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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땐 보여주지 못했던 속<續> 이야기 “이젠 말 할 수 있다”

윤병노 기사입력 2014. 10. 20   18:07

⑩ 지면에 못 밝힌 취재 에피소드?

 1990년 평양 취재 때 북한 관계자가 기자 볼펜 뺏더니 해부…녹음장치 검사 해프닝

 2008년 이라크 자이툰 부대 합류한 기자…비공식 출국하는 바람에 재입국 불가능


 

기사를 위한 기자의 여정은 활자로 마무리된다. 하지만 이 과정의 모든 내용이 독자들에게 전해지는 것은 아니다. 한정된 지면과 국방일보라는 매체 정체성의 한계, 때로는 기자의 부족함(?)이 장벽으로 작용해 많은 부분이 기사화되지 못하고 묻힌다. 그렇게 50년 동안 풀어놓지 못한 취재 뒷얘기는 이제 책 한 권이 부족할 분량으로 쌓여 있다. 어찌보면 기사보다 더 흥미진진한 이 에피소드를 창간특집이란 형식을 빌려 소개한다.

 

 ● ‘신문이냐 교재’냐 제호 논란… 박정희 대통령 창간축하 친필휘호

 국방일보(당시 ‘전우’)는 탄생 순간부터 흥미진진한 스토리를 품고 있다. 1964년 11월 16일 세상에 첫선을 보인 ‘전우’의 제호 결정 과정은 순탄치 않았다. 국군장병을 위한 진중신문이라는 특수성을 감안해 ‘국방일보’ ‘국방신문’ ‘호국신문’ ‘방패’ ‘전우’ ‘정훈보’ 등 다양한 의견이 제기·검토됐다. 그리고 며칠간 난상토론 끝에 최종적으로 ‘전우’가 선택됐다. 장병들의 단결력과 전우애를 상징적으로 표현하며 병사들과의 관계를 밀접하게 나타낼 수 있다는 판단에서다. 하지만 문제는 또 있었다. ‘전우’란 제호 뒤에 ‘신문’이나 ‘일보’를 표기해야 하는가라는 문제였다. 결국 일간 신문 발행에 무리가 있었던 당시 상황을 감안해 ‘신문’이나 ‘일보’ 명칭 사용은 추후 재고 상황으로 남게 됐다.

 창간호에 고(故) 박정희 대통령이 축하 친필휘호를 보내줬다는 사실도 세간에 잘 알려지지 않았던 부분이다. 당시 박정희 대통령은 ‘戰友愛’(전우애)라는 친필을 직접 써 보내 첫 진중신문의 탄생을 축하했다.

 

 ● ‘귀환’을 ‘귀순’으로 오자 소동

 신문에 있어 정확한 단어 사용은 생명과 같다. 창간 5년여가 지난 1970년, ‘전우’ 신문은 단 한 글자의 오자로 배포된 신문을 모두 회수하는 대형 사고를 치고 만다. 1969년 12월 말 강제 피랍됐던 칼(KAL)기 탑승자들이 2개월의 북한 억류 끝에 귀환하는 소식을 전하면서 1970년 2월 17일자 신문에 귀환한 승객들을 ‘귀순자’로 잘못 표기해 발행한 것. 편집과 교정상의 실수였지만 파문은 컸다. 편집실은 발칵 뒤집혔고 결국 배포된 신문을 회수하고 다시 수정, 배포해야만 했다. 하지만 이날의 실수는 더 큰 발전을 위한 소중한 경험이 됐다. 대(代)를 이어 현재까지 편집자들에게 정확한 신문 제작을 위한 교훈으로 전해지고 있다.

 

 ● 일거수 일투족 감시 속에 진행된 국방일보 평양 취재

 국방일보는 창간 후 모두 네 차례에 걸쳐 평양을 방문 취재하며 군 매체로서의 위상을 높였다. 물론 평양 취재는 ‘국방일보’의 특성상 일반 매체보다 훨씬 강도 높은 감시와 통제 속에 이뤄졌다. 1990년 10월 ‘제2차 남북총리회담’ 취재를 위해 평양을 방문했던 이상윤(전 국방일보 편집실장·작고) 기자는 당시의 어려웠던 상황을 국방일보 창간 40년사에서 상세히 밝히고 있다. 특히 이 기자는 본인이 소지했던 볼펜에 대한 에피소드를 전하며 북한 사회의 폐쇄성을 고발했다. 당시 이 기자는 국군 공수부대원들이 사용하던 얼룩무늬 볼펜을 사용했는데 북한 관계자들이 기회만 되면 그것을 빼앗으려 시도했다. 결국 볼펜을 뺏긴 이 기자는 북한 관계자가 볼펜 몸통을 해부하는 모습을 본 후에야 그 이유를 알게 됐다. 이 기자는 북한 관계자가 ‘볼펜에 특수장치(녹음장치)가 있는 줄 알았다’고 고백했다는 웃지 못할 기억을 국방일보 40년사에 담았다.

