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항공 선각자들 창공을 내다보며 대한 독립을 외치다

이승복

입력 2014. 08. 20   18: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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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복군에 숨어있는 공군사



 

 

   우리나라 독립운동사 중  기억해야 할 소중한 유산

   이들의 불굴의 노력·헌신오늘날 우리 공군의 뿌리


   일제 강점기 때 항공력으로 조국의 독립을 꿈꾸며 역사를 써내려간 선구자들이 있다. 우리는 그들이 누구인지 잘 모른다. 어디서 어떤 활약을 했는지도 모른다. 항공독립운동이 우리 독립운동사의 매우 치열하고 중요한 부분이었음에도 그간 우리에게 잘 알려져 있지 않았던 것이 사실이다. 민족의 암흑기에 창공을 바라보며 공군의 힘으로 조국의 독립을 열망했던 이들의 항공독립운동사를 되짚어 본다.


 ● 항공독립운동사, 왜 알아야 하나

 그동안 우리나라 독립운동사 가운데 공백으로 남아 있어 그 내용과 의의가 조명받지 못했던 항공독립운동사는 우리가 반드시 기억해야 할 소중한 유산이다.

 우리가 항공독립운동사를 알아야 하는 이유는 그것이 대한민국 공군의 기원을 추적할 수 있는 소중한 단초이기 때문이다. 공군이 창설되기 30여 년 전부터 민족의 선각자들은 항공력과 공중 우세가 향후 전쟁 승리를 좌우하는 절대적인 요소가 될 것이라는 사실을 깊이 인식하고, 공군력 건설과 비행사 양성에 매진해 왔다. 이러한 노력들이 밑거름이 돼 오늘날 우리 공군이 형성·발전된 것이다. 따라서 항공독립운동사를 배우고 이해하는 것은 우리 공군의 뿌리가 어디에서 출발하며, 그 정체성이 어떻게 형성됐는지를 파악하는 의미 있는 작업인 것이다. 또한 항공독립운동사에는 국권 회복을 위해 신명을 바친 선배 조종사들과 열사들의 애국애족정신이 살아 숨쉬고 있다.

 타국에서 비행교육을 받아야 하는 열악한 여건 속에서도 우리의 선배 조종사들은 나라를 잃은 설움을 떨쳐내고 ‘하늘을 정복해 잃어버린 조국을 되찾겠다’는 일념으로 헌신해 오늘날 우리 공군의 든든한 정신적 버팀목이 되고 있는 것이다.

 

 ● 노백린, 곽임대- 하늘을 지배하는 자가 전쟁 승리

 우리 동포들이 가난을 피해 미국 하와이의 사탕수수밭으로 대거 이민을 떠나던 1903년. 이때가 우리 지식인들이 비행기의 존재를 처음으로 인식한 시기다. 이들이 비행기를 독립운동과 연계해서 생각한 것은 한일 강제병합 이후인 1910년대 후반부터로 판단된다. 독립운동에 항공을 접목시키자는, 당시로서는 선구적인 아이디어를 주창했던 대표적인 인물로는 노백린과 곽임대가 있다.

 노백린(1875~1926)은 대한제국군 장교로 근무하던 중 1907년 일제에 의해 강제 군대해산이라는 비운을 겪게 된다. 이후 일제의 모진 협박과 회유 속에서도 도산 안창호 선생과 독립단체 신민회에서 활동하고 백범 김구 선생과 교육운동을 펼치기도 했던 그는 미국으로 망명해 무장독립운동가 박용만과 함께 국민군단을 창설하고 독립군 양성에 힘썼다. 낯선 땅 미국에서 조국의 실상을 알리고 한민족의 독립운동정신을 고취시켰던 노백린은 항공력의 중요성에 대한 확고한 신념과 선견지명을 가진 사람이었다.

