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8> 평양성 함락
당, 신라군과 돌궐·거란·말갈 기병 이끌고
한 달 넘게 평양성 포위 고립작전
허수아비 보장왕 겁에 질려 투항 결정
고구려군 성문 열고도 끝까지 저항
신라군, 만신창이가 된 평양성 최종 접수
668년 9월 평양, 그곳에 동아시아 대부분의 인종들이 집합해 있었다. 성 안에는 고구려인들이 있었고, 중국인·신라인 보병과 돌궐 기병, 거란·말갈·해 기병이 이를 둘러싸고 있었다. 당이 이끌고 온 병력 규모는 사상 초유였다. ‘책부원구’ 장수부는 번한병(番漢兵) 50만이라 하고 있다. 한 달 이상의 포위 기간 동안 고구려의 수뇌부는 속수무책이었다.
9월 12일 당군의 공성기가 쏘아 보낸 거대한 돌들이 쏟아지는 가운데, 보장왕은 연개소문의 셋째 아들 남산(男山)과 수령 98명을 보내 백기를 들었다. ‘자치통감’은 이렇게 전한다. “평양성을 포위하고 한 달이 지났는데 고려왕 고장(보장왕)이 천(연)남산을 파견, 수령 98명을 인솔해 백기를 들고 이적(李勣)에게 항복하게 하니 이적이 그들을 예의로 접대하였다.”
◆허수아비 왕의 선택 ‘항복’
그 ‘항복’은 보장왕이 일생에서 처음으로 자신의 의지로 내린 결정이었던 것 같다. 26년 전 연개소문이 쿠데타를 일으켜 삼촌인 고구려 국왕(영유왕)을 시해하고 주요 귀족 100여 명을 학살했다. 정변 소식을 듣고 보장왕은 공포에 떨었다. 집의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울렸고, 연개소문의 병사들이 대거 몰려와 삼중사중으로 포위했다. 그들은 왕족인 그를 보호하기 위한 것이라 말했지만, 언제 잡혀가 죽을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에 사로잡혔다. 그러다 병사들이 자신을 연행했다. 어디로 가는지도 몰라 가마에서 두려움에 떨었다. 하지만, 그는 왕궁으로 들어갔고 왕좌에 인도됐다. 자신의 의지와 상관없이 왕위에 올랐고, 연개소문의 눈치를 보고 사는 허수아비가 돼야 했다. 정사에 간여할 수 없었고, 연개소문이 내린 결정에 어김없이 추인을 해주는 도장이었다. 자신을 왕위에 올린 연개소문은 족쇄였지만, 그의 버팀목이기도 했다. 664년 10월 연개소문이 죽자 더한 불안에 시달려야 했다. 연개소문의 아들 사이에 내분이 터졌고, 형 남생을 만주로 몰아내고 평양을 장악한 남건(男建)에게 고개를 숙여야 했다. 내전은 더욱 심화됐고 고구려는 무너져 갔다. 가까운 강자에게 붙어 목숨을 부지했던 그의 관성이 고구려 최후의 평양성 전투에서도 나타났다. 보장왕은 코앞에 와 있는 강자 당군에 투항을 결정했던 것이다.
하지만, 연개소문의 차남인 남건은 성문을 닫고 저항했다. 형을 반역자로 만들고 고구려를 내분의 늪에 빠지게 해 멸망으로 이끈 것이 자신이라는 것을 인정하기 싫어서였다. 남건은 마지막까지 가망 없는 상황을 반전시키려 했다. 역습을 자주 시도했다. 고구려군이 성문을 열고 나오자 즉각 돌궐 기병이 달려들었다. 그들은 먼저 장창으로 맞서다 장창이 부러지자 칼을 꺼내 들었다. 칼까지 소모되자 방패를 휘둘렀으리라.
무의미한 희생이 계속 늘어나자 절망감을 느꼈는지 남건의 측근 신성이 배신했다. 그는 승려로서 남건의 군사 일을 책임진 사람이었다. 평양성에 있는 자신의 수하들과 함께 일을 꾸몄다. 먼저 당의 장군 이적에게 사람을 보내 항복을 청했다. 그리고 평양성문을 열어줄 시기를 잡았다. 그로부터 닷새 후 평양성의 문이 열렸고 성내에서 싸움이 시작됐다.
◆신라군의 활약
9월 17일 평양에 도착해 합류한 신라군이 성문으로 난입했다. 고구려군의 저항도 만만치 않았다. 700년에 가까운 역사를 가진 고구려가 무너지는데 그 소리가 나지 않을 리 없었다. 성문의 사방에서 불길이 치솟고 인간의 절규와 화살이 혼미하게 흐르는 가운데 만상의 소리가 울려 퍼졌으리라. ‘책부원구’ 제왕부는 이렇게 전한다. “성문의 누각 사방에 불길이 치솟고 북소리가 울려 퍼지는 가운데 중국 병사들이 성벽을 기어 올라갔다.”
