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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경야극’ (晝耕夜劇) 의 혼‘천년 맥’을 잇다

기사입력 2015. 03. 17   16:34

<97>강릉단오제 관노가면극 예능보유자 김종군

피란 내려와 소작농·목수일 

낮에 일하며 밤에 가면극 배워

여러차례 팀 해체 위기 딛고

강릉단오제 꽃으로 자리매김

˝최소 10년은 배워야 무대 서죠”

 

 



 


 

 

 

 철저한 현장조사와 엄격한 심사과정으로 권위를 인정받는 유네스코 세계유산위원회가 각국의 명절축제 중 ‘인류구전 및 무형유산걸작’으로 선정(2005. 11. 25)한 건 우리나라의 강릉단오제가 최초다. 유네스코는 강릉단오제의 문화적 독창성과 뛰어난 예술성에 찬사를 보내고 풍자와 저항의식 대신 공동체 질서를 수호하고 주민 간 화합을 추구한다는 점도 높이 평가했다. 동시에 1천 년이 넘는 고대 제례의식이 온전히 전수되고 있음에도 주목했다.

 국가 중요무형문화재 제13호로 지정(1967. 1. 16)된 강릉단오제(江陵端午祭·이하 단오제)는 한국가면극 중 유일한 무언극으로 대사 없이 춤과 행위로만 연희하는 팬터마임(pantomime)이다. 신분제도가 혁파(1894)되기 전 강릉지역 관노(官奴)들이 탈을 쓰고 추던 춤이어서 관노가면극으로도 불린다. 1909년 폐지됐던 이 춤이 강릉 고로(古老)들의 증언으로 복원될 때 “하필이면 노비 춤이냐”는 구설에까지 올랐던 민중 연희다.

 복원 후의 반응은 예상외로 뜨거웠다. 등장인물(양반광대1, 소매각시1, 장자마리2, 시시딱딱이2, 악사 20명) 모두가 남을 헐뜯지 않고, 5과장(장자마리의 개막·양반광대와 소매각시의 사랑·시시딱딱이의 훼방·소매각시의 자살소동·양반광대와 소매각시의 화해) 내용이 서로 긴밀하게 이어지며 계층 간 상생 분위기를 주도했기 때문이다. 다른 지방의 가면극은 각 과장이 독립적인 스토리로 엮어져 단막극 형태로 꾸며진다.

 강릉은 일찍이 한반도 고대국가였던 동예의 땅으로 봄(5월 단오), 가을(10월 무천)마다 제사를 지내왔다. 이곳 사람들은 예부터 대관령 서낭신에게 제사지내면 마을 평안과 농사 번영은 물론 가내의 무사태평까지 이룰 수 있다고 믿어왔다. 삼국 통일 이후 제사 대상은 김유신(595~673) 장군이고 서낭신은 범일(810~889) 국사가 됐다. 제사 후에는 반드시 악·가·무가 뒤따랐는데 이 연희가 오늘날 단오제의 핵심 놀이문화로 떠오르며 세계인들을 감동시키고 있는 것이다.

 민속학계서는 김동하·차형원 초대 인간문화재가 강릉관청 이속(吏屬) 출신이어서 춤의 원형 그대로가 전수되고 있음에 큰 의미를 부여한다. 관노가면극의 예맥은 2대 권영하(1918~1997) 인간문화재(1993. 8. 2 지정)에게 이어졌고 3대는 2000년 7월 22일 인간문화재로 지정된 고명(高明) 김종군(鍾群·76) 예능보유자가 물려받았다. 고명은 강원도 양양군 강현면 상복리 태생으로 6·25 전쟁 전에는 북한 지역이었다고 한다.

 “10세가 되기 전 부(김정배) 모(이아지)를 여읜 고아가 강릉으로 피란 내려와 아들 없는 친척 집에 얹혀살았지요. 죽으로 하루 한 끼씩 연명하면서도 야학으로 배움의 길을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당시 마을 단위로 풍장을 치며 농사를 지을 때 고명도 농악을 배웠는데 이것이 중요무형문화재 제11-4호로 지정(1985. 12. 1)된 강릉농악의 모태다. 소작농으로는 생계가 막막해지자 그는 목수 일로 전국을 떠돌며 가족을 부양했다. 식구가 그리워 강릉 집에 들른 1984년 3월의 어느 날, 권영하(2대 인간문화재) 춤꾼이 고명을 찾아왔다. “나는 관노가면극이 한국의 대표 춤이 될 것이라 굳게 믿네. 자네는 농악에서 큰 소질을 보였으니 일을 하면서라도 춤을 배워 강릉을 빛내 주게나.”

