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획 완결 한미동맹60년 함께가는 60년

베트남 파병 계기로 협상 가능한 관계로 발전

김병륜

입력 2013. 07. 28   18: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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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9>1960년대 한미 군사관계


국익 고려해 54년부터 한국이 먼저 美에 파병 제안 미국의 안보·경제적 지원 이끌어낼 지렛대로 선택


1960년대에 접어들면서 한미동맹은 큰 변화를 맞게 된다. 첫 번째 신호탄은 한미행정협정(SOFA) 논의 착수였다. 1958년부터 1960년대 초반까지 일부 미군 병사들의 탈선 행동으로 행정협정을 통해 미군들의 행동을 통제할 법적 장치가 필요하다는 목소리가 높아졌다. 처음에는 난색을 표하던 미국도 결국에는 한국의 입장을 이해했다. 이에 따라 한미 양국은 1961년 4월 10일 행정협정 논의를 시작했다. 60년대는 그처럼 양국 간의 굳건한 동맹관계를 유지하면서도 양국 간 여러 가지 현안을 좀 더 법적이고 제도적인 틀 안에서 규율해 가기 시작한 시대였다.

 이 같은 변화의 흐름을 가속화한 것은 베트남 파병이었다. 6·25전쟁과 베트남전 전문가인 최용호 전쟁과평화연구소 소장은 한미동맹의 역사를 회고하면서 “베트남전 이전과 베트남전 이후로 구분할 수 있다”고까지 말한다. 베트남 파병이 한미관계를 변화·발전시킨 하나의 계기가 됐다는 의미다.

◆이승만 대통령의 파병 시도

 베트남 파병은 박정희 대통령 재임 시절인 제3공화국에서 이뤄졌지만 그 이전 이승만 대통령 때도 해외파병 논의는 있었다. 이 대통령은 1954년 1월 28일 존 헐 유엔군사령관 겸 극동군사령관에게 라오스에 국군 1개 사단을 파병하겠다고 제안했다.

 전문가들은 당시 이 대통령의 파병 제의는 한국군의 전략적 가치를 보여줌으로써 한국군 전력 증강 요구를 측면지원하기 위한 것이었다고 해석하고 있다. 아울러 서태평양에 반공군사동맹을 만들기 위한 논의를 촉진하려는 의도도 있었다고 본다.

 미 합참은 이 대통령의 제의를 즉각 검토했다. 검토 결과 정치적·심리적 실익은 있으나 군사적 실익이 크지 않다는 평가가 내려졌다. 라오스를 포함한 인도차이나 지역의 상황이 너무 복잡해 1개 사단의 파병으로 획기적인 군사적 상황 변화를 기대할 수 없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이에 따라 미국의 국가안보회의(NSC)는 “미국이 한국에 주둔하고 있는 상황에서 한국군을 다른 나라에 파병하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고 결정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대통령은 미국에 파병 제안을 계속했다. 그만큼 한국이 미국에 제시할 카드가 별로 없었다는 뜻이기도 하다.

 이 대통령은 1954년 6월 미 군사원조프로그램을 검토하기 위해 한국을 찾은 밴 플리트 전 미8군 사령관에게 베트남에 국군 3개 사단을 파병하겠다고 제안했다. 같은 해 7월에는 브릭스 주한 미 대사에게 2~3개 사단을 파병하겠다는 입장을 전달하기도 했다.
  

 ◆박정희 정부의 파병 노력

 박정희 정부도 출범 직후부터 베트남 파병을 거론했다. 그 출발점은 이 대통령 시절의 파병 제안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5·16 직후 임명된 정일권(예 육군대장) 주미 대사는 1961년 6월 30일 존 F. 케네디 미 대통령에게 신임장을 제청한 후 “한국은 미국과 한국이 같은 운명체였음을 잊지 않을 것”이라며 “필요하다면 양국의 공통 목표를 위해 한국인의 목숨을 희생하는 것을 주저하지 않을 것”이라고 말했다.

 박정희 최고회의 의장도 같은 해 7월 26일 케네디 대통령에게 보낸 서한을 통해 “공산주의의 침략에 대항하는 전 세계에 걸친 방위를 언급한 케네디 대통령의 발언을 환영한다”며 “우리도 평화를 원하지만 전쟁이 강요된다면 대한민국은 싸움에 참여할 첫 번째 동맹국 중 하나가 될 것”이라고 언급했다.

