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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배층 분열·투항·배신 고구려 멸망 당 손아귀에 들어간 유목민

입력 2014. 05. 14   18: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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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6> 무너지는 고구려 


 설인귀 3000 병력에 고구려 1만 패배  부여성 항전 포기에 40개성 자진 항복

 

 


고구려의 물리적 군사력은 고갈돼 갔다. 고구려는 신성을 거점으로 서북방의 유목민들을 관리했으며, 그들이 겨울을 날 수 있는 곡물과 생필품을 제공해 주고 그 대가로 기병 자원을 지원받았다.

신성의 함락으로 고구려는 서북방의 유목민들을 군사로 동원할 수 있는 연결의 끈을 상실했다. 반면, 당은 수만의 유목민 기병을 동원할 수 있었다. 당시 북방 초원에서 당에 저항할 수 있는 유목민 세력은 없었다.

과거 동업 관계에 있던 유목민들이 당의 손아귀 안에 들어간 것은 고구려에 치명적이었다. 이제 그들은 고구려를 침공하는 당의 첨병이 된 것이다. 당에 대거 이끌려 온 돌궐계 유목민 기병들은 고구려성들 사이의 연락을 평지에서 차단했을 뿐만 아니라 그 구원군을 거침없이 공격했다.
 

 ◆신성 탈환 실패  

 667년 10월께 남건은 신성 탈환을 시도했다. 대규모 기병을 그곳으로 보냈고, 방동선과 고간의 군영을 공격했다. 당의 장군 고간이 휘하 유목기병들을 이끌고 성 밖으로 나왔고, 대규모 기병전이 벌어졌다. 처음에는 고구려가 우세했다. 하지만, 생각지도 않은 설인귀의 반격을 받았고 고구려군은 금산(山)으로 물러났다.

 금산성(山城)은 무순 고이산성(신성)에서 서북쪽 19㎞에 위치한 석대자산성(石台子山城)이라고 한다. 그곳은 동남쪽에 포하(蒲河) 강이 흐르고 있다. 요하 중류에서 무순(撫順)과 철령(鐵嶺) 지역으로 가는 길목이다. 여기서 동북쪽으로 30㎞ 가면 철령의 청룡산성(靑龍山城)과 최진보산성(催陣堡山城 : 남소성)에 이를 수 있다. 석대자산성은 요하 강 중류 동쪽의 강변 나루터와 교통요충지들을 지키는 진지며, 요하평원에서 고구려 내지로 들어가는 중요한 출입문이다.

 고간은 고구려군이 물러난 금산으로 쳐들어갔다. 하지만, 고구려 군대의 저항에 부딪혀 타격을 입고 후퇴했다. 고간이 일부러 패배해 고구려군을 유인하려 했는지는 알 수 없다. 고구려의 기병은 이를 추격했고 점차 대형이 흐트러지기 시작했다. 그러자 당의 장군 설인귀가 유목민 기병을 이끌고 갑자기 나타나 고구려 기병들의 측면을 급습했다. 고구려 기병은 갈팡질팡하다가 무너졌다. 이때 후퇴를 하던 고간도 뒤돌아서서 설인귀와 함께 고구려군을 협공했던 것 같다. 고구려군은 포위됐고 조직적인 살육이 시작됐다. 수만의 전사자가 나왔다. 이 패전의 여파는 컸다. 설인귀와 고간은 승세를 타고 남소성·창암성·목저성 등을 함락시켰다. 이로써 당군은 국내성에 있던 남생의 군대와 연결됐다.
 

 ◆잘못 둔 훈수  

 한편, 압록강에 도착한 이적은 부하가 어처구니없는 실수를 하는 바람에 도강을 포기해야 했고, 그해 평양을 포위하려던 계획이 틀어졌다. ‘자치통감’은 이렇게 전한다. “원만경(元萬頃)이 격고구려문(激高麗文)을 지어 말했다. ‘압록강의 험한 곳을 지키는지 모르겠다.’ 연남건이 답장을 보냈다. ‘삼가 명령 받들겠습니다.’ 바로 군사를 옮겨서 압록진(鴨綠津)을 점거하니 당의 군사들이 건널 수가 없었다.”

연남건에게 고구려 정벌의 당위성을 언급하는 격문에 들어간 한 줄의 글이 훈수가 돼 당군의 압록강 도하가 막혔다. 황제는 진노했고, 원만경은 지금의 광저우(嶺南) 지역으로 유배를 가야 했다. 667년 11월 이후 당군은 본토와 연락이 용이한 신성과 요동성 일대로 전선을 축소하고, 국내성 일대의 남생군과 연결해 방어에 임하면서 월동을 했던 것 같다.

