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밴 플리트-안중근 자기절제·희생정신 ‘닮아도 너무 닮아’

입력 2013. 11. 06   16: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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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안중근 장군의 살가운 동생


밴 플리트, 아이젠하워와 동기로 그리스 내전 종식 시켜 6·25전쟁 발발하자 유엔지상군사령관으로 지휘봉 잡아

 

 

 

●안중근과 밴 플리트

 ‘안응칠 역사’(안중근 장군 자서전)에는 1892년, 14세의 청년 안중근의 모습이 묘사돼 있다. 그해에 할아버지가 타계했으며, 어려서부터 사냥꾼들을 따라 산과 들로 다녔던 장군은 그때부터 총을 메고 본격적으로 사냥을 즐겼다. 학문에 등한해서 부모님과 선생님들의 꾸지람을 받고 친구들의 충고를 들었으나, 그는 “글은 이름이나 적을 줄 알면 그만이다”라는 초패왕 항우의 말을 되새기며, 후세에 길이 남을 영웅이 되겠다고 결심했다.

 청년 안중근이 대장부의 꿈을 키우기 위해서 본격적으로 사냥에 나섰던 그해에, 미국전쟁사에 탁월한 야전지휘관으로 기록될 아이가 태어났다. 바로 밴 플리트다. 13살 나이 차이의 안중근과 밴 플리트는 이상하리만치 닮았다.

 안중근은 평생 즐기는 네 가지가 있었다. 1) 친구와 의리를 맺는 것 2) 술 마시고 노는 것 3) 총으로 사냥하는 것 4) 날쌘 말 타고 달리는 것. 그러나 1905년 을사늑약이 체결되고 부친이 타계하자, 국권이 회복될 때까지 술을 끊기로 결심하고 순국하실 때까지 단 한 잔의 술도 입에 대지 않았다. 안중근은 나라를 위해 술을 끊은 반면, 밴 플리트는 천성적으로 술을 멀리했다는 차이뿐, 둘은 취미가 똑같았다. 참고로 밴 플리트는 담배도 피우지 않았다.

 또한, 둘은 솔직하게 마음을 표출하는 직선적인 성격의 소유자였으며, 준법정신이 투철했다는 점에서도 속된 말로 붕어빵이었다. 즉, 1) 안중근 장군이 일본군 포로들을 부하의 반대를 무릅쓰고 만국공법에 따라 석방함으로써 패전하는 쓰라림을 맞본 사례와 2) 밴 플리트 장군이 아들과 아프리카로 사냥여행을 갔다가 자신은 사자 1마리, 아들은 2마리를 잡고는, 코뿔소가 나타나자 코뿔소 사격면허는 없다는 이유로 부자가 나무 위로 피신해 죽을 고비를 넘겼던 사례를 보면 안중근과 밴 플리트는 그 형에 그 아우라는 느낌이 든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두 장군은 자기절제와 자기희생을 통해 국가발전과 국민행복에 기여하려는 굳건한 마음을 가졌었고, 이를 몸소 실천했다는 점에서 부모와 국적은 다르지만 살가운 형제나 다름없었다.


●말 잘 타는 명사수, 미식축구 스타

 밴 플리트는 네덜란드계 미국인이다. 미국이 독립을 선언하던 해인 1776년에 증조부가 미국으로 이주했기 때문이다. 1892년 3월 19일, 미 뉴저지 주 코이테스빌에서 태어난 밴 플리트는 이듬해 부모를 따라 플로리다로 이주해 그곳에서 자랐다. 아버지가 사업에 실패하는 바람에 그는 어린 나이에 식품점에서 일하며 돈을 벌어야 했다.

 1911년 뉴욕에 있는 미 육군사관학교에 입학할 당시 그는 신장 185㎝, 체중 84㎏의 거구였으며, 학창시절에 공부보다는 최고의 명사수, 말 잘 타는 생도, 걸출한 미식축구 선수로 이름을 날렸다. 1915년 6월, 그는 아이젠하워(미국 대통령 역임)와 함께 사관학교를 졸업했는데, 168명의 졸업생 중에서 아이젠하워는 61등, 밴 플리트는 92등이었다. 같은 해 12월, 밴 플리트는 컬럼비아 대학 졸업생 헬렌 무어와 결혼했다.