 ● 가고 싶어도 갈 수 없는 그곳… 이라크 공식적 재입국 불가능

 본지 이주형 기자(현 사회문화팀)는 공식적으로 이라크에 입국할 수 없는 신분이다. 여권상 이라크 출국 기록이 없기 때문이다. 이 기자는 이라크 아르빌에 주둔했던 자이툰 부대의 2008년 12월 철군 과정을 동행 취재했다. 직항로가 없는 만큼 가는 길도 쉽지 않았다. 중국 베이징을 거쳐 오스트리아 빈에서 1박을 한 후 아르빌행 여객기를 타는 강행군 끝에 자이툰 부대에 합류했다. 하지만 나오는 길은 이러한 공식 항로를 거치지 않았다. 자이툰 부대와 함께 군 수송기를 타고 쿠웨이트로 나온 뒤 다시 대한항공 전세기를 이용해 성남 비행장으로 입국했다. 당연히 출국 기록이 없다. 이라크 재입국은 불가능하게 된 셈이다.

 이 기자가 전하는 성남 비행장 귀국 상황도 흥미롭다. 이 기자는 “당시 모 신문기자와 함께 가장 먼저 비행기에서 내려 군 장병들의 역사적 귀국 장면을 사진에 담으려 했는데 문을 열자마자 카메라 플래시 세례가 터져 고개를 숙여야만 했다”고 회상했다. 물론 촬영은 엄두도 내지 못했다고. 파병 당시의 극심한 반대와는 달리 귀국은 열렬한 환영 속에 이뤄졌기 때문이었다.

이 기자가 전하는 귀국에 얽힌 또 한 가지 에피소드. 출국 당시 인천공항에서 휴대폰 로밍 서비스를 신청했던 모 신문사 기자는 성남비행장으로 귀국한 탓에 또다시 인천공항으로 직행하는 불편(?)을 감수해야만 했다.

 

 

국방일보 발령 겨우 5일

새내기 기자에게 떨어진

특전사 무인도 훈련 취재

‘정글의 법칙’은 애교였다

 


 

 기자가 국방일보에 발령 받고 5일 만인 지난 8월 6일. 육군특수전사령부의 무인도 생존 훈련에 동참하라는 데스크의 지시가 내려졌다.

당시 우리 군, 그것도 고된 훈련으로 유명한 특전사의 훈련을 약간 우습게 본 것도 사실이다. ‘그래도 기자인데 심한 훈련은 시키지 않겠지’라는 안이한 마음을 가진 것도 인정한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이런 기자의 생각은 ‘전혀 아니올시다’였다.

고무보트를 타고 들어간 섬에는 적막만이 감돌았다. “대원들은 어디 있느냐”고 물었더니 “저 산 안쪽”이라고 했다. 훈련은 단순히 생존만이 목표가 아니었다. 언제 들이닥칠지 모를 적에 대비해 은신과 경계까지 함께 하고 있었던 것이다.

정글 생활은 고난의 연속이었다. 정글도로 넝쿨을 쳐내고 야전삽으로 땅을 파 한 몸을 숨길 은거지를 마련하는 것은 오롯이 기자의 몫이었다.

전역 이후 삽을 손에 쥐어 본 적이 없었던 기자의 이마에 맺힌 땀을 씻어주겠다는 듯 거센 비까지 내렸다. 대원들이 모처럼 잡은 야생동물 역시 비 때문에 ‘그림의 떡’ 신세였다. 산속 모기는 대낮부터 기승을 부렸다. 몰아치는 비 때문에 기자는 특전대원들과 함께 정글에서 동숙하는 것은 면하게 됐다.

하루의 ‘실습’에 만신창이가 된 기자와는 달리 특전대원들은 일주일간 이런 생활을 계속해야만 했다. 기자의 첫 훈련 현장 취재는 ‘발로 뛰는 국방 현장 취재’의 어려움을 고스란히 보여준 경험이 됐다. 또 언제 어떤 상황에서도 승리하기 위한 우리 군의 강한 모습을 체감한 잊지 못할 취재가 됐다.