그는 “앞으로의 전쟁 승리는 하늘을 지배하는 자에게 있다”고 주장하며 강한 군대, 강한 국가 건설을 위한 비행사 양성의 필요성을 강조했다. 이에 따라 1920년 2월, 미국 캘리포니아 주에 한인비행학교인 ‘윌로우스(Willows) 비행학교’를 열고 우리 비행사를 양성하기 시작했다.

 노백린의 뒤를 이어 비행학교의 교장에 취임한 사람은 곽임대(1885~1971)였다. 일제가 우리나라 독립운동가들을 탄압하기 위해 날조한 ‘105인 사건’에 연루돼 옥고를 치렀던 그는 석방 후 1914년 미국으로 망명해 안창호·서재필 등과 함께 흥사단을 조직했다.

 다소간의 공군을 양성한다면 독립운동에서 공중전을 할 수 있다고 믿었던 그는 우리 비행사를 키우겠다는 노백린의 열의에 감동해 비행학교 설립을 위한 재정 지원과 자금 조달 역할을 맡았다.

이처럼 노백린과 곽임대의 헌신적 노력의 결실인 윌로우스 비행학교는 1923년까지 총 77명의 졸업생을 배출하며 비행사 양성의 요람이 됐다. 

 노백린과 곽임대는 항공의 중요성에 일찌감치 눈뜨고, 비행기술을 확보해 이를 독립운동에 적극 활용하려는 장대한 포부를 가졌던 민족의 선각자였다.

이들의 불굴의 노력과 헌신이야말로 오늘날 대한민국 공군의 자랑스러운 뿌리요 기원인 것이다. ” 안창호- 비행기로 민심을 격발하라

 도산 안창호(1878~1938) 선생은 교육·사상운동 등을 통해 민족의식을 일깨우고 조국의 자주독립을 추구했다. 그런데 그가 1920년대 초 누구보다 먼저 비행기에 관심을 가지고 독립운동에 사용할 목적으로 비행기를 구입하려 했다는 것은 잘 알려지지 않은 사실.

 1919년 중국 상하이에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수립되면서 안창호 선생은 임시정부와 국내의 긴밀한 연락을 위해 연통제라는 비밀연락망 조직을 만들었으나 일제의 집요한 감시와 탄압으로 와해되고 말았다.

하지만 안창호를 비롯한 임시정부 요인들은 연통제를 대체할 수단으로 비행기에 주목하기 시작했다. 국내·외의 독립운동 단체들 사이에 연락을 주고받고 민중에게 항일투쟁 의지를 북돋우는 선전물을 살포하기 위해서는 비행기가 최적이라고 생각했던 것이다.

 1920년 1월, 안창호 선생이 작성한 일기에는 비행기를 구입하기 위해 기울인 노력이 상세히 적혀 있다. 그는 비행기를 구입하고 비행기를 조종할 외국인 비행사를 구하기 위해 미국·필리핀·러시아·중국인들과 다각적인 교섭을 했다.

안창호 선생이 이토록 비행기를 원했던 것은 그가 일기에 적었던 것처럼 ‘비행기로 민심을 격발하고 장래 국내의 대폭발을 일으키기 위함’이었다. 그러나 중국 대륙을 횡단하는 연락용 장거리 비행기를 구입해 독립운동에 활용하려던 그의 계획은 임시정부의 자금 사정이 나빠지면서 아쉽게도 불발됐다.

 비록 비행기 구입은 좌절됐지만 그는 우리 젊은이들을 중국 군벌 산하의 비행학교에 보내 비행술을 배우게 함으로써, 장차 일본과 싸울 수 있는 독립군 비행사로 양성하고자 했다.

이처럼 장기적 안목에서 비행기와 비행사의 중요성을 간파하고 독립운동의 도구로 활용하고자 했던 안창호는 과연 선구적 혜안을 가진 민족의 지도자였다.

