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방 해군·해병대

3년 6개월의 도전 마침내 감동으로…1993년 6월2일 장보고함 취역

입력 2013. 09. 16   09: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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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근식의 SubmarineWorld <48>한국 잠수함의 어제와 오늘 (7)


1년간 취역·대잠 등 훈련 1995년 첫 출동

1994년엔 국내 최초로 건조한 이천함 인수

 


 

 

 

 ▶한국으로의 이동 준비

 독일에서 모든 장비를 점검하고, 우리의 꼼꼼함 덕분에 많은 수리부속품을 무료로 챙기는 부수입까지 올리며 장거리 항해 준비를 끝냈다. 이제 독일에서 장비 운용능력을 습득하고, 해상훈련으로 숙련도를 높임으로써 그야말로 한국으로의 이동을 위한 모든 것이 준비된 것이다. 이제 우리는 한국으로 어떻게 이동할 것인가를 검토하기 시작했다.

 우선 자력(自力)으로 항해해 이동할 것인가, 화물선에 싣고 갈 것인가 하는 문제가 검토됐다. 자력으로 이동할 경우 항로는 1안은 수에즈 운하 경유 방안, 2안은 파나마운하 경유 방안, 3안은 희망봉 경유 방안 등으로 압축됐다. 1안의 경우 총 항해거리 1만1170마일(2만687㎞)로 73일이 걸리고, 2안의 경우 1만3750마일(2만5465㎞)로 97일 , 3안의 경우 1만4710마일(2만7243㎞)로 104일이 걸리는 것으로 검토됐다. 우리는 중간에 거치는 국가 및 항구가 비교적 안정적인 파나마 운하 쪽으로 결정되기를 기대했다.
 

▶잠수함을 상선에 싣고 이동키로 결정

 그러나 해군본부는 장거리 항해에 따른 외교적 협조, 해적 등 테러 문제, 군수, 정비문제, 무기적재, 수상함에 의한 호송문제 등을 고려해 화물선에 싣고 수에즈 운하를 거쳐 이동하는 것으로 최종 결정했다.

 이동에 대비해 열심히 준비하고 훈련한 우리 승조원들의 자존심은 일시에 무너졌다. 군함을 인수받아 자력으로 항해해 이동하는 것이 그동안의 관례였고, 이 기간은 승조원들의 항해숙달을 위한 절호의 기회였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과거 타국의 이동사례를 확인한 결과 브라질, 인도네시아 등도 모두 자력으로 항해했는데 우리가 못 할 게 무엇인가? 우리는 자력 항해를 주장했다. 하지만 해군본부에서는 더 큰 시각으로 보았다. 우선 잠수함에 어뢰 등 무기가 실려 있지 않아 우리의 잠수함 보유를 반대하는 주변국의 테러가 있을 경우 자체방어가 곤란하다는 것이 가장 큰 이유였다.
 

▶장보고함 수에즈 운하 통과

  장보고함은 한국 군함으로 정식 취역식(군함으로서 맡은 일에 투입하는 의식)을 하지 않았기 때문에 무장을 실을 수 없었다. 좀 우스운 이야기지만 당시 해적이 자주 출몰한다는 정보를 듣고 수에즈 운하, 말라카 해협을 통과할 때는 해상 테러에 대비해 곤봉을 차고 맨몸으로 테러에 대비하는 자체 훈련도 했다. 다음 문제는 이동기간이 최소 2개월 이상 소요되므로 장기간 항해할 경우 장비가 고장 날 확률이 높다는 것이다. 일단 안전하게 한국에 도착하는 것이 중요했다. 우리는 화물선으로 이동하는 방법을 준비했다. 당시 1200톤급 군함을 탑재해 이송할 수 있는 화물선은 전 세계에 1척뿐이었으며, 이는 네덜란드 선적의 독 익스프레스(Dock Express), ‘ 해피 뷰케니어(Happy Buccaneer)’였다. 이 상선은 전장 145미터에 톤수는 1만3740톤이었고, 최대 화물 적재량은 2500톤이었다.