평양성 안에서 병사들이 빽빽이 엉켜 도끼와 곤봉·칼이 낭자하는 싸움이 벌어졌다. 철퇴를 맞은 병사의 머리에서 피가 뿜어져 나왔고 절규하는 함성이 끝없이 이어졌다는 기록은 남아 있지 않다. 하지만, 단테가 묘사한 바로 그 ‘지옥’의 모습이었으리라.
평양성을 전략적으로 고립시키고, 성문을 열고 나온 고구려군의 파상적인 공격을 막아내는 데 돌궐 기병이 한몫했다면 공성기로 성벽을 공격했던 것은 당의 보병이었다. 신라군은 만신창이가 된 평양성을 최종적으로 접수하는 데 동원됐다. 그 이유는 중국인들보다 좁은 지역에서 싸우는 단병접전에 강했기 때문이다. 그들은 산성 아래에 펼쳐진 숲속에서 소규모로 뒤엉켜 싸우는 데 익숙했다. ‘삼국사기’는 이렇게 전한다. “한산주(漢山州) 소감(少監) 박경한(朴京漢)은 평양성 안에서 (고구려군)군주(軍主) 술탈(述脫)을 죽여 공이 첫째였으며, 흑악령(黑嶽의 縣令) 선극(宣極)은 평양성 대문(大門)의 싸움에서 공이 제일 많았으므로 모두 일길찬의 관등을 주고 조(租) 1000섬을 내려줬다.”
고구려군이 성문을 열고 군영을 급습해 왔을 때 서당의 당주 김둔산이 이를 성공적으로 제압했고, 평양성 앞 사천(蛇川)에서 대당의 소감 본득이 영웅적인 기지를 발휘했다. 남한산 소속의 소감 김상경도 여기서 고구려군을 격퇴하는 데 공을 세웠다. 하지만, 그는 치열한 싸움에서 전사했다. 신라군은 평양성의 정문(대문)·북문·소성·남교 등에서 전투를 성공적으로 수행했다. 특히 충남 아산 영인면 출신인 사찬 구율의 활약이 단연 돋보였다. 그는 평양성 앞 사천의 다리 아래로 내려가 물을 건너 고구려군을 공격해 승리를 거두는 데 결정적인 공을 세웠다.
◆대동강, 붉게 물들다
668년 9월 21일 평양성이 함락됐다. ‘삼국유사’ 흥법을 보면 평양성은 반달 모양인데, 도교 도사들이 대동강의 용(龍)에 명하여 보름달 모양으로 성을 증축하게 했다고 해서 용언도(龍堰堵)라 하고, 천 년을 갈 것이라 하는 내용의 참언(讖言)이 연개소문 집권 때 유포됐다고 한다. 연개소문이 평양성 방어벽 증축을 하면서 사업의 효용성을 신비화하는 일에 도사들을 동원했던 데서 비롯된 참언으로 여겨진다. 그로부터 겨우 20년 후에 천년보장도(千年寶藏堵)의 성벽을 따라 용이 몸부림치듯 불꽃이 일어나고 화염에 비친 대동강의 물은 용의 핏물인 듯 붉디붉었다.
고구려의 한복판에서 전쟁을 이기고 싶어 했던 당고종은 그 꿈을 이뤘다. 수나라 양제는 세 번에 걸쳐 백만대군을 이끌고 고구려 침공 길에 올랐지만, 그의 시도는 모두 실패로 끝났다. 고구려에 대한 수양제의 집착은 민생을 파탄시켰고, 그로 인해 수나라는 멸망하고 말았다. 신들에게 축복받은 정복자, 태종 황제조차도 그 작은 고구려를 굴복시킬 수 없었다.
당고종의 승리는 과거의 어두운 기억을 지우고, 중국의 역사 속에 박힌 가시를 뽑아냈다. 당고종은 고구려 침공에 참여한다는 자체가 저승길 행이라 생각했던 중국인들의 마음에 공포를 몰아냈고, 자신감을 되찾게 했다. 위대한 아버지 당태종에 대한 콤플렉스에 시달리던 당고종도 그것으로 자신의 힘을 만천하에 증명해 보였다.
668년 11월 5일 문무왕은 고구려인 포로 7000명을 줄줄이 묶어 왕경 경주로 개선했다. 그 장면을 목도한 신라인들은 그토록 무서웠던 강국 고구려가 멸망했음을 실감했다. 다음날 왕은 신하들을 이끌고 왕실 선조의 사당에 찾아갔다. 그리고 무릎을 꿇고 아뢰었다. ‘삼국사기’는 이렇게 전한다. “삼가 조상들의 뜻을 받들어 당나라와 함께 의로운 군사를 일으켜 백제와 고구려에 죄를 묻고 원융들을 처단하여 국운이 태평하게 되었습니다. 이에 함께 고하노니 신(神)이시여 들으소서!” 전쟁의 그늘에 결박돼 왔던 신라인들은 고구려와 백제의 멸망으로 고난의 끝을 보는 듯했다. 하지만, 그 너머에 또 다른 험난한 전쟁이 기다리고 있었다.
<서영교 중원대 한국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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