 

 

권기옥·서왈보 등 항공 선각자들  항일독립투쟁 독립운동에 맹활약

1940년대 한국광복군 비행대 창설 군사·외교적 승전국의 입지 확보

 

 

 

 

 ● 영웅적 활약을 했던 항공 선각자들 

 서왈보(1886~1926)는 우리에게는 낯선 이름이지만, 중국의 첫 한인비행사로서 당시 중국인들에게 영웅적인 대접을 받으며 맹활약했다. 서왈보는 23세 때 만주로 망명해 독립군으로 활동하며 왕성한 독립운동을 펼쳤다. 1920년 북경에 있는 남원항공학교를 졸업한 그는 4년 동안 중국 군벌 간의 전투에 20여 회 출격해 큰 전공을 올렸고, 자신이 다닌 남원항공학교에서 교관으로 근무하며 비행사를 양성하는 등 탁월한 실력을 지닌 전투비행사로 이름을 날렸다.

 한국 최초의 여성 비행사 권기옥(1903~1988)은 임시정부의 추천을 받아 1923년 4월 중국 운남항공학교 1기생으로 입학하며 비행사로서 첫걸음을 내디뎠다. 항공학교에 입학한 권기옥은 “비행기 타는 공부를 해 일본으로 폭탄을 안고 날아가리라”는 결연한 각오를 불태웠고, 2년 동안 비행술을 배운 뒤 1925년 2월에 졸업했다. 이후 그녀는 중국 항공대 창설 멤버로 활약하며 10여 년을 한국 최초의 여류 조종사로서 중국의 하늘을 누볐다. 해방 후인 1947년 귀국한 그녀는 국회 국방위 전문위원으로 활동했고, 대한민국 공군 창설에도 큰 힘을 보탰다.

 이외에도 전상국·임도현·김연기·김공집·서왈보 등 수많은 항공 선각자들이 항일독립투쟁을 하며 독립운동에 큰 역할을 했다.

 

 ● 임시정부의 공군설계위원회

 대한민국 임시정부는 1940년 9월 한국광복군을 창설했다. 그리고 진주만 침공에 따른 미국의 참전으로 국제정세가 일본을 압박하는 분위기로 흐르자 직접 대일(對日) 선전포고를 하고 일본과 전면적인 전쟁을 벌일 준비를 시작한다. 이를 위한 방안으로 임시정부는 광복군에 비행대를 편성해 국내 진공작전을 펼치려는 계획을 세웠다. 광복군의 참모차장이었던 최용덕의 주도로 만들어진 ‘공군설계위원회’에서 그 기본 계획을 찾아볼 수 있다.

 1943년 8월 19일 발표된 공군설계위원회 조례는 당시 상황에서 미국과 합작해 한국 공군을 건설하기 위한 세부계획을 담고 있다. 공군설계위원회는 ‘일제의 무력 세력을 박멸하고 조국의 완전 독립과 세계의 영구평화를 쟁취하기 위해 공군 인원의 훈련 편대를 비롯한 각종 제반 사항을 미국과 공동으로 협상해 나갈 것’임을 밝히고 있다. 또 ‘최단 기간 내에 공군 작전을 개시하고, 나아가 건군·건국 중 공군 기초를 확립하겠다’는 방침을 세웠다.

 최용덕이 공군설계위원회를 결성하고 추진한 것은 우리 공군 건설의 구체적인 밑그림을 그리기 위한 목적도 있었지만, 한국인 비행사들을 연합군 비행대대에 파견해 항일전쟁에 공식적으로 참전시키기 위해서이기도 했다. 이러한 공군설계위원회의 노력은 1944년 4월 임시정부가 ‘한국광복군 비행대’ 창설을 준비하면서 더 구체화된다.

 

 ● 한국광복군 비행대 창설 계획

 대한민국 임시정부는 1920년대부터 항공력의 중요성을 인지하고 비행대를 창설하려는 계획을 세웠지만, 현실적인 어려움으로 가시적인 성과를 거두지 못하고 있었다. 다만 중국 항공학교에 한인 비행사들을 위탁교육시키고 이들이 활약하는 것으로 항공독립운동을 펼치고 있었다. 그러다가 1940년대 들어 공군설계위원회를 조직해 공군 건설을 위한 밑그림을 그리기 시작했고 본격적으로 ‘한국광복군 비행대’ 창설 계획을 수립하게 된다.

