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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4년 조선 쌀 생산량의 64%를 수탈 군량미로 삼아

입력 2014. 10. 15   15: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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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5>일제와 쌀밥


러일전쟁 당시 日軍 일반환자 중 44% 각기병 걸려

쌀밥 천국 조선은 일제 강점기 옥수수 등으로 연명

 

 


 

  러일전쟁 때 일본 육군 군의관들은 수시로 몰려오는 환자 때문에 골치를 앓았다. 전선의 야전병원을 찾은 병사들 절반이 팔다리가 퉁퉁 붓고 때로는 호흡곤란 증세까지 보였다. 각기병 환자였다.

 군 의료 기록인 메이지전역육군위생사(明治戰役陸軍衛生史)에 의하면 러일전쟁 때 전투로 인한 부상병이 아닌 일반 환자 가운데 절반에 가까운 44%가 각기병 환자였고 숫자로는 11만751명에 달했다.

 각기병은 비타민 B1 부족이 원인으로 주로 잘 도정한 흰 쌀밥을 주식으로 먹을 때 생긴다. 잡곡밥만 먹어도 간단하게 치료할 수 있다. 하지만 당시에는 발병 원인을 몰랐기에 병사들에게 여전히 흰 쌀밥이 지급됐고 환자는 줄어들지 않았다.

 일본군 병사들이 쌀밥을 얼마나 먹었기에 그토록 엄청난 숫자가 각기병에 걸렸던 것일까?

청일전쟁 때 공표된 전시 병사 식량규정에는 병사에게 하루 백미 900g, 육류 및 생선 150g, 채소 150g, 장아찌 50g을 지급한다고 돼있다.

 쌀 한 공기가 대략 90~100g이니 식욕이 왕성한 20대 초반의 젊은 병사가 한 끼에 두세 공기씩 흰 쌀밥만 먹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의 양이다.

당시 일본 육군은 부식을 현물이 아닌 현금으로 지급하는 것이 원칙이었다. 전쟁터에서 고기와 생선, 채소 구하기도 쉽지 않았고, 된장이나 간장만 있어도 식사를 했던 일본인이기에 최소한의 반찬으로 쌀밥만 먹다가 각기병에 걸렸던 것이다.

 일본 육군은 그 많은 쌀을 어디서 조달했기에 병사들이 각기병에 걸릴 정도로 쌀밥을 먹였던 것일까?

자국에서 짓는 벼농사만으로는 생산량이 턱없이 부족했던 일본의 군량미 공급기지는 바로 한반도였다.

 물론 1904년부터 1905년까지 2년간 진행된 러일전쟁은 경술국치가 이뤄지기 전의 일이다. 그러니 한반도에서 마음대로 쌀을 수탈해 갈 수는 없었다.

 그 때문에 일본 군부는 상인을 앞세워 조선에서 쌀을 사들였다. 1900년을 전후해 일본의 상인들이 조선으로 몰려왔다. 일본 군부의 지원을 받은 이들은 조선의 친일파를 앞세워 엄청난 돈을 뿌려가며 쌀을 긁어모았다. 부산에서 진주를 거쳐 김제평야·호남평야 등 남부의 곡창지대를 돌아다니며 쌀을 사들여 침략전쟁의 군량미로 삼았다.

 조선을 강제로 병합한 1910년의 통계에 따르면 그해 조선의 쌀 총생산량은 약 1000만 석이었고 이 중 5%에 해당하는 54만 석을 일본이 가져갔다.

러일전쟁은 경술국치 전이니 이보다 적은 규모를 가져갔을 것이다. 그런데도 만주에 출병한 일본 병사들은 각기병에 걸릴 정도로 쌀밥을 배불리 먹으며 싸웠던 것이다.

 일제강점기가 시작되면서 조선에서 생산되는 쌀의 일본 반출은 총생산량의 10%에서 20%, 30%로 계속 늘어났다. 그리고 일본의 진주만 기습과 함께 태평양에서 제2차 세계대전이 시작되면서 쌀 수탈은 절정에 이르렀다.

그뿐만 아니라 전쟁에 필요한 기름을 짜야 한다며 갖가지 종자까지 모아서 바치도록 했고 놋그릇과 수저까지 공출해 갔다.

 일본은 중일전쟁 이후 전시체제에 돌입하면서 1939년 조선미곡 통제령을 발표, 조선 쌀의 통제를 제도화하면서 쌀 공출 제도를 실시한다.

 그 결과 1941년에는 쌀 생산량 2152만 석 중에서 43%를 빼앗아갔고 제2차 세계대전 막바지인 1944년에는 1891만 석 중에서 63.8%를 수탈했다. 한반도에서 농사 지어 수확한 쌀의 3분의 2를 가져간 것이다.

 농사 지은 쌀 대부분을 일제에 빼앗긴 상황에서 일제강점기 조선 사람들은 무엇을 먹고 살았을까?

만주에서 조를 비롯한 잡곡을 들여와 부족한 식량을 채우고, 감자·고구마·옥수수 등으로 끼니를 해결해야 했다. 심지어는 콩깻묵까지 먹으며 배고픔을 달래야 하는 비참한 상황이 됐다.

 흔히 우리는 옛날부터 쌀이 부족해 쌀밥은 일부 양반 계층만 먹었고 농민은 보리밥으로 연명하다 춘궁기 보릿고개를 맞으면 풀뿌리와 나무껍질로 허기진 배를 채웠던 것으로 알고 있다.

 하지만 그것은 일제 강점기 때의 이야기다. 일본에 나라를 빼앗기기 전인 18~19세기 조선은 쌀밥의 나라였다.

18세기 중반 이익은 성호사설(星湖僿說)에서 ‘전라도는 논이 많아 추수가 끝나면 백성은 모두 쌀밥을 먹고 콩과 보리는 천하게 여긴다’고 했다.

호남은 대표적인 곡창지대이므로 호남 농민에게만 해당하는 이야기는 아니었을까? 19세기 전후인 정조 때 승정원일기에는 당시 조선 백성은 모두 쌀밥을 먹었다고 나온다.

“백성의 풍속이 쌀을 귀하게 여기고 조를 귀하게 여기지 않기 때문에 비록 가난하고 천한 무리라도 반드시 흰 쌀밥을 먹으려 들고 잡곡밥(脫粟)은 먹으려고 하지 않는다.”

 1910년 통계에 곡물 생산량 중 쌀이 약 44%를 차지했으니 백성들 대부분은 쌀밥을 먹었다는 이야기다. 국력이 쇠퇴하던 조선 말기에도 쌀밥을 먹던 조선 백성이 일제강점기를 거치며 쌀밥 구경이 어려워졌다.

우리가 쌀 자급을 이룬 것은 1975년이다. 일제 강점기는 36년이었지만 다시 쌀을 자급하기까지는 65년이 걸렸다. 나라가 힘을 잃으면 그 결과가 어떻게 되는지 쌀밥이 웅변으로 보여준다.

<윤덕노 음식문화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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