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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보다 ‘우리’ 먼저 생각 현란한 가락엔 삶이 녹아…

기사입력 2015. 03. 31   17:03

<99> 임실필봉농악 인간문화재 양진성

초대 인간문화재 양순용 명인의 장남, 6대에 이은 농악 계보 

세계 30여개국 순회 공연… “아들들도 국악 전공, 7대 잇는다”

 



 

 

임실필봉농악의 흥겨운 연희 장면.

 

 

 호남농악은 서울을 기준으로 동부내륙지역인 왼쪽(임실 무주 남원 구례 보성 등 27개 시 군)은 좌도농악, 서해평야지역의 오른쪽(익산 김제 고창 영광 해남 등 36개 시 군)을 우도농악으로 구분한다. 좌도농악은 쇠(꽹과리)가락이 빠르고 상모놀이가 눈부시며, 우도농악은 쇠가락이 느린 반면 진풀이가 다양하고 장구가락이 우렁차다. 임실필봉농악(국가 중요무형문화재 제11-5호·1988. 8. 1 지정)과 구례잔수농악(국가 중요무형문화재 제11-6호로 보유자 없는 단체종목·2010. 10. 21 지정)은 좌도농악이고 우도농악으로는 이리농악(국가 중요무형문화재 제11-3호·1985. 12. 1 지정)이 있다.

 유네스코가 한국농악을 세계 인류무형유산으로 등재(2014. 11. 27)하기 전 현장답사에 나섰던 고위관계자들이 임실필봉농악(이하 필봉농악)을 참관하고 크게 감동했다. 그들은 40여 명이 경연하는 대규모 놀이임에도 불구하고 특정개인의 기교보다 단체화합을 중시하는 협화(協和)적 팀워크에 갈채를 보냈다. 쇠가락이 힘차고 씩씩한 데다 맺고 끊음이 분명한 점에도 주목했다.

 350여 년의 역사를 가진 필봉농악은 전북 임실군 강진면 필봉리에 전승돼 오는 풍물 굿으로 호남좌도농악을 대표한다. 필봉(筆峰)이란 명칭은 마을 뒷산 정상이 풍수지리적으로 붓끝 모양을 닮았다 해서 유래된 것이다. 예부터 필봉마을에는 당산굿·마당밟기 등의 단순농악이 전래돼 왔는데 1920년께 전판이→이화춘 계보의 박학삼(1884~1968) 상쇠가 이곳에 정착하며 유명세를 치르기 시작했다.

 박학삼에게 배운 송준호(1898년생)가 양순용(1942~1995) 명인에게 그 예기(藝技)를 전하면서 필봉농악은 비로소 꽃을 피우게 된다. 양 명인은 필봉마을 토박이로 ▲임실농악경연대회 장원(1963) ▲전북농악경연대회 장원(1974) ▲전주대사습놀이 농악장원(1978) ▲전국민속예술경연대회 대통령상(1980) 등을 휩쓴 전설적 명인이다. 필봉농악의 초대 인간문화재로 허튼가락과 부들상모의 일인자였던 그는 구전으로 전해오던 필봉 굿을 체계적으로 정리해 인류무형유산으로 등재되는 토대를 마련했다.

 양 명인은 임종 직전까지 도(都) 상쇠로 꽹과리채를 놓지 않았는데 그 재능은 2대 인간문화재(2008. 12. 19 지정)인 장남 진봉(津峰) 양진성(梁晋盛·50) 예능보유자에게 전해져 필봉농악 계보는 6대를 아우른다. 진봉은 ‘필봉농악의 공연학적 연구’란 논문으로 전북대에서 문학박사 학위(2008)를 받아 필봉농악의 학문적 이론과 체계를 수립한 민속학자다.

 “아버님의 어깨 위에 올라 무동을 탄 게 8세 때부터입니다. 그 위에서 바라본 세상은 참 좋았고 마을 사람들의 미소가 아름다웠어요. 초등학교에 입학하며 상쇠를 맡았으니 필봉농악과 함께한 세월이 어언 43년째네요.”