 고명은 고향에 남은 청년들을 모아 낮에는 일하고 밤에는 가면극을 배웠다. 참가자들 모두 연극에 대한 지식부족과 악기연주 미숙으로 팀 해체 위기를 여러 번 맞았지만, 그는 끝까지 가겠다는 일념으로 버텼다. 고명은 양반에서 관노까지 모든 계층이 어우러져 사회적 이질감을 극복해 내고 지역주민을 하나로 묶는 구심체로서의 단오제 역할에 깊이 빠져들었다.

 “단오는 설·추석과 함께 우리 민족의 3대 명절 중 하나입니다. 추석이 수확축제라면 양기 숫자 5가 두 번 겹치는 단오는 곡물 생육을 기원하는 성장축제지요.”

 ‘꽃밭일레 꽃밭일레 사월보름 꽃밭일레/ 지화자 좋다 얼씨구 좋다 사월보름 꽃밭일레.’ 강릉시 지변동 관노가면극 전수관에서 만난 고명은 어릴 적 대관령 서낭당에서 무당들이 제사 지내며 부르던 ‘산유화가’를 기억한다고 말했다.

 강릉단오제는 음력 3월 20일(이하 음력) 신주(神酒) 빚기→ 4월 1일 대관령 성황사 제사→ 15일 대관령 국사당 제사→ 27일 무당굿→ 5월 1~5일 단오굿과 관노가면극→ 7일 송신제의 일정으로 매년 강릉시내 남대천 변에서 대규모로 펼쳐진다. 단오제의 제사의식 속에는 유교·무속·불교의 제례 절차가 공존하고 있어 세계무속학회가 문화인류학적 가치를 높이 평가하고 있다. 현재 조규돈(69·제관) 빈순애(57·무녀) 예능보유자가 별도의 인간문화재로 지정(2000. 7. 22)돼 있다.

 한 달 넘게 지속되는 단오제 기간에는 전국 최대 규모의 난장이 들어서 전통민요 부르기·서커스 공연·시 낭송회 등 여러 경연과 함께 단오부채 만들기·수리취 떡 빚기·관노가면 만들기의 각종 체험행사도 곁들여진다. 이 지방 토산물과 전통음식이 인기를 끌며 강릉 일대는 대목 장터로 변한다. 국내 관광객은 물론 외국 관광객이 점차 늘어나 강릉단오제의 세계적 인기를 실감한다고 고명은 강조한다.

 “춤 동작에는 각자의 느낌과 습관이 녹아 있어 저마다 달리 표현되지요. 적어도 10년 이상은 꾸준히 배워야 무대에 설 수 있는데 생활보장을 장담할 수 없어 함부로 권하기가 힘듭니다.”

 강릉단오제의 꽃인 관노가면극에서 그는 인기 절정의 양반광대역을 맡고 있다. 무서운 탈을 쓴 시시딱딱이의 훼방에도 불구하고 소매각시와의 사랑을 지켜낸다는 순애보적 양반상이다. 극 중 장자마리는 포댓자루 같은 검은 삼베옷을 뒤집어쓴 마귀 형상으로 우리나라 가면극에선 유일하게 강릉단오제에만 등장해 관련학계의 연구대상이다. 이 같은 인물 설정은 양반과 잡귀까지 포용해 천·지·인이 하나 되는 중도사상으로도 풀이되고 있다.

 고명은 세계 3대 마임축제 중 하나인 프랑스 ‘페리그 미모스 마임축제’(2000년 10월)의 초청공연 때 현지 연극인들이 보여준 수준 높은 관심과 언론보도를 항상 가슴에 보듬고 있다. 관노가면극의 예맥은 주영건(68) 안병형(54) 전수조교와 최영선(64) 이수자가 잇고 있다. 강릉시내 초·중·고·대학 및 일반인까지 총 21개 단체가 전수활동을 벌이고 있다.

이규원 <시인· ‘조선왕릉실록’ 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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