 이때까지 한국 측은 베트남 파병을 구체적으로 언급하지 않았지만 그 해 말에는 좀 더 직접적인 제안이 이뤄졌다. 박 의장은 11월 14일 케네디 대통령과의 회담에서 “미국의 동의와 지원이 이뤄진다면, 한국은 베트남에 한국군을 보낼 수 있다”고 제안했다. 이 뒤에도 1964년 초까지 한국 측의 파병 제안이 계속됐다. 하지만 한국 측의 이 같은 제안에 미국 측의 적극적인 반응은 없었다. 미국은 게릴라전 위주의 전장환경을 고려할 때 제3국 지상군을 투입하는 방식의 작전이 부적절하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당시 한국이 파병 제안을 계속한 이유는 무엇일까. 최용호 박사는 “미국의 원조를 받는 한국 처지에서 미국 측에 반대급부로 제안할 마땅한 카드가 (파병 외에는) 없었다”고 당시 상황을 풀이했다. 동맹관계에서 한국 측이 희망하는 지원을 받기 위해서는 한국도 무언가 미국에 지원할 것이 있어야 하는데 당시로서는 그것이 파병이었다는 이야기다.

 다시 말해 우리의 국익을 위해서라도 파병이 필요했다는 이야기가 된다. 여기에 ‘6·25전쟁 때 우리나라를 도와준 미국에 은혜를 갚는다’는 보은외교의 관점, 공산주의자의 침략으로 큰 위기에 빠졌다 유엔군의 도움으로 나라를 지켜낸 우리나라가 이제는 또 다른 자유진영의 국가를 지키는 데 힘을 보탠다는 상징성도 파병 제안의 또 다른 이유가 된다.
  

 ◆파병 논의 본격화

 지지부진하던 파병 논의에 물꼬를 튼 것은 미국의 정책 변화였다. 미국은 1964년 3월 17일 베트남 사태에 더욱 적극적으로 개입하겠다는 결정을 내렸다. 이 같은 결정과 함께 “보다 많은 동맹국을 끌어들여 국제사회의 참여와 지지를 얻어낸다”는 방침도 정했다. 군사적 필요성 못지않게 자유세계 국가들이 함께 싸운다는 명분도 중요하다는 점을 인식한 것이다.

 같은 해 5월 9일 미국의 린든 존슨 대통령은 박정희 대통령을 비롯한 자유 우방 25개국에 파병을 포함한 베트남 지원 방안을 검토해 달라는 내용을 담은 서한을 보냈다. 이 서한에는 한국에 이동외과병원 파병을 요청하는 내용도 포함돼 있었다.

 이어 7월 15일에는 남베트남의 응웬칸 수상이 한국군 파병을 요청하는 공식서한을 한국에 보냈다. 이미 파병 실무 준비를 시작한 국방부는 23일 국회에 ‘국군의 해외파견에 대한 동의’를 공식 요청했다. 국회 본회의는 이 같은 파견동의안을 31일 만장일치로 통과시켰다. 창군 이래 첫 해외파병이 공식화되는 순간이었다.

 

[인터뷰]최용호 전쟁과평화연구소 소장-“베트남전은 파병을 통한 한미 협력관계의 모델”   


“한미동맹을 시대별로 구분한다면 1948년부터 베트남 파병 이전 1963년까지를 1기, 베트남 파병 이후인 1964년부터는 2기로 구분할 수 있습니다.” 6·25전쟁과 베트남전 전문가인 전쟁과평화연구소 소장 최용호(사진) 박사의 설명이다.

 베트남 파병을 한미동맹 역사에서 하나의 획기로 구분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최 박사는 “베트남 파병 이전의 한미동맹을 한국이 일방적으로 미국의 도움을 받는 형태의 동맹이었다면, 베트남 파병 이후부터는 서로 주고받을 것이 있는 형태의 동맹으로 발전했다”고 의미를 부여했다. 최 박사는 “베트남 파병을 계기로 한미 양국이 서로 협상할 수 있는 파트너가 됐다”며 “그것은 한미동맹의 역사에서 본질적인 변화”라고 말했다.

 최 소장은 베트남전 파병이 양국 협력관계의 한 모델이 되었다는 점도 중시했다. 최 소장은 “한국군을 베트남에 파병하면서 한미 양국은 다양한 레벨에서 여러 가지 협상과 협의를 했다”며 “그 같은 협의 과정을 통해 탄생한 파병 모델은 90년대 이후 파병이 재개되었을 때 하나의 참고서 역할을 했다”고 설명했다.

 최 소장은 “베트남 파병은 한국의 국익이나 양국 동맹관계의 발전에 분명히 기여를 했다”며 “다만 동맹관계는 시대 상황에 따라 계속 변화할 수밖에 없는 속성이 있는 만큼 전략환경의 변화에 따라 앞으로 동맹이 어떻게 바뀔 것인지를 예측하고 미리 대비하는 지혜가 필요하다”고 말했다.



김병륜 기자 < lyuen@dema.mil.k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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