 필봉농악대는 흰 바지저고리에 남색 조끼를 입고 원색 띠를 두른 경쾌한 복장이다. 쇠잡이만 상모를 쓰고 나머지는 고깔 차림이며 특정인의 기량보다 전체단결을 중시한다는 점이 다른 농악과 다른 점이다. 농악에서는 드물게 섣달그믐의 매굿·정초의 마당밟기굿·정월보름굿·당산굿·농사철의 두레굿·판굿 등 공연 굿의 종류가 다양하다.

 이 가운데 여름철 세벌 김매기를 끝내고 벌이는 판굿 중 채굿(1~7채)은 악·가·무가 습합된 한류문화의 원조라고 민속학계서는 평가하고 있다. 외진 산간지역으로 외부 교류가 원활치 못했던 것이 오히려 득이 되었고 토착신앙과 마을농악이 마을굿 형태로 굳어지며 원형대로 보존될 수 있었던 것이다. 필봉마을 건너편에 건립된 필봉문화촌에선 매년 중요무형문화재로 지정된 국내 6개 농악대를 초청해 전통문화 소리공연과 함께 놀이를 통한 체험의 장을 만들어 가고 있다.

 “농경사회를 기반으로 살아온 우리네 삶 속에는 공동체 의식이 녹아 있습니다. ‘나’보다 ‘우리’가 우선이었지요. 슬픔과 행복을 함께 공유하며 고통분담을 이끌어 낸 필봉농악의 지혜가 바로 ‘푸진 굿 푸진 삶’의 원형입니다.”

 필봉리에서 태어나 일찌감치 필봉농악의 예인 길에 입문한 진봉은 임실 섬진중학교를 마치고 영남농악을 배워 지역적 균형을 유지하겠다는 일념으로 경남 남해고등학교로 진학했다. 이후 우석대→단국대를 거치며 국악을 전공한 그는 이론과 실제를 겸비한 우리 민속학계의 정통학자로 자리매김했다. 현재 원광디지털대 교수로 재직 중이며 장남(양종윤·23)과 차남(양종훈·22)도 대학에서 국악을 전공하고 있어 필봉농악의 7대 계보는 탄탄대로다.

 진봉은 필봉농악대를 이끌고 세계 30여 개 국가를 순회 공연했다. 가는 곳마다 현지인들은 필봉농악의 현란한 가락에 심취했고 한국농악이 지닌 무형의 공동체 문화에 매료됐다. 대원들은 각자의 생업을 갖고 있지만 고향의 전통예술을 지켜낸다는 애향심과 자부심으로 국내외 공연에 적극 동참하고 있다.

 필봉문화촌은 부친 타계와 함께 모든 것을 접고 이곳에 정착한 진봉의 열정으로 새롭게 변모했다. 교육 숙박은 물론 각종 편의시설을 갖추고 대학생 일반인의 풍물동아리를 대상으로 전수교육을 시키고 있다. 전통 한옥생활을 체험하러 부모 손잡고 오는 초등학생까지 합치면 연인원 3만 명이 필봉문화촌을 다녀간다. 4년간의 교육과정 후 오디션을 거쳐 출신지역과 관계없이 전수조교와 이수자를 선발한다.

 “마을주민과 찾는 이들이 함께 정신적 풍요를 누리는 것이 협화정신입니다. 돈과 쌀뿐만 아니라 말(言)과 악(樂)도 푸져야 즐기는 문화에서 부가가치가 수반되는 푸진 굿이 되는 것 아니겠습니까?”

 진봉이 맡고 있는 상쇠는 농악 판의 전체 흐름을 이끌며 굿판의 시기와 성격을 정하는 기능까지 수행한다. 특히 필봉농악의 판굿 속에는 군영(軍營)놀이와 수박(手搏)치기도 포함돼 있어 국가에 대한 충성심과 호국정신 함양도 세심히 챙겨야 한다. 농악대 행진에 영기(令旗)와 대포수(大砲手)가 등장해 장엄한 분위기를 연출한다.

 “아버님께서는 ‘마당은 삐뚤어졌어도 꽹과리는 똑바로 쳐야 한다’면서 ‘필봉농악을 가문의 짐으로 받아들여 몸으로 녹여내라’고 가르치셨어요. 뒤늦게 큰 뜻을 알 것 같습니다.”

이규원 <시인· ‘조선왕릉실록’ 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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