 우리는 승조원 절반가량을 항공기편으로 귀국시키고 상선으로 이동하는 단계에서 발생할 수 있는 긴급한 상황에 대비해 함을 운용할 수 있는 핵심요원만 화물선에 편승해 국내로 이동했다. 1993년 4월 16일, 약 2년 반 동안의 독일 체류를 마치고 장보고함을 최상의 상태로 정비해 ‘해피 뷰케니어’선에 실은 다음, 킬(Kiel) 운하, 도버해협, 지브롤터 해협, 수에즈 운하, 홍해, 인도양, 믈라카 해협, 대만해협 등을 통과해 36일 만인 1993년 5월 20일 한국의 대우 조선소에 도착했다.
 

▶역사적인 진해 모항 입항, 저 배는 무슨 배일까?

  대우 조선소에서 최종점검을 마치고 드디어 진해 모항(母港)으로 이동하는 날, 진해 수로에 장보고함이 나타나자 모든 어선이 잠수함의 항해를 방해했다. 어선들은 생전 처음 보는 시커멓고 흘수가 낮은 멀리서 보면 어선 같기도 한 배가 수로(水路)를 항해하자 앞다퉈 구경하느라 접근하는 바람에 곤혹을 치렀다. 하지만 감개무량한 항해였다.

내가 대위(大尉) 시절에 미국 잠수함을 타고 진해 수로를 통과하던 때 우리 해군은 언제나 잠수함을 가져보나 하는 부러움뿐이었는데, 내가 직접 우리 잠수함을 타고 진해 수로를 통과하는 날을 맞이한 것이다. 항해하는 데 안전을 방해하는 어선들의 환영을 받으면서 모항으로 향하니 그야말로 만감이 교차하는 순간이었다. 지난 2년 반 동안 독일에서 가족도 없이 혼자 생활하며 갖은 고생을 하던 일들이 주마등처럼 스쳐 갔다. ‘저 배가 무슨 배일까?’ 하고 달려드는 어선들! 그들에게 한국해군 최초의 잠수함 장보고함이라고 고함치고 싶었지만 요리조리 안전하게 침로를 잡고 항해하기에 급급했다.

 
▶장보고함(SS-061), 드디어 취역기를 게양하다

 앞서 언급했지만 장보고함은 1991년 9월 독일에서 이름이 붙여졌다. 그러나 이것은 사실상 군함으로서 가명을 붙이는 단계였지 진정 장보고함이 탄생한 것이라고 볼 수는 없다. 왜냐하면 독일에서 인도·인수식과 더불어 이름을 붙이는 명명식이 거행됐지만 당시 소유권은 HDW 조선소에 있었고 조선소에서 해군에 정식 인도 후 해군 취역기를 게양해야 군함으로서 자격이 있는 것이다.

1993년 6월 2일, 우리는 국방부 장관을 모시고 당당히 해군 군함으로 취역하는 취역식을 거행했다. 일순간 장보고함 해외인수를 위해 약 3년 반 동안 시달리고 부대끼고 했던 시련의 순간들이 잊혔다. 도전은 참으로 큰 감동을 주는 것 같다. 취역한 날부터 언론매체들은 장보고함의 취역을 보도하기 시작했다. 1200여 년 전의 장보고 대사가 환생(幻生)해 대한민국 관할 해역을 누비기 시작한 것이다. 천하를 얻은 기분 그 자체였다. 이후 1994년 5월 이천함이 취역했고 2001년까지 해마다 1~2척씩 취역하는 경이적인 기록도 세웠다.

 장보고함은 1993년 6월 취역 이후 1년간 취역훈련, 한국해역 전장 환경 숙달, 한국해군 수상 전투함·항공기들과 대잠전 훈련 등을 성공적으로 마치고 1995년 첫 번째 출동임무를 개시했다. 또한 1993년 장보고함 취역 이후, 1994년 3월 잠수함 기지전대 및 보급소가 창설됐고, 같은 해 4월 국내에서 최초로 건조한 이천함 인수, 12월 잠수함 수리창 창설 등이 있었다.

또한 1995년 1월에는 최무선함 인수, 8월 박위함이 인수되는 등 급속하게 그러면서도 안정되게 부대가 확장됐다. 이로써 잠수함 부대는 잠수함 4척, 돌고래 3척으로 1995년 10월에 잠수함 전단을 창설하기에 이르렀다. 다음 회에 계속




잠수함 퀴즈

일반 공기 중에 산소 농도는 21% 정도다. 잠수함 내에서는 산소 농도를 몇% 정도 유지하는가?
지난주 정답 : 미국, 영국, 프랑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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