 밴 플리트는 1916년 멕시코 산적 토벌 원정군으로 참전했고, 제1차 세계대전이 막바지에 이르렀을 때는 1년간(1918년 7월 ~ 1919년 6월) 대대장으로 프랑스에 파병되어 독일군의 대공세 저지 및 독일점령군의 임무를 수행했다. 이후 그는 미 학군단 교관과 플로리다 대학교 미식축구 코치를 역임했다.


●진급과 술에 얽힌 일화

 아이젠하워 등 사관학교 동급생들이 장군으로 진급하던 1941년, 밴 플리트는 그제야 대령으로 진급했다. 그리고 제2차 세계대전 중에 패튼 장군 휘하에서 연대장으로서 탁월한 전공을 세웠으나, 1942년과 1943년의 진급심사에서 낙오됐다. 그를 아끼는 상관들이 진급 추천을 했지만, 당시 미 육군참모총장이던 마셜 장군은 술주정뱅이를 장군으로 진급시킬 수는 없다며, 추천서를 쓰레기통에 던져버렸다고 한다.

 이런 해프닝은 이름을 기억 못 하기로 악명 높은 마셜 총장이 술꾼인 다른 대령과 밴 플리트를 혼동했기 때문에 벌어진 일이었다. 평생 술을 입에 대지 않는 ‘teetotaler’(절대 금주자)라는 사실이 밝혀짐으로써 밴 플리트는 마침내 1944년 7월에는 준장으로, 그 4개월 후에는 소장으로 진급했다.


●그리스 내전 종식의 영웅

 1944년 11월, 나치 독일의 점령에서 벗어난 그리스는 심각한 이념대립의 장으로 변했다. 그리스 공산당은 국가전복을 위해서 군사력을 동원해 살상과 파괴, 선전선동을 일삼고 있었다. 반란이 최고조에 달했던 1948년에는 그리스 전체인구 800만 명 중에서 공산주의자 혹은 동조자가 750만 명에 이르렀다고 하니, 당시 그리스 정세가 얼마나 위태로웠는지 짐작할 수 있다.

 1947년 3월, 미국 트루먼 대통령은 공산주의 세력의 확대를 저지하기 위해 자유와 독립을 추구하는 국가에 대해서 군사 및 경제 원조를 제공하겠다는 외교정책을 천명했다. 같은 해 5월, 트루먼 독트린의 일환으로 그리스 공산화 저지를 위한 미 육군 그리스군사지원단이 창설되고, 그해 말 미 합동 군사고문계획단(Joint US Military and Planning Group)으로 확대 개편됐다. 1948년 초, 밴 플리트 장군은 이 조직의 실질적인 책임자로서 아테네에 부임했다.

 당시 워싱턴의 일부 외교관과 고위 장성들은 밴 플리트의 임명에 대해 심각한 우려를 표명했다. 너무 직선적이고 단순하며 솔직한 성품을 지닌 그가 자만심 강하고 예민한 그리스인들 사이에서 막무가내로 날뛸 것으로 추측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들의 예상은 여지없이 빗나가고 말았다.

 밴 플리트는 알렉산더 파파고스를 그리스군 총사령관으로 지명해 자유를 열망하는 그리스인들이 내전의 주도권을 잡아 반군들을 분쇄토록 하는 산파(産婆) 역할을 훌륭히 해냈다. 공산게릴라는 밴 플리트가 29개월 동안 그리스에 근무하는 동안 거의 소탕되어 그가 1950년 7월 미국으로 귀임할 때에는 잔여병력이 500명이 채 되지 않았다고 한다. 또한, 그는 미국이 그리스에 4억 달러 상당의 군사원조를 하도록 하는 데에도 크게 기여했다.

 이러한 성공적인 일 처리로 밴 플리트는 그리스인들로부터 적색 침략으로부터 그리스의 자유를 지키게 해준 고마운 은인이자, 대중적인 영웅의 대접을 받았다. 1955년 그리스 북부도시 카스토리아에는 밴 플리트의 이름을 딴 광장이 만들어지고, 그의 흉상이 청동으로 제작됐으며, 2007년에는 새로운 동상으로 교체됐다. 밴 플리트가 6·25전쟁 발발 소식을 접한 것은 그리스에서였다. 그리고 이듬해에 그는 한반도에서 공산 침략을 저지하는 유엔지상군사령관이자, 미 제8군사령관으로서 지휘봉을 잡게 된다.

<이현표 전 주미한국문화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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