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밴 플리트, 외아들 지미 6·25전쟁 중 잃다

입력 2013. 11. 04   17: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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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밴 플리트 장군 아들의 실종


  B-26 폭격기 4번째 출격 중 평북 선천지역에서 실종  “아버지 돕기 위해” 자원…훈남으로 사냥에 천부적 재능

 

 

 

 

 ●‘내 몫까지 살아 주’

 북한 공산집단이 한반도 적화를 위해서 동족의 가슴에 총을 겨눴던 6·25전쟁은 자유를 사랑하는 한민족과 세계인에게 커다란 상처를 남겼다. 그 상처는 많은 영화로 제작됐으며, 그 중 하나가 ‘내 몫까지 살아 주’(1967년)다. 전쟁 중에 사랑하는 아내와 생이별한 사내가 재혼해서 단란한 가정을 꾸리고 사는데, 죽은 줄 알았던 본처가 나타난다. 두 여인 틈에서 고민하는 남편을 위해 새 아내가 전처에게 자기 몫까지 살아줄 것을 부탁하고 떠난다는 얘기다.

 우리가 현재 이렇게 잘살게 된 것은 6·25 전쟁터에서, 그리고 전쟁 후의 공간에서 내 몫까지 살아 달라며 자신을 희생했던 분들에게 힘입은 바 크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오늘을 사는 우리는 그런 희생에 대해서 무감하게 되지 않았나 싶다. 이는 한편으로는 그때의 비극을 다시 상기하고 싶지 않은 이유도 있겠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지난 세기말 냉전의 종식과 더불어 한반도 통일의 꿈이 곧 실현될 것 같은 분위기가 팽배했었기 때문일 것이다. 하지만, 이제 우리는 그 꿈이 현실과 얼마나 거리가 먼 것이었는지 새삼 깨닫게 됐다. 특히 이산가족 상봉을 여전히 정치적으로 악용하는 북한 세습왕조의 만행을 보면 더욱 그렇다. 따라서 굳이 현충일이 아니더라도 가끔은 전쟁 희생자들에게 경의를 표하고, 자유와 정의가 넘치는 통일한국의 미래에 대한 다짐을 새롭게 해야 할 줄로 믿는다.

 6·25전쟁의 상처는 우리 민족에게만이 아니라, 미국을 비롯한 유엔참전국 장병과 그 가족에게도 마찬가지였다. 그중 하나가 당시 유엔 지상군사령관이자 주한미군사령관이었던 밴 플리트 장군과 행방불명 된 그 외아들의 비극이다. 이들의 비극은 바로 ‘내 몫까지 살아 주’의 영화 제목을 연상시킨다. 아들은 만 26세 때에 실종됐지만, 그가 그렇게도 존경하고 따랐던 아버지는 100세까지 장수했기 때문이다.


 ●뉴욕 타임스의 충격적인 보도

 6·25전쟁이 한창이던 1952년 4월 6일, 뉴욕 타임스 신문은 제1면과 3면에 군복차림의 청년 사진과 함께 ‘밴 플리트 장군의 아들, 한국에서 실종’이라는 제목 아래 장문의 기사를 실었다. 중공군과 북한군의 대한민국 침략 저지를 위해 파견된 총지휘관의 외아들이 작전 중에 행방불명됐다는 충격적인 뉴스였다.

 신문은 제임스 밴 플리트 2세(James van Fleet Jr. 1925~1952, 이하 ‘지미’라고 표기) 대위가 한국전 참전 후 4번째 전투임무 수행을 위해 평안북도 선천지역으로 출격했다가 실종됐다고 보도하면서, 눈물 없이는 읽을 수 없는 감동적이고 애국적인 글을 실었다. 즉, 지미가 한국전선으로 오기 직전에 어머니에게 보낸 다음과 같은 내용의 편지다.


 “사랑하는 어머니:

 군인의 아내에게 드리는 이 편지가 눈물로 얼룩지는 것을 저는 바라지 않습니다.

 저는 자원해서 전투요원 비행훈련과정에 참여하고 있습니다. 이곳 랭글리 공군기지에서 훈련을 완전히 이수하면, 1952년 2월 9일 이곳을 떠나 캘리포니아로 갑니다. 곧이어 3월 초에는 캘리포니아를 떠나 한국으로 향하게 될 것입니다.

