



과거 제주인들의 소득에 큰 기여

 망건의 역사가 오래된 중국에서는 투명한 비단에 짙은 옻칠을 해 만들었으나 우리나라에선 고가수입품이어서 대중화되지 못했다. 16세기 후반 대체 재료로 말총 사용이 대중화되며 서민 의(衣)생활에 깊숙이 파고들게 됐고 뛰어난 광택과 견고성을 인정받아 오히려 중국으로 역수출하기에 이르렀다. 현재도 세계 모자업계서는 한국인의 섬세한 직조기술에 감탄하며 각국 민속박물관의 소장의뢰가 답지하고 있다.

 “망건 만드는 집에서 태어나 운명적으로 망건 일을 삶의 전부로 받아들이며 살아왔지요. 외지에는 자주 갈 일도 없고 외국에는 나가본 적도 없는데 그분들이 제주를 찾아와 내가 만든 망건을 보고 찬사를 보내 주십니다. 외길을 가다 보니 나라 위해 한몫하고 있다는 자부심이 들 때도 있어요.”

 강 명장은 시대적 흐름에 따라 멋의 기준도 변화돼 망건 착용이 빛을 잃었지만 문화의 회귀 현상은 반드시 온다며 취미로 배우러 오는 전수생들에게도 강조한다고 말했다. 현재 국가에서는 갓을 쓸 때 받쳐 쓰는 모자 중 하나인 탕건장은 중요무형문화재 제67호로 지정(1980. 11. 17)했고, 갓을 만드는 갓일(중요무형문화재 제4호·1964. 1. 24 지정)은 총모자장·양태장·입자장(본지 2014년 2월 28일 자 보도)으로 나누어 그 기능을 보호하고 있다.

이규원 <시인·‘조선왕릉실록’ 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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