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획 완결 전쟁과미술

학습을 통한 우위전술, 교과서적 전투를 낳다

입력 2015. 04. 07   14: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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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7> 리처드 잭의 ‘비미능선 전투’(1918)


포병 포막사격과 보병 진격의 정교한 결합

英 공군 쌍엽전투기들이 포격 지점 알려줘

철저한 준비와 훈련이 주는 안정감 잘 묘사
병사들 투혼과 격정 대신 침착함이 돋보여

 

 


 

 

 로마의 스키피오 장군, 영국의 웰링턴 공작, 미국의 조지 워싱턴 사령관의 공통점은? 물론 역사를 바꾼 전쟁 영웅들이다. 더 중요한 점은 크고 작은 패배에도 불구하고 결정적 전투에서 승리를 거뒀다는 점이다. 그들이 맞붙었던 카르타고의 한니발이나 프랑스의 나폴레옹, 그리고 대영제국의 정규군은 당시 세계 최강이었다. 그들은 초기 패배에 좌절하지 않았다. 오히려 그들은 상대 전술을 철저히 파악하고 이를 압도할 수 있는 우위전술을 만들어냄으로써 승리를 거뒀다.

 이런 점에서 전쟁은 거대한 학습과정이며 문제해결능력이 발휘되는 창조적 공간이다. 적을 알고 나를 아는 것(知彼知己)으로 승리가 보장되지 않는다. 더 중요한 것은 주어진 전력을 최대한 활용하여 적을 분쇄할 수 있는 우위전술을 구사할 수 있어야 한다. 새로운 전술의 수립에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전투상황에서 실현할 수 있는 능력을 갖춰야 승리할 수 있는 것이다.

 제1차 세계대전이 한창이었던 1917년 4월에 벌어진 프랑스 서북부 비미능선(Vimy Ridge) 전투는 그런 점에서 하나의 교과서적 사건이라 할 만하다. 당시 전쟁은 지루한 참호전으로 이어졌다. 무모한 작전으로 수십만의 병사들이 집단돌격에 동원됐지만 적 대포와 기관총의 제물이 됐다. 양측의 참호 사이에 어지럽게 가로놓인 가시철망에 걸려 허둥대는 사이에 적의 기관총탄은 공격군의 사지를 끊어 놓았다. 한번 공격에 수만 명의 병사가 죽거나 부상당하는 소모전이 이어졌다. 대포와 기관총으로 대표되는 지상화력은 비약적으로 발전했지만 집단돌격에 의존하는 공격전술은 크게 달라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 베르댕 강좌의 교훈

 비미능선 공격을 준비하던 캐나다 지휘관들은 새로운 전술을 고민하기 시작했다. 기존 방식으로는 높은 능선에 위치한 독일군의 강력한 방어벽을 뚫기 어렵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그들은 우선 성공적 작전이었던 베르댕 전투(1916)의 경험을 듣기 위해 모였다. 흔히 ‘베르댕 강좌’라 불리는 일련의 전투분석과 토론과정을 통해 캐나다군 지휘관 아서 커리(Arthur Currie·1875~1933)는 포병전력의 우위를 중심으로 한 시간대별 ‘세트 피스(set piece)’ 공격계획을 수립했다. 포병의 포막사격(barrage)과 보병의 진격을 정교하게 결합해 독일군의 방어벽을 뚫겠다는 계획이었다.

 영국의 인상주의 화가 리처드 잭(Richard Jack·1866~1852)의 작품 ‘비미능선 전투(The Battle of Vimy Ridge)’는 4.5인치 곡사포 부대가 포탄을 장전하는 모습을 담고 있다. 당시 캐나다군은 비미능선에 이르기까지 모두 4개의 공격 목표선을 설정하고 각 목표선까지를 다시 10개 내외의 세부공격선으로 나눠 일제히 포막사격을 실시한다는 계획이었다. 보병들은 포막사격과 거리를 두고 진격하되 공격선을 유지토록 했다. 공격 동력을 잃지 않기 위해 부대를 둘로 나누어 서로 건너뛰면서(leapfrog) 공격하는 방안도 세웠다.

 독일군 참호 공격을 담당한 것이 480여 대의 18파운드 야포였다면 독일군 후방에서 지원군이 투입되는 것을 막기 위해서는 4.5인치 장거리 곡사포가 동원됐다. 참호 속 독일군을 제압한다고 해도 후방 지원군을 막지 못하면 역공격을 당할 수 있는 상황이었기 때문이다.