 

 

1월 혹한기 첫 GOP 취재 나선 신참 기자…돌아와 신종플루 ‘끙끙’

 


 

입사한 지 6개월 차였던 지난 2011년 1월 4일. 기자는 새해를 맞아 새롭게 편성된 ‘부대열전’ 코너 취재를 위해 강원도 철원 육군3사단 진백골연대 GOP부대를 찾았다.

 당시 무릎까지 쌓인 눈과 칼날 같은 강풍으로 기온이 영하 20도를 훌쩍 넘었고, 체감온도는 영하 30도는 족히 됐다.

 기세등등한 동장군의 기세를 신입 기자의 패기로 맞받아치면서 용감하게 최전방 부대를 찾았다.

 하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손과 발이 꽁꽁 얼어 견딜 수 없었고, 양 볼과 귓불은 이미 내 것이 아닌 양 얼얼해 감각마저 무뎌졌다. 그런데 밖의 추위와 대조적으로 몸 안은 불덩이처럼 달아올랐다. 그러나 첫 최전방 취재라는 사명감에 새내기 기자로서의 오기가 발동해 계획한 취재를 끝까지 해냈다.

 문제는 모든 취재 과정을 성공적으로 마치고 나서 터졌다.

저녁 때 집에 도착해 체온을 재보니 무려 39도였다. 눈까지 시뻘겋게 충혈됐다. 온몸이 두들겨 맞은 듯 아팠다. 부랴부랴 집 근처 모 대학병원 응급실을 찾았다.

 당시는 신종플루가 유행하던 때였다. 의사가 간이검사를 해보자고 했다. 검사 결과 신종플루 확진(A형 독감)으로 나왔다. 다음날부터 닷새 동안 집에서 격리돼 ‘타미플루’를 처방받아 복용했다. 음식은 방문을 통해서만 받아 먹고, 온 가족 모두 나와 ‘접근금지’ 상태가 돼버렸다. 마치 영화 ‘올드보이’의 주인공이 된 듯했다.

 그렇게 첫 GOP부대 취재 신고식을 톡톡히 치렀다. 지금 생각해도 그 추위를 견뎌내는 장병들이 대단하다. 든든한 이들이 있기에 오늘 우리가 존재한다는 사실을 새삼 느끼게 만든 취재였다.

 

민·군 복합형 관광미항 추진

제주 강정마을에 도착한 기자

불법점거로 폐허…망연자실

진실 조명 보도로 사업 물꼬

 


 

2011년 7월 11일 제주특별자치도 서귀포시 강정마을에 건설하는 자연친화적 민·군 복합형 관광미항 조성 현장. 강정마을 입구는 관광미항 건설을 반대하는 일부 시민단체가 걸어 놓은 플래카드와 붉은 깃발이 난무했다.

 항만공사가 한창이어야 할 중덕 해안가는 무허가 천막이 점령했다. 올렛길 7코스를 연결하는 아름다운 풍광은 온데간데없었다.

 외해(外海)의 파랑(波浪)을 막아낼 방파제 블록(Block) 제작 현장도 상황은 마찬가지였다. 공사를 위한 중장비는 한 대도 보이지 않았고, 빗물에 녹이 슨 블록 제작 케이스와 무성한 잡초는 폐허를 연상케 했다.

 국책사업으로 진행하는 ‘민·군 복합형 관광미항’이 일부 시민단체의 불법점거 농성으로 표류하던 당시 ‘절차의 합법성’ ‘국가안보·지역경제 파급 효과’ ‘기지 건설에 따른 오해와 진실’을 주제로 3회에 걸쳐 이 문제를 집중 조명했다.

 민주적이고 적법한 절차로 이뤄진 부지 선정 과정, 안보·경제·자원 주권의 중심, 근거 없는 낭설·왜곡에 대한 진실 등을 게재했다. 결과는 대만족이었다. 국책사업이 일부 반대에 의해 중단돼서는 안 된다는 여론에 불씨를 지핀 것. 특히 국방부 관계관으로부터 국정감사 보고자료로 활용해도 되느냐는 전화를 받고 흔쾌히 수락했다.

 제주 민·군 복합형 관광미항은 최첨단 친환경 공법을 적용, 자연이 살아 숨쉬는 미항(美港)으로 건설 중이다. 내년 말 완공하면 이지스(Aegis) 구축함 등 대형 함정 20여 척을 보유한 기동전단과 15만 톤급 크루즈 여객선 2척이 동시에 계류할 수 있다.

윤병노 기자 < trylover@dema.mil.kr >
맹수열 기자 < guns13@dema.mil.k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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