 저는 한국전선에서 B-26 폭격기를 조종할 것입니다. 조종사인 저는 폭격수, 항법사, 기총사수와 함께 야간비행임무를 수행하며, 폭탄과 기관총을 싣고 비행하게 되므로, 그 작동방법에 대해 충분히 익힐 것입니다.

 이제 바야흐로 제가 어머님의 남편을 지원할 때가 되었습니다. 미국을 대표해 모든 인간에게 공포 없이 살 수 있는 권리를 보장해주기 위해 투쟁하고 계신 아버님을 돕는 날이 가까웠습니다.

 어머니, 부디 저를 위해서가 아니라, 저와 함께 행동하는 승무원들을 위해서 기도해주세요. 그들은 전문가가 아닙니다. 이 위기의 순간에 자기 가정을 방어하도록 나라로부터 임무를 부여받은 민간인들입니다. 결혼해서 귀환을 기다리는 부인이 있는 요원도 있고, 아직 가정을 이루지 못한 이들도 있습니다. 저는 최선을 다할 것입니다. 그것은 언제나 저의 임무이기도 합니다.  아들 짐 드림.”


 ●훤칠한 훈남 청년 지미

 신장이 2m에 가까운 미남 청년 지미는 웃음이 늘 입가에 머물고 유머 감각이 풍부했으며, 남다른 희생정신의 소유자였다고 한다. 그는 1948년 6월 8일, 미 공군사관학교를 졸업하던 날 오후, 학교 예배당에서 동급생 중 가장 먼저 결혼했으며, 이듬해 아들을 낳았다.

 베개 밑에 교과서를 놓고 자면 책의 내용이 자는 동안 뇌에 입력된다고 믿었던 지미는 공부보다는 운동에 소질이 있었다고 한다. 실제 그는 미국 대학 수영 200m 평형 기록보유자였다.

또한, 지미는 사냥에 천부적인 재능이 있었다. 밴 플리트 장군은 그런 아들을 늘 대견스러워했고, 시간이 나면 지미를 데리고 사냥하러 다녔다.

 지미의 실종은 밴 플리트 장군 가족에게 엄청난 비극이었다. 위로 딸만 둘을 낳은 후 얻은 외아들이기도 했지만, 굳이 지미가 한국전쟁에 참전해 희생당할 이유가 없었기 때문이다. 지미는 내전 상태의 그리스에서의 근무를 마친 후였기 때문에 해외근무를 해야 할 자격도 필요도 없었다. 그러나 그는 주로 야간 작전에 투입되는 B-26 폭격기 조종훈련을 받고 한국전쟁 참전을 자원했다. 위의 편지는 참전 명령을 받은 직후, 어머니에게 쓴 것이다.

 1952년 3월 14일 한국에 도착한 지미는 닷새 후인 3월 19일, 동료 승무원들과 함께 아버지 환갑잔치에 참석해 축하케이크를 잘랐다. 또한, 부자는 서울 북쪽의 개펄에서 야생 기러기 사냥을 하기도 했다. 밴 플리트 장군은 4월 2일, 지미와 통화를 하면서 아들이 한국에서의 근무에 잘 적응하고 있으며 북한 지역에 출격한다는 사실을 알고는 매우 흐뭇해했다고 한다. 그러나 이는 밴 플리트 부자의 마지막 통화였다.

 4월 4일 새벽, 지미는 한국에 도착한 지 21일 만에 네 번째의 출격 임무를 수행하다가 실종됐다. 편지에 언급된 승무원인 조종사 겸 폭격수 존 맥칼리스터 중위, 기총사수 겸 기관병 랄프 펠프스 일병과 함께!

 이날 오전 10시 30분, 밴 플리트 장군은 아들의 행방불명 소식을 들었다. 바로 이틀 전에 군인으로서의 임무 수행을 그렇게 밝은 목소리로 자랑스럽게 얘기하던 자식을 잃은 아버지의 심정은 어떠했을까?

<이현표 전 주미한국문화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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