 문제는 4.5인치 곡사포의 포격 지점이 능선 너머에 있었기 때문에 정밀한 척후와 관측이 없다면 정확한 사격이 불가능하다는 점이었다. 이 일을 담당한 것이 영국 공군의 쌍엽전투기들이었다. 그림 중앙 상단에 새처럼 하늘을 날고 있는 쌍엽비행기를 발견할 수 있는데, 이들이 독일군의 움직임과 포격지점을 알려줌으로 효과적인 공격이 가능했던 것이다.

 

 ● 곡사포 공격으로 적 지원 차단

 4월 9일 새벽 5시30분 시작된 전투는 30분 단위로 세부목표선을 달성해갔다. 일부 지역에서 강력한 저항이 있었지만 시간에 맞춘 정교한 포막사격과 보병 진격이 세트 플레이를 연출하며 작전은 성공적으로 전개됐다. 4월 초순임에도 불구하고 싸라기눈을 동반한 강한 북서풍이 독일군의 얼굴에 매섭게 몰아쳤다. 독일군의 저항이 거센 지역에는 독가스가 살포되기도 했다. 그림의 병사들이 방독면 주머니를 차고 다녀야 했던 이유였다. 이후 3일 동안 격전을 치른 뒤 비미능선과 인근 지역들은 연합군의 수중에 들어왔다. 작전계획에 따라 거의 완벽하게 실행된 전투였다.

 물론 1만여 명의 적지 않은 사상자가 발생했지만 비미능선 전투는 당시 서부전선에서 가장 성공적인 진격작전으로 평가받았다. 피아 전력에 대한 정확한 분석과 우위전술의 수립, 철저한 준비와 실행이 승리의 요인이었다. 캐나다군은 후방에 실물 크기의 모형을 만들어 놓고 공격훈련을 실시했다. 분대 단위까지 세밀하게 임무를 부여하고 초급지휘자의 부상에 대비해 차상위 병사들을 교육시켰다. 작전지형도 4만여 장을 제작해 분대 하사관에게까지 배포한 것은 전체 작전계획 속에서 자신의 역할을 분명하게 이해시키기 위한 것이다. 철저한 준비와 훈련이 병행됐기 때문에 가능했던 승리였다.

 그림에는 야트막한 비미능선을 배경으로 4.5인치 곡사포와 포병들의 모습이 사실적으로 그려져 있다. 우리가 이 작품에서 사실성을 느끼는 것은 정확한 묘사 때문이 아니라 주어진 상황에서 느낄 법한 ‘인상’을 잘 표현했기 때문이다. 우리가 뭔가를 본다고 했을 때 우리가 보는 것은 사물의 순간적인 인상일 따름이다. 사물이 갖고 있는 고유함과 변화를 동시에 보여주기 위해서는 고전주의 그림에서 발견되는 뚜렷한 윤곽선이나 정교한 세부묘사의 유혹에서 벗어나야 한다. 가까이 다가서면 작은 붓질 자국이 보일 정도로 거칠게 그려졌지만 몇 발짝 떨어져서 보면 오히려 더욱 사실적이고 그래서 더욱 생동감 넘치는 것이 인상주의(impressionism) 그림이다.

 

 ● 확실함에서 비롯된 침착한 분위기

 그렇다면 이 그림에서 느낄 수 있는 인상은 무엇일까? 대부분의 낭만주의 전쟁화에서 발견되는 병사들의 투혼과 격정은 보이지 않는다. 병사들은 침착하게 자신의 임무를 아무런 감정 없이 수행하고 있는 느낌을 받는다. 여기저기 피어오르는 하얀 포연이 전투의 치열함을 드러내고 있지만 전반적으로 매우 안정적이고 체계적으로 움직이고 있다는 인상이 지배적이다. 이러한 인상은 당시 전투에서 보여주었던 전술적 확실성, 구체적이고 정확한 임무 부여, 명료한 역할 인식의 결과가 아닌가 한다. 모든 것이 불확실한 상황에서라면 이런 정도의 침착함을 발휘할 수 없을 것이다. 정밀한 포격은 포반원들의 일사불란한 협력에 의해 가능하다. 불안과 격정을 가라앉히고 침착하게 자신의 임무를 차질 없이 수행할 때 승리할 수 있는 것이다.

 안정과 침착함은 확실함에서 나온다. 적을 압도할 수 있는 우위전술(작전계획)이 마련되고 이에 따른 철저한 준비와 훈련이 이뤄졌다면 그 어떤 전투에서도 승리를 확신할 수 있다. 이 작품은 바로 그러한 확실함에서 비롯된 침착한 분위기를 인상적으로 전해주고 있는 것이다.

중앙대 정치국제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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