 이처럼 임시정부가 한국광복군 비행대 창설을 계획한 것은 국내진공작전을 펼쳐 일본과 직접 맞서 싸우기 위해서였다. 임시정부의 이러한 노력은 항공대 창설로 단순히 전투의 유리함을 얻고자 하는 것이 아니라, 연합군과 어깨를 나란히 하고 싸움으로써 종전 후 국제적으로 승전국의 입지를 확보하기 위한 군사·외교적 노력의 일환이었다는 점에서 더 큰 의의를 갖는다.

 

 ● 한국광복군의 국내진공작전

 한국광복군은 일제를 타도하고 승전국의 지위를 확보하기 위해 1944년부터 미국전략첩보국(OSS: Office of Strategic Service)과 공동으로 특수공작훈련을 받고 국내진공작전을 추진한다. 1945년 3월, 한국광복군은 미군과 6개 항에 합의하고 한미연합작전을 펼치기 위한 본격적인 계획에 착수한다. 합의 내용에 따라 OSS는 중국 내 한국인들과 한국광복군을 활용해 ‘독수리작전’이라는 이름의 국내진공작전을 펼치기로 하고 관련 요원들을 훈련시켰다.

 독수리작전을 위해 OSS 훈련을 받은 대원들은 한반도에 침투해 일제를 패망시키고 독립을 쟁취하겠다는 비장한 결의로 충만했으며 한반도에 최초로 상륙해 조국 광복의 선두에서 명예롭게 전사할 것까지도 각오하고 있었다. 그러나 국내를 세 개의 지구대로 나눠 세부적인 침투계획까지 세워놓고 출발 날짜만을 기다리고 있던 1945년 8월, 일본이 무조건 항복하면서 국내진공작전을 펼치려던 계획은 수포로 돌아가고 말았다.

 한국광복군의 국내진공작전 추진은 우리 민족의 항일투쟁사의 마지막 대목을 장식하는 사건이었다. 비록 일제의 패망으로 계획을 실천에 옮기지는 못했지만,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나갈 무렵 한반도에 최초로 진입해 조국광복의 혈전을 치르고 전사할 것을 불사했던 광복군 대원들의 불타는 의지를 우리는 기억해야 한다.

 

 ● 항공독립운동사 정립의 의의와 과제

 역사는 단순한 과거의 유물이 아니다. 현재를 돌아보는 통찰력과 더 발전적인 미래를 향한 제언과 방향성이 담겨 있다. 이런 점에서 항공독립운동사는 일제강점기는 물론 해방 후 6·25 전쟁을 지나 오늘에 이르기까지의 항공 활동을 돌아보는 출발점인 동시에 향후 항공활동의 청사진을 그리고 공군이 지향하는 가치들을 더욱 굳건히 할 수 있는 귀중한 자료다. 말하자면 항공독립운동사 연구는 우리 공군의 뿌리를 찾는 작업이라는 점에서 그 의의가 크다.

 또한 항공독립운동사의 정립은 일제 역사가들이 심어놓은 그릇된 역사관을 극복하기 위한 작업으로서도 의미를 지닌다.

 일제강점기 우리 민족의 독립운동사에 대해서는 많은 사실이 알려져 있고 사람들의 인식도 그만큼 확산돼 있지만, 그중 한 부분이라 할 수 있는 항공독립운동사는 그동안 상대적으로 크게 조명을 받지 못했다. 당시 상황과 활동한 비행사들에 대한 사료가 불충분하거나 부정확한 부분이 많고 이에 대한 체계적인 연구도 아직까지 미흡하다. 이는 항공독립운동사가 독자적인 분야로 확립되기 위해서 앞으로 해결해야 할 과제인 것이다.

이승복 기자 < yhs920@dema.mil.k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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