 
 ◆부여성 함락 

 668년 봄 2월 설인귀는 신성에서 북상했다. 불과 3000의 병력으로 부여성(길림 사평)을 공격했다. 그는 적은 군사를 실제보다 많아 보이게 하는 기술이 있었다. 먼저 부여성 밖에서 고구려군과 전투가 벌어졌다. 이번에도 성 앞 평원에서 벌어진 기병전이 승패를 결정했다. 설인귀의 영웅적인 분전으로 고구려 기병 1만이 패배했다. 많은 사람이 죽었고 포로가 됐다. 그 광경을 본 부여성 사람들은 항전을 포기하고 문을 열었다. 소문을 들은 부근 40개의 고구려성도 자진 항복하고 말았다. 이 작전의 성공으로 요서의 연군(燕郡)-통정진-신성으로 이어지는 당군의 주된 보급선을 북쪽에서 위협할 수 있는 고구려의 세력이 제거됐다.

 연남건이 부여성을 다시 수복하기 위해 마지막 반격을 가했다. 병사 5만을 동원해 설하수에서 이적의 당군과 만나 전투를 벌였다. 하지만, 패배했고 시신 3만 구를 남기고 도망쳤다. 이세적은 여세를 몰아 압록강 변에 위치한 대행성으로 향했고 이를 함락시켰다. 이로써 고구려는 만주지역을 대부분 상실했고 다시 회복할 수 없을 정도로 타격을 입었다.

 고구려의 정신적인 저항력도 거듭된 지배층의 분열과 투항 그리고 배신으로 소진된 상태였다. 이는 전선의 당나라 군인들도 직감하고 있었다. 668년 2월 낙양출신 가언충(賈言忠)이라는 사람이 요동전선을 시찰하고 돌아와 당고종을 알현했다. 황제가 고구려 상황에 대해 물었다. ‘자치통감’은 이렇게 전한다. “고구려는 반드시 평정될 것입니다. 황제가 말하였다. 경이 그것을 어떻게 아는가? 대답하였다. 먼저 돌아가신 황제(당태종)가 동쪽(고구려) 정벌을 가셨다가 이기지 못한 것은 그때 아직 고구려에 틈새가 생기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지금 고장(보장왕)은 미약하고 권력을 가진 신하들이 명령을 멋대로 부리며 연개소문이 죽자 연남건의 형제들이 안에서 서로 공격하고 빼앗으며, 연남생의 마음이 기울어서 속으로 귀부하여 우리를 위해 길을 인도하니, 저들의 사정과 속임수는 모르는 것이 없습니다. …그 형세는 반드시 이기게 되어 있고, 다시 군사를 일으킬 것을 기다리지 않을 것입니다.”

 
 ◆토번, 타림분지에 요새 건설 

 고구려의 멸망이 눈앞에 와 있었지만, 세계제국의 통치자인 황제는 고민이 많았다. 제국의 사방에 강적이 있었고, 하나가 사라지려 하면 다른 하나가 나타나 제국을 위협해 왔다. 고구려와 전쟁을 하는 사이 서역의 상황이 점점 더 악화되고 있었다. 그해 토번이 서역 실크로드 지역에 대규모 군대를 투입하기 위한 기반작업을 본격화했다. ‘돈황본토번역사문서’ 대사기년(大事記年) 총장 원년(668) 조는 이렇게 전한다. “찬보(贊普)가 찰지녹원(札之苑)에 머물렀고, 이어 차말국(且末國)에 와서 보루(堡壘)를 건조(建造)하게 했다.”

 찬보는 토번의 왕 만손만첸(芒松芒贊)을 말한다. 차말국은 현재 신강성(新疆省) 차말현(且末縣)으로 티베트고원쪽 곤륜산맥과 타림분지가 만나는 지점이다. 하서회랑에서 청해호를 거쳐 차이담 분지를 지나 서역남로와 만나는 하늘의 실크로드에 토번의 실권자 갈이씨(mGar)가 왕을 모시고 나타났다는 것은 무엇이겠는가? 갈이씨의 토번 정예 대군이 실크로드의 천산남로를 차지하기 위해 서역남로에 거대한 군사기지를 세우고 있다. 너무나 중요한 이 시기에 당고종이 고구려의 마지막 숨통을 끊어놓기 위해 요동에 대군을 투입하려 했다. 너무나 위험한 도박이었다. 마냥 서역을 방치할 수도 없었다. 이미 서역남로의 소륵(疏勒:카쉬가르), 우전(于 :호탄)이 토번의 손아귀에 들어간 상태였다. ‘당대묘지휘편(唐代墓誌彙編)’에 실려 있는 아사나충묘지명을 보면 당고종이 이에 대응해 668년 동돌궐의 기병을 이끄는 아사나충(阿史那忠)을 청해도행군대총관(靑海道行軍大總管) 및 서역도안무대사(西域道按撫大使)에 임명했다고 한다. 하지만, 고구려와의 전쟁에 당의 주력이 집중돼 있었기 때문에 적극적인 대처를 했는지는 알 수 없다.  

 <서영교